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가슴을 무척이나 시리게 하던 기륭전자의 김소연 씨에게 물었습니다. "한가위도 다가오는데 올해에는 재정사업 하지 않나요?" 김소연 씨가 말꼬리를 흐리며 한마디 합니다. "다들 어렵다고 하니까 재정사업 엄두를 못 내는 거죠. 구조조정이다 뭐다 현장이 난리니까……." 2006년 한여름을 뜨겁게 달구었던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은 지난해 홈플러스가 홈에버를 인수하면서 오백일의 싸움이 끝났습니다. 그렇게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습니다. 목숨을 건 단식을 하고, 일터를 점거하고, 고공농성에 들어가야 반짝 사라진 기억을 깨우는 일들. 투쟁을 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한 노동자의 장례식장. "내가 장기투쟁사업장이고 농성을 하다보니까 나는 이해할 것 같아요. 외로워요. 이토록 고립되어 싸우는데……, 외로움이 죽음을 이겨내지 못했을 겁니다." 소주잔을 기울이던 투쟁조끼를 입은 늙은 노동자의 목소리는 한동안 귀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나이 마흔에 집과 일터를 떠나 길을 떠돌았습니다. 다섯 해 동안 길에서 만난 이들은 지지리도 못난 노동자들입니다. 그들의 목소리를 녹음기에 담고 글로 썼습니다. 한번 만나고 소식이 끊긴 이도 있고, 다섯 해 내내 가는 곳마다 지겹도록 만나던 이도 있습니다. 못난이들끼리 모여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었습니다. 기억하지 않아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해도 사라지지 않는, 사라질 수 없는 소중한 사람들, 이 못난이들을 미치도록 만나고 싶었습니다. 반갑게 전화를 받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전화번호를 찾을 수 없는 이도 있었습니다. 아예 먼 길을 떠나 만날 수 없는 이도 있었습니다. 하늘이 시퍼렇게 푸르고, 햇살은 따갑고 바람은 시원한 9월의 어느날. 다시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지난 3일 오후 3시, 자그마한 봉제공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창신동 골목 한 귀퉁이에서 드르륵드르륵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미싱 소리와 함께 노동자들의 수다가 시작되었습니다. 콜트악기의 방종운 씨, 로케트전기의 류제휘 씨, 기륭전자의 김소연 씨, 이랜드의 홍윤경 씨. 한번쯤은 들어봄직한 이름이죠. 일터에서 추방당한 해고자들입니다. 이들이 다닌 회사 이름에는 수식어처럼 장기투쟁사업장이라는 말이 쫓아다닙니다. 일터 밖에서 일을 하고 싶다고 외치고 있는 사람들. 오늘 그들의 수다에서 대한민국의 어둠과 함께 햇살을 찾아봅니다. |
"아줌마들은 밥심으로 투쟁하는데 단식이라니…"
방종운 : 김소연 분회장이 작년에 불법파견 철회 직접고용을 바라며 90일 넘게 단식투쟁을 했잖아요. 그 이후에 단식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어 참 기쁘더라고요.
김소연 : 아직도 단식투쟁하는 사업장 있어요. 회사 쪽에서도 노동자들이 단식 투쟁한다면 기륭처럼 언제까지 계속할 줄 모른다, 겁이 나서 얼른 해결해야 되겠다, 이런데요. 저도 단식은 반대에요. 근데 진짜 어쩔 수 없어 단식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 몸무게는 거의 단식하기 전 상태로 돌아왔어요. 몸무게가 빨리 늘어나면 안 되는데.
단식 뒤로 아무래도 뇌에 영양 공급이 안 되다보니 집중하거나 생각하는데 심각하다고 느껴요. 기억력이 엄청 나빠졌어요. 돌아서면 잊어버리고 심각해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저도 몰랐는데 공대위 동지 한 명이 엄청 걱정하더라고요. 회의하는데 분명 지금 얘기했는데 그 다음 딴 이야기하고 그랬대요. 오히려 복식하면서가 많이 힘들었어요. 조합원들 몸 상태들이 전부다 안 좋고 후유증이 남아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아요.
