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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운찬 형님, 관두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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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정운찬 형님, 관두시죠!"

[김기협의 '페리스코프'] 치세의 능신, 난세의 등신?

어제 몇 시간 청문회 중계방송을 봤습니다. 거기 나타난 형님 모습은 예상한 데서 별로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어젯밤 자리에 누워서도 새벽이 가깝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막상 형님의 총리 취임이 목전의 일로 다가오니 좋은 생각보다는 궂은 생각이 더 많이 마음 속을 오가는군요.

보름 전 공개 편지는 고심 끝에 드린 것입니다. 거기도 썼습니다만, 이번 일 정말 석연치 않습니다. 그래도 형님과 이만한 연분을 가진 놈이 그런 큰일을 모르는 체 가만 있는 것이 형님에 대해서도 사회에 대해서도 도리가 아니라 생각되어 굳이 썼습니다. 여러 해 공개적인 글을 써 온 중에 가장 뒷골 당기는 글이 되었지만. (☞관련 기사 : "형님, 절대 속지 마세요!")

그 편지에서 형님의 결정을 최대한 납득하려 애쓰며 형님의 미덕으로 현명함과 겸손함을 꼽았습니다. 어제 형님 모습에서도 그 두 가지 미덕은 대충 그대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민망한 구석이 많았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요. 형님 식의 현명과 형님 식의 겸손이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답변 중 여러 차례 강조하시더군요. 어렸을 때부터 바르게 살려고 늘 노력해 왔다고. 그러니 수준 이하의 도덕성 문제로 나를 의심하지 말아 달라고. 그런데 형님, "바르게" 산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나쁜 짓 않고 산다는, 주어진 규범을 잘 지킨다는, 소극적인 의로움을 말씀하시는 거죠? 옳고 그름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의로움을 밝히기 위해 스스로 고통을 찾아 겪기보다는 무난한 선택이 가능한 방향만을 바라보며 형님은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바로 형님의 현명함이요, 겸손함입니다. 내 신수 불편할 일을 피할 줄 아는 것이 현명함이요, 내 분수 넘어서서 세상을 어찌하려 들지 않는 것이 겸손함입니다. 적극적인 역할이 필요 없는 자리에서는 정말 좋은 미덕입니다. 그러나 어지러운 상황에서 길을 찾아내는 창조적 역할이 필요한 자리에는…. 조조를 놓고 "치세의 능신, 난세의 간웅"이란 말이 회자되거니와, 형님껜 "치세의 능신, 난세의 등신"이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 정운찬 총리 후보자. ⓒ프레시안
너무 심한 말씀 같습니까? 그러면 청문회 녹화를 한 번 더 돌려보세요.

청문회에서 누구를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셨습니까? 국회의원들을 생각하고 계셨죠? 저는 어제 형님이 국민을 상대로 얘기하는 모습을 보지 못했습니다. 제기되는 의혹을 회피하기에 바빴지, 국민들에게 가치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을 보지 못했습니다. 총리가 되는 데 국회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사실에 매달렸지, 총리 노릇을 잘하는 데 국민의 이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의식하지 못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후보자'의 입장을 편의적으로 갖다 대는 데서 역시 형님의 현명함과 겸손함을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문제에 대해 아직 총리가 아니기 때문에, 아직 업무 파악이 안됐기 때문에 소신 있는 답변을 사양하셨죠. 겸손하셨습니다. 한편 "교수 시절엔 학문적 기준으로만 발언했는데, 이제는 다른 기준도 생각해야 한다."며 극히 기본적인 일부 문제들에 대한 입장을 번복할 기미를 보이기도 하셨습니다. 현명하셨습니다.

그런 미덕들이 서울대처럼 안온한 동네에선 좋게 통했죠. 전번 편지에도 썼지만, 서울대 교수들이 형님 총장 시킨 게 엉뚱한 짓 할 염려가 없다고 믿어준 때문이라고 저는 봅니다. 서울대의 위상과 품격을 잘 지켜나가면서 기술적 개량 몇 가지 추진한 것으로 좋은 평을 받으실 수 있었죠. 그러나 대한민국을 운영한다는 건 서울대 운영과 비교도 할 수 없이 험하고 복잡한 일입니다.

용산 참사에 대한 답변 내용 생각해 보세요. 참사의 원인이 농성자가 던진 화염병에 있었다고요? 세밀한 화인에 대한 질문으로 이해하신 겁니까? 화인에 대한 경찰과 검찰의 '주장'도 저는 납득하기 어렵지만, 형님, 그 사태의 모든 원인이 그 불씨 하나에 있었다고 정말로 믿으시는 겁니까?

서울대 구성원들, 교수건 학생이건, 우리 사회에서 비교적 절박한 문제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예요. 무슨 불미한 일이 있더라도 대충 합리적인 대책에 총장의 권위만 얹으면 별 문제 없이 처리됩니다. 죽기 살기의 일이 아니니까요. 그런데 대한민국 사회는 그렇게 안온한 곳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의 용산 참사 처리 방침에 형님마저 동조하고 그 결과 경찰이 "우리 손으로 불만 지르지 않으면 돼(그리고 불을 지르더라도 확고한 증거만 잡히지 않으면 돼)." 하는 무책임한 자세로 또 무슨 일을 저지른다면, 형님, 그 책임 어떻게 질 거예요?

그리고 돈 문제. 형님, 어찌 그렇게까지 망가지셨습니까? 명분 없는 돈을 받았느냐 말았느냐, 세금을 제대로 냈느냐 안 냈느냐에 앞서, 형님, 무슨 돈을 그리 많이 씁니까? 카드 결제가 월 평균 1000만 원이 넘는다고요? 한국의 대학 교수 봉급 수준이 세계 최고인데, 그것으로도 모자라는 생활을 하신다고요? 이건 정말 인간적으로 이해가 안 갑니다. 학생 시절 우리 또래론 유난히 어려운 사정을 겪었던 형님이지만, 교수 봉급도 모자라 하는 지금의 형님은 그 시절의 형님과 같은 사람일 수 없습니다.