홍윤경 : 500일 투쟁했는데 단식 안하는 사업장은 이랜드 밖에 없을 거예요. 우리 (홈에버)아줌마들은 '밥심'으로 투쟁하는데 왜 단식하냐, 그래요. 본인이 굶는 것도 싫어하지만 남이 굶는 것도 못 보는 거예요. 사실 저희도 작년 여름에 단식투쟁하자고 결정까지 했어요. 기륭 89일 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도저히 못한다, 전부다 혀를 내둘렸어요. 그래가지고 통과된 단식 안건이 폐기됐어요.
류제휘 : 지난 3월에 50일 넘게 철탑 농성 했잖아요. 대개 고립감이 심해요. 공중에 매달려 그 좁은 공간에서 여러 가지를 해결해야 하니까. '고공 농성'하니까 관심이 뭐냐면,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올라 갔냐, 생리 현상은 어떻게 해결 했냐, 밤낮으로 출퇴근하듯 올라갔다 내려왔다 한 거 아니냐. 지난 8월 말 농성한 지 2년 되니까 기자 분들이 물어보더라고요. 해결 안됐는데 철탑에서 왜 내려왔냐고.
김소연 : 어휴, 해결 안됐는데 내려올 수밖에 없는 심정은 오죽하겠냐고. 자기들이 올라가 보라고 하죠.
▲ 왼쪽부터 기륭전자 김소연 씨, 이랜드의 홍윤경 씨, 콜트악기의 방종운 씨, 로케트전기의 류제휘 씨.ⓒ프레시안 |
류제휘 : 철탑 농성할 때 화물노동자 박종태 동지가 돌아가셨잖아요. 철탑 아래에 있는 동지들이 많이 걱정했어요. 회사와 교섭은 답보상태로 고공농성이 50일 넘게 장기화 되니까, 박종태 열사와 같은 일이 생길까 봐요. 위에 있으면서 이번에 어떻게든 결판을 보겠다고 단식까지 하려고 했는데 동지들의 만류가 있어서 내려왔어요. 고공이든 단식이든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요.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하지. 그렇게 해야지 관심도 가져주니까.
김소연 : 저희도 구로역에서 고공농성 했잖아요. 본래 길게 농성하려고 올라간 게 아니었어요. 농성했던 동지가 머리가 길었어요. 굉장히 예민한 친군데 머리에 이가 생겼잖아요. 정말 그 좁은 곳에서 여러 가지를 해야 되기 때문에 농성하는 내내 짐승 같은 느낌이 들었대요.
방종운 : 여러분들 오랫동안 농성하면서도 밝게 웃는 모습 보니까 참 좋네요.
홍윤경 : 가슴 속은 답답해도 우리는 투쟁하는 내내 즐겁게 했는데요. 농성장에 있으면 즐거워요. 참 희한하게.
김소연 : 집에 있으면 더 우울해지지. 마음속이야 문드러지지만 농성장에 와서 함께 만나면 잊고 싸우거든요.
"법치? 기업은 법을 어겨 법을 깨뜨린다"
류제휘 : 저희는 오늘이 농성한지 만 2년하고 3일 째 되는 날이에요. 7월 말에 부당해고 행정소송 2차까지 했는데 패소해서 대법에 항소한 상태에요. 왜 고공농성을 했냐면, 회사가 정리해고하면서 신규채용이 있으면 해고자를 먼저 고용하겠다고 합의를 해놓고, 이번에 해고자는 나 몰라라 하고 신규채용 공고를 낸 거예요. 정리해고자 선정도 문제가 많잖아요. 근로조건이 나빠지는 것을 알리는 선전물을 돌린 사람들을 해고한 거잖아요.
시민들 만나 보면 선전지 배포했다고 해고한 걸 사회통념상 이해가 안 된다고 해요. 어떻게 해고가 되냐, 근로조건 저하의 부분을 이야기 한 것이 어떻게 해고사유로 이야기 되냐, 사회 통념상 보면 이런데 법은 안 그러더라고요. 원체 기업하기 좋은 분위기를 만든 명박이가 들어서고 나서는 더더구나. 시민들이 사회통념상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법은 회사 측에서 작성한 해고 명분을 다 인정하더라고요. 법과 기업의 명분이 시민의 일반적 상식을 짓밟은 거죠.
방종운 : 그러니까 한국 법이 '개법'이지. (웃음) 전에는 악법은 어겨서 깨뜨리자, 이런 노동가요도 있었는데, 이제는 악법을 어겨서 깨뜨리는 분위기가 없어졌어. 그만큼 기업은 노동자를 법의 테두리 안으로 집어넣어서 올가미를 채우려고 했고 노동자는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던 거야. 1970년 전태일 열사가 있었던 시절보다 법이 노동자를 더 자유롭지 못하게 조이는 쪽으로 간다는 거죠.
김소연 : 요즘은 기업주들이 법을 어겨서 깨뜨리려고 하잖아요. 불법파견을 합법화 하겠다고 난리잖아요. 노동운동도 경험이 많이 쌓였잖아요. 그런데 나의 경험이 다야. 어떤 싸움을 하려고 하면 자신의 경험의 잣대로 그것을 재단해요. 싸우기도 전에 이 싸움은 이렇게 될 것이고 저렇게 될 것이고. 이런 식으로 투쟁사업장에서 올라온 의견을 거세해요. 우리는 못했는데 너희들이라도 해 볼 수 있도록 힘을 모아보자, 이런 식으로 해야 되는데.
물론 알아요. 싸움이 안 되게 하려고 하는 거 아니라는 거. 그런데 자신의 경험의 판단에만 의존하다보니 새롭게 올라오는 흐름들이 거세당하고 있어요. 비정규직투쟁은 새로운 투쟁이잖아요. 현재의 법을 넘어서는 투쟁이고. 많은 간부들은 자신의 경험에 익숙해서 새로운 투쟁을 해가는 게 상당히 어렵죠.
류제휘 : 요즘 투쟁사업장에 접근금지 가처분신청이나 업무방해 이러며 가압류나 벌금을 때리잖아요. 이렇게 돈으로 해고싸움을 움츠려들게 하고 있어요. 이놈의 세상이 자본주의 세상이기는 하지만 해고자들 생계비도 없는 상황인데 돈으로 공격을 하다니. 법과 제도를 들이밀며. 어디 우리가 제대로 해보고 엮인 것도 아니다. 사진채증으로 드라마 엮듯이 해가지고 우리가 업무방해를 한 것처럼 만들어서 벌금을 부과하니. 해보기나 하고 그랬으면 억울하지도 않을 텐데. 우리가 생계가 어렵다는 걸 알고 그걸 이용해 기업들이 공격하고 법이 인정해주는 거죠.
"법의 테두리, 노동자의 두려움이 커지다"
김소연 : 기륭 같은 경우에 많은 분들이 우려했던 건, 이길 가능성 있냐? 노골적으로 우리 앞에서 이야기 하진 못했는데, 그렇게 묻는 이유가 법에서 졌으니까, 그런 거죠. 나중에 투쟁하다가 최후의 보루가 법이거든요. 기륭 같은 경우에는 법에 기대하는 것을 투쟁 초반에 깨뜨렸어요. 우리에겐 중요하지 않았어요.
비정규직문제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고, 보호될 수도 없다, 그래서 법적 싸움을 열심히 안 했어요. 현실적으로 싸워야 할 것을 찾아 싸웠어요. 후회도 좀 했지. 좀 더 법정 싸움을 할 걸. 어떻든 법적 테두리 안, 이안에서 머물러요. 이 테두리를 넘어서는 것에 대해서 다들 두려움들이 많이 생긴 거 같아요.