씀씀이가 그렇게 크다면 명분 없는 돈을 먹기도 쉽지요. 예스24 김 회장님은 저도 잘 아는 분이지만 한국 기업가로서는 이례적이라 할 만큼 공익 마인드가 강한 분이죠. 형님이 이 사회에 공헌할 역량을 가진 분이라고 그분이 여겼기에 사회를 위하는 마음에서 형님에게 돈 쓸 생각도 하셨겠죠. 그런데 형님이 검소한 생활 자세를 지키고 있다면 김 회장님의 제안이 있더라도 공익을 위해 직접 쓰는 길을 권해드릴 수 있었을 겁니다. 형님, 월 434만 원씩 받으면서 그 밥값을 하셨다고 정말 생각하세요?

그래요. 형님은 교수 봉급보다도 더 풍족한 생활을 바라거나 필요로 하는 분이 되셨군요. 그럴 수도 있지요. 그 사실 때문에 좋아하던 형님이 갑자기 싫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형님의 이번 결정에도 더 이해가 갑니다. 그러나 형님의 공인 자격에 대해서는 비관적인 생각이 드는군요.

어제 이정희 의원에게 혼나셨죠. 오늘도 혼나고 계시겠죠. 이 의원이 다른 야당 의원들에 비해 온건한 표현을 쓰지만, 그분의 질책을 정말 형님이 아프게 받아들이기 바랍니다. 서면으로 제출한 답변 내용을 모르고 있다는 형님 말씀에 그분이 공인 자격을 들먹이기도 했죠. 정말 기가 막히는 장면입니다. 형님 이름으로 제출한 답변 내용을 형님이 모른다면 어쩝니까? 청문회에서야 어차피 싫은 소리 들을 만큼 들은 뒤에 국회 동의야 어떻게든 따낼 거니까, 답변 준비할 시간 아껴서 더 중요한 일에 쓰셨습니까? 국회 답변이 국민의 신뢰를 얻을 기회란 걸 모르셨나요? 아니면 국민의 신뢰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나요?

바로 이정희 의원에게 공인의 자격과 자세를 배우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발언 중에는 민주노동당만을 위한 내용이 없었죠. 시종일관 한국 사회를 위한 한 마디 한 마디였고, 그 속에 민주노동당을 위한 크나큰 공헌이 저절로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분이 왜 그렇게 훌륭한 공인의 자세를 갖출 수 있는 걸까요? 다른 무엇보다, 그분에게는 분수를 넘는 풍족한 생활에 대한 욕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형님 이번 결정의 후과가 형님 일신상에 그치는 것이라면 언제고 형님 만날 때 따질 것을 기약하지, 이렇게 공개 편지를 쓰고 있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어제 본 형님 모습으로는 이 결정이 함축하는 의미를 형님 스스로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지 의심스러워서 여기 적습니다.

1987년 이후 한국 민주화의 한계가 '엘리트 연합'의 성격에 있다고 보는 관점을 요즘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습니다. 여러 성향의 엘리트 계층 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 조정을 통해 정책 노선이 결정되기 때문에 비 엘리트 계층이 소외되어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이 심화된다는 관점이죠. 1989년의 3당 합당이 이 연합의 드러난 사례고요.

저는 이번 형님의 입각이 이 엘리트 연합의 또 하나 고비가 될까봐 걱정입니다. 지금까지 이명박 정권은 극우, 수구, 꼴통의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 왔습니다. 한국 사회의 구조적 불안정성을 더욱 심화시키는 데 일로매진해 왔죠. 그래도 그 집단의 역량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회에 끼치는 해악에도 한계가 있으리라는 것이 그나마 마음에 위안이었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합리적 보수'를 대표해 온 분입니다. 형님의 행보가 당당하지 못할 때 합리적 보수가 집권 수구세력을 견제하는 힘이 줄어들고 길이 막힐 것을 저는 걱정합니다.

보름 전 편지에서 저는 형님이 입각하더라도 수구집단과 별개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기 바라는 뜻을 밝혔습니다. 아마 형님께도 그런 뜻이 있겠지요. 그러나 제가 석연할 수 없었던 것은 형님처럼 '현명'하고 '겸손'한 분이 수구집단과 떨어져 있으면서 견제하는 것은 가능하더라도, 거기 들러붙어 있으면서는 '합리적' 자세를 지키기 어려우리라는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의 원리에서 벗어나기 힘든 것이 합리주의자의 약점이니까요.

단기적, 미시적 관점에서는 형님의 입각이 이 사회에 좋은 효과도 많이 일으키고 형님도 보람을 느낄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난세의 등신"이란 험한 말씀을 썼습니다만, "치세의 등신, 난세의 걸신"이라 할 만한 수구집단 인물보다야 최소한 '차악'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장기적, 거시적 관점에서 일으키는 문제를 형님이 충분히 인식하지 못할 수 있음은 형님 성품으로 봐서도 짐작한 일이고 어제 청문회에서의 모습으로도 확인한 일입니다.

이미 호랑이 등에 올라타셨으니 어쩌겠습니까? 합리적 보수의 역할에 아직도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저로서는 형님이 가지고 있던 합리적 보수의 대표성을 지워버리는 데 애쓰는 것밖에 남은 일이 없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그 어색한 자리에서 도로 벗어나시기 바라는 것은 개인적 정분을 지우지 못해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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