방종운 : 콜트악기는 1000일 바라보면서 농성하고 있어요. 콜트악기도 행정소송에서 1심에서는 졌어요. 지난 7월에 2심 판결이 있었는데 뒤집었어요. 회사가 대법에 항고를 한 상태고. 나 같은 경우는 오늘 폐업에 따른 부당해고 2심 선고가 있었어요. 판사 주문사항이 원직복직 시키고, 그간 임금지급해라, 이런 내용이에요. (모두들 박수)
예술인 노동자들이 저희들과 함께 해줘서 농성하는데 가장 큰 힘을 받고 있습니다. 8월 29일, 30일 '썸머 페스티발'이라고 해서 언더가수 30개 팀이 오후 4시부터 새벽 6시까지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회사에서 용역 70명과 명박산성처럼 컨테이너 갖다가 정문에다 세우고 그래서 또 한바탕 붙고 그랬습니다. 예상외로 젊은 층들이 장소를 급작스럽게 변경하고 했는데도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짠돌이' 사장이 의외로 용역을 70명 썼다는 건 우리 입장에서는 보통일이 아니거든요. 이젠 미쳐가는 구나. 가만 생각해보니 그럴 만도 하겠다. 2년 가면 농성을 끝내지 않을까, 노동자들이 다 손들고 떨어져 나갈 줄 알았는데 2년 가고 3년차 들어가니까 미치는 거죠. 인도네시아 공장에서 물건 싸게 만들어서 팔아먹었는데 그것도 한계성이 오는 것이고, 공장을 돌려야 되는데 다시 돌릴 명분은 없고. 법으로 이겨서 법으로 끝내는 것도 안 되고. 사장 입장에서는 뭘 할 수 있는 조건이 없다보니까 이런 강수를 두는 것 아니냐. 회사가 저렇게 미쳐 가면 미쳐갈수록 우리가 일터로 돌아갈 시기가 다가오는 거다, 그랬죠.
"홈에버 비정규직 투쟁으로 해고된 이랜드 출신 6명"
홍윤경 : 이랜드는 2006년에 단체협약을 회사가 일방적으로 해지했어요. 한 달 파업하고 대부분 현장복귀하고, 소수만 파업하고 있다가 2006년 말에 까르푸 노조와 통합을 해서, 이랜드 일반노조가 되었어요. 2007년에 저희가 예상했던 대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져서 통합된 이랜드일반노조가 뉴코아노조와 같이 작년 11월까지 510일 파업을 했었죠. 이랜드 투쟁에 대해서는 많이 아실 테고, 어째든 뉴코아는 2008년 8월에 먼저 타결했어요. 이랜드가 도저히 홈에버를 가지고 있을 수 없는 정도의 위기 상황이었기 때문에 홈에버를 홈플러스에 팔아넘기게 한 것이 이 싸움의 성과죠. 홈에버에서 완전히 경영권을 홈플러스에 가져간 지난해 10월부터 본격교섭을 해서 한 달 만에 타결했죠.
물론 비정규직문제의 핵심은 홈에버 노동자였기 때문에 우리가 파업투쟁을 했던 핵심적인 문제는 다 풀렸던 거죠. 소수 간부를 제외한 비정규직이 정규직화 되어 전원이 복귀를 해가지고 일을 하고 있고요. 타결을 하면서 위원장 등 몇 명 간부들이 희생을 했죠. 저는 원래 이랜드 소속이었기 때문에 홈플러스와 합의에는 애초부터 들어갈 수도 들어가지도 않았고요. 홈에버 비정규직 투쟁으로 이랜드 출신 해고자가 6명이에요.
올 1월에 해고자 복직투쟁위원회를 만들어 한 달에 한번 집회와 일주일에 한번 선전전을 하고 있고요. 이 6명이 복직투쟁을 하고 있는데 저하고 이남신 위원장 직무대행은 집행유예가 있기 때문에 복직이 어려울 수도 있어요. 나머지 4명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야죠. 저하고 이남신 직무대행은 법적 투쟁과 관련 없이 나쁜 기업이 사라지든지 아니면 노조가 진정으로 정상화 되서 올바른 방향으로 갈 수 있을 때까지 투쟁을 계속할 겁니다.
▲ 510일의 파업 끝에 끝난 이랜드 비정규직의 모습. ⓒ프레시안 |
김소연 : 기륭은 1000일 전에 끝내자, 현장으로 돌아가자, 이런 목표를 갖고 작년에 힘 있게 투쟁을 했어요. 2005년 8월부터 공권력 들어오고, 현장에서 쫓겨나 천막농성하고 나서부터 지금까지 쭉 싸워 온 거지요. 작년에 서울시청 고공농성, 구로역, 단식 쭉 진행을 했어요. 그 과정에서 타결할 수 있는 몇 차례 기회가 있었는데 회사가 매번 그걸 뒤집었어요. 단식 말미에 교섭이 열렸지만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안이었어요. 최소한의 원칙은 지켜야 하는데 최소한의 원칙도 지켜지지 못해요. 우리가 이제껏 죽도록 싸워왔던 거를 훼손시킬 수 없다, 두 손 털고 끝낼 수는 있어도 그 안을 수용할 수가 없다, 이래서 결렬이 됐죠.
그 내용은 기륭전자가 직접 책임질 수는 없다, 제 3자를 내세워서 2천만 원짜리 회사를 만들면 열 명을 고용시켜서 기륭의 하청이 그 회사에 하청을 줄 수 있도록 하겠다, 1년 이상 되었을 때는 경영평가를 해서 성과가 좋으면 물량을 더 줄 수 있도록 검토해보겠다, 이런 정도의 안이었어요.
이건 죽었다 깨도 받을 수 없는 안 이었죠. 그 뒤에 다시 한 번 교섭이 열렸어요. 그때 회사가 이야기 했던 게 고용형태에 관련해서는 노동조합의 의견을, 고용인원과 관련해서는 회사의견을 전제로 해서 고민해 달라고 했어요. 마무리해보자, 이래서 다시 교섭을 했는데 기륭이 고용형태도 고집하면서 또 교섭안을 뒤집어서 결렬됐어요.
얼마 전에 수련회를 갖다왔어요. 앞으로 어떻게, 어떤 방향으로 할 것인가. 솔직히 조합원들이 공황 상태죠. 작년에 열심히 투쟁했는데도 해결이 안 된 상태이기 때문에. 그 이유가 뭘까, 앞으로는 무엇을 가지고 싸워야 될까 이런 것에 대한 논의가 있었어요.
불법파견 직접고용 정규직화를 요구했던 것이 기륭 노동자가 처음이었어요. 그전에는 불법파견이 뭔지도 잘 몰랐잖아요. 우리는 현장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투쟁하는 다른 사업장들이 직접고용을 요구하면서 싸우게 되는 그런 과정이 있었고, 실제로 성과를 냈고, 물론 한계는 있긴 하지만 간접고용형태로 해결된 것이 아니고 직접고용 형태로 해결되는 과정들이 있었죠.
최근에 강남성모병원의 경우 사회봉사라든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합의문에 들어가 있지만 그래도 파견노동자가 직접고용으로 간 거거든요. 신용보증기금도 그렇고. 그런 면에서 기륭 투쟁이 성과가 아니냐. 그런데 왜 우리는 해결 안 됐냐. 이명박 정권의 노동유연화 정책이 최소한 법 테두리 내에서만 해결하겠다는 입장, 죽었다 깨어도 법적 테두리를 넘어서지 않겠다는 입장이지 않느냐.
기업과 정부는 힘을 합쳐 총공세가 있었는데 우리는 총공세를 펼치지 못한 거 같다. 금속노조나 민주노총이 전략적으로 이 문제를 전체 노동계의 문제니 반드시 해결해야 된다는 관점으로 같이 총력투쟁을 하고 투쟁계획도 세우고 이러지를 못했어요. 싸우니까 지원하고 이런 거는 했었는데, 같이 주체가 되어서 만들어내지는 못했던, 그런 아쉬운 한계들이 있었죠.
"기업하기 좋은 나라, 노조 깨기 좋은 나라"
홍윤경 : 홈에버 월드컵점 점거하고 있을 당시에, '리틀 박성수'라고 불리는 뉴코아 사장이 관리자들 모아놓고, 회사는 1년을 준비 한다, (파업에 맞서) 1년을 버틸 수 있다, 노조를 이번에 완전히 박살을 내야한다,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회사 관리자들에게 위기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 하는 그야말로 선동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근데 1년이 지나고 나서 느낀 것은 정말 1년을 준비했구나, 노조를 깨기 위해서. 그걸 보면서 정말 우리나라는 기업을 하기 좋은 나라일 뿐 아니라 기업이 노조를 깨기도 좋은 나라구나 생각했어요. 기업가 입장에서는 장기투쟁을 허용, 허용이라 하기는 뭐하지만, 해결하려는 적극적 노력을 하지 않더라도 자기들에게 해가 되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유통업계는 직영 직원이 10%도 안 되기 때문에 전 조합원이 파업을 한다고 해도 얼마든지 매장을 운영할 수 있는, 법에 대체근무나 이런 것들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물결 속에서 더더욱 투쟁사업장이 고립될 수밖에 없지 않느냐, 생각이 들고요.
민주노총과 같은 조직적 힘이 생겼지만, 큰 힘이 생긴 만큼 조직을 유지해야 하는 쪽으로 저는 많이 간다고 생각해요. 그니까 이전에 조직이고 뭐고 없었을 때는, 진짜 한 사업장 투쟁한다고 그러면은 전부다 몰려갔잖아요. 근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 나름대로 조직적인 체계를 기본적으로 유지해야 해요.
그때는 노조도 노동자도 잃을 게 없었잖아요. 지금은 이미 갖고 있는 게 많은 거죠, 노조들도. 누구를 탓하기 보다는 그런 구조가 되어있고, 말이 산별노조라고 하지만 대기업 노조 위주잖아요. 여러 노조 함께 연대해서 있는 것 이상의 힘을 아직까지는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김소연 : 기업과 권력은 노동자를 항상 분열시키는데 우리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어요. 지금도 생각나는데 내가 갑을전자 다닐 때 청소나 경비 다 정규직 직원이었어요. 어느 날부터 청소 식당 경비를 외주화 시켰잖아요. 우리 조합원이 아니에요. 이 분들이 총무과 소속이어서 조합가입 못하게 하고 그랬었어요. 조합원 아닌 사람들도 흡수해야 되는데 우리 조합원 아니니까 안 한 거지.
저는 첫출발이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쭉 밀려오는 과정. 그러다 외환위기 시절 확 밀리고. 그래서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는데 대응을 못했어요. 상대적으로 노동조합 조직이 안정되니까 그 조직을 지키려고 하는 게 커졌어요. 예를 들면 위원장 하려면 조합원 지지를 받아야 하잖아요. 민주노총도 그렇고 단위노조도 그렇고 조합원의 요구에 근거해서 한다, 이런 말 하면서 우리가 해야 될 역할들, 의식적으로 해야 될 역할들, 바꿔내야 할 역할들을 충분히 하지 못해요. 조합원들 의견수렴 한다 해서 나머지 문제들은 유야무야 돼버리는 거죠. 그걸 넘어서지 않으면 사실은 노동운동의 다음 미래도 없을 거 같아요.
방종운 : 조합원들에게 보여주는 모습이, 아 쟤는 회사와 타협이 없는 사람이다, 노동자의 권익을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다, 그러면 위원장 선거운동 하지 않아도 당선이 됐어요. 지금은 성과급을 얼마나 더 탈 수 있느냐, 이런 것들이 당선의 조건으로 되어버리다 보니까, 참 어찌 이리 변했는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조합원들에 대한 교육부분을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뭐 이런 생각도 드는 거고. 저희들, 중소기업 같은 경우 교육이 있다 그러면은 하여튼 토요일 일요일 가리지 않고, 연속 잔업 특근하면서도 밤중에 기차타고 버스타고 걸어서라도 교육장 찾아가서 교육받고, 월요일 날 새벽에 출근하고 이랬는데……. 어느 샌가 교육도 유스호스텔 같은데서 하고, 그런 부분들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악조건 속에서 해왔던 것이, 지금은 더 편한데 잘 안 된다는 거지.
"전체 역량의 30%만 떼서 비정규직 문제에 전담한다면…"
홍윤경 : 아까 민주노총 이야기 나올 때 사실 저는 이렇다고 생각해요. 모순인데, 노동조합이라고 하면은 당연히 조합원 과반수의 뜻에 따라서 운영될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서 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이 비정규직 노조 배척하자고 결정하면은 그걸 따라가야 하느냐, 그런 모순이 있는 거죠.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죠. 현재 대의원 구조에서는 대공장 사업장이 주도할 수밖에 없는 의사 구조죠.
저는 이런 생각을 했어요. 최소한 50%는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데, 50%가 어려우면 한 30%라도, 인원이든 돈이든 간에 똑 떼서 비정규 미조직 투쟁사업장 일만 정말 독자적으로 전담해야한다고 생각을 해요. 이러지 않으면 현재의 구조가 바뀔 수 없다고 생각해요. 민주노총이고 나름대로 다들 열심히 하죠. 하지만 현재와 같이 지속되면 투쟁사업장이나 미조직 사업장 같은 데는 소외될 수밖에 없다고 저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 획기적인 변화를 지금은 준비해야 되고 실행해야 되지 않느냐, 생각이 드네요.
김소연 : 개별사업장 문제를 어떻게 묶을 것인가는 상급단체의 몫이라고 생각 되요. 하지만 투쟁 주체의 몫도 있어요. 장기투쟁사업장은 온갖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이제 이거다' 이야기 할 수 있어요. 개별 사업장마다 싸우기 보다는 여러 사업장이 어울려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내공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래서 하반기에는 적은 인원의 힘이지만 모아서 함께 할 수 있는 투쟁을 만들어봤으면 좋겠어요. 그 동안 쭉 있어오긴 했어요. 추석 전에 한 번 장기투쟁사업장의 고통의 목소리를 내봤으면 좋겠어요. 서울이 좋겠죠. 제일 여론 안 좋은 데가 서울이잖아요. 중앙에서 뭔가 변화가 없으면 어렵기도 하고요.
▲ 지난해 여름, 단식 중이던 김소연 분회장(왼쪽)의 모습. ⓒ프레시안 |
김소연 : 아니 고공농성 중에 애 낳은 게 기쁜 일이에요? (웃음)
류제휘 : 투쟁하면서 별로 즐거운 일이 없잖아요. 천막농성장이나 이런 것이 침침하고. 본래 즐거운 일이 아니라도 억지로 만들어서라도 기뻐해야죠.
김소연 : 농성하면서 정말 다양한 사람이 있구나, 그걸 알았어요. 현장 안에서 점거 농성하는데 자기 신발을 딴 사람이 신었다고 집에 가버린 조합이 있었어요. 다시 오긴 했지만, 정말 황당하더라고요. 이렇게 숱한 사람들을 만난 게 행복이죠.
같은 공장에서 일하지만 노동자끼리 서로 잘 몰라요. 300명 있는데, 입사가 짧고 부서가 다르면, 교류도 없어가지고 누군지 어떤 사람인지 서로 모른 체 일만 했죠. 오히려 조합 결성하고 농성하면서 알게 되었어요.
홍윤경 : 저는 지금 1학년 5학년 두 딸이 있어요. 제가 가장 치열하게 싸우고 구속됐을 때 여섯 살, 3학년이었어요. 엄마 손길이 한참 필요할 때 제가 구속된 거죠. 그때 3학년 딸아이가 엄마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렇게 편지를 썼어요. 나중에 물어봤어요. 너 어떤 마음으로 이런 편지를 썼니? 엄마, 편지는 원래 그렇게 쓰는 거야. (웃음) 아이들의 빈자리를 제가 채워주지 못해서 아이들과 많이 보내려고 노력을 하고 있어요. 아이들하고 보내는 게 더 어렵더라고요. 투쟁하는 것보다. 제가 하지 않았던 영역이기도 하고. (웃음)
수다는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그 이야기를 고스란히 담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방종운 씨는 딸의 엽서를 늘 몸에 간직하고 다닙니다. 꼬질꼬질 손때가 묻은 엽서를 보여주더니 겸연쩍은지 "자식 자랑하는 거 같아서" 하며 엽서를 숨깁니다. 김소연 씨는 유럽에 원정투쟁 갔을 때 지하철에서 역무원에 걸려 벌금을 낸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했으나 개인 프라이버시를 위해 여기에 옮기지는 않습니다. 지금껏 겪은 고통의 기억들과 앞으로도 계속될 험난한 길이 이들 앞에 놓여 있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가을 햇살처럼 맑은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올 한가위에는 어머니 품 같은 보름달이 장기투쟁사업장 농성장에 기쁜 소식을 안겨주었으면 합니다. 정든 일터로 돌아갈 수 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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