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을 원한다면 그것은 대학이 아니라, 무덤이다." 이대근 <경향신문> 국제·정치 에디터가 한 칼럼에서 언급한 말이다. 최근 비판적 지식인에게 적대적인 대학의 분위기를 겨냥하기라도 하듯, 이 칼럼에서 그는 진중권을 둘러싼 현재의 상황들을 대학의 구조적 문제와 함께 풀어내면서 어떤 보이지 않는 불의를 폭로하고 있었다.
내가 지금 이것을 떠올리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그 칼럼의 제목이 함축하는 어떤 것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이야기'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되는 이야기들, 발랄한 미학자 진중권이 "우연"이라는 말로 가볍게 웃어넘기던 순간의 그 '무거움'을 환기시키기 위해서다.
이는 가볍지만 무겁고, 우연이면서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어쩌면 공론의 영역이 척박한 한국의 지식인들이 언제나 마주하는, 아니 앞으로도 마주해야 할 현실일 것이다. 나서서 발언하는 자는 항상 위험하다. 언젠가 진중권도 스스로 이런 말을 했다. 던져진 주사위의 확률을 논하기보단 직접 주사위를 던져야 한다고. 기능적 관료가 아닌 비판적 지식인이라면 말이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현실에서 발언하고 비판하기를 꺼리곤 한다. 훗날 자신의 발언에 대한 책임을 져야만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소극적 경향이 심화될수록 공론의 영역은 축소되고 자유 또한 억제되는 결과를 낳는다.
나름 대중적인 논객으로서 활약하던 그의 앞에 지금 서서히 드리우고 있는 권력의 그림자는 무엇을 의미할까? 시장 논리로 봤을 때 그는 대학에서 나름 잘 팔리는 축에 속한다. 이런 그도 이럴진대 존재감 없는 수많은 시간강사들에게 자유란 존재할까? 이들은 공기보다 가볍다. 게다가 불확실한 취업 현실에 발목이 잡힌 채 유령처럼 떠도는 미래의 공기, 대학생들은 어떤가. 이들 모두에게 대학은 마치 영화 <미스트>에서처럼 어둠과 안개에 휩싸인 채 당장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쳐야만 하는 밀실과 같은 곳은 아닐까? 학문다운 학문이 불가능한 곳에서 벙어리가 되어버린 슬픈 군상들의 이야기, 정말 눈물겹도록 사소한 이야기.
물론 이전 정부들에서부터 대학 내부의 구조적 문제를 포함한 사회·경제적 모순들이 끊임없이 불거져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럼 점에서 지금의 상황은 그 연장선인 셈인데, 문제는 이러한 모순이 점차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인문학의 위기는 오래 전부터 있었지만, 어느 정도는 자율성을 띠었던 인문·사회의 지식계까지 함께 위축되는 경향은 최근에 들어서 더 심해지고 있다. 이전 정부에게선 다소 조심스레 취급되던 권력이 노골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고, 언론을 포함한 시민사회까지 서서히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약자이자 개인으로서 지식인은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상황이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인은 특별한 이들만은 아니다. 교수, 학자만이 아니라 교양을 갖춘 시민이라면 누구나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어떤 이유로든 이들은 침묵하고 있거나, 언젠가는 침묵할 것이다. 이름 있는 비판적 지식인에게 권력과 유착된 교묘한 배제가 이루어지는 광경은 자신도 이 그물에 포획될 수 있다는 공포심을 가져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어느 집단이든 기술적 관료주의만이 팽배하고 내부의 비판적 인사들이나 불의에 항의하는 고발자들이 사라진다면, 미래에 자유로울 이 누구인가? 이런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사회적 발언은 곧 모험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특히 이런 분위기가 한국의 사회 풍토 상 집단 내에 남아있는 인간관계의 점성에 결합되었을 때, 그 결과는 더욱더 부정적이고 참혹할 수밖에 없다. 이번 진중권 사태처럼 대학 내에서 총장의 정치적 견해와의 대립이 있을 수도 있는 논객들은 그만큼 더 위축될 수밖에 없는 셈이다. 그렇지 않아도 끈덕진 가족주의로 얽혀있는 사회에서 그나마 지식인들의 정치적 참여나 발언들마저 독립적으로 행해질 수 없다면, 일반 공론의 영역에서 민주주의나 정치에 대한 건전한 논의는 점점 모습을 감추게 될 것이다. 온갖 흑색선전에 수난을 당하는 비판적 지식인들에 대한 심드렁한 반응만이 남을 뿐이다.
지식인들의 참여가 사라진 자리에서 권력은 똬리를 틀고 힘을 발휘하는 법이다. 일반시민들의 정치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넘쳐나게 된다. 대안을 조직할 힘도 함께 사라진다. 이들을 보호하지 않는다면, 거대한 신화적 투쟁만이 남을 것이다. '그 많아 보이던 대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라는 허무함만이 훗날 남아 있을 것이다. 지금도 광장에는 영웅적 구호인 '반MB'가 울려 퍼지고 있지만 미래를 구상하는 차분한 논의들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이 과잉된 열망은 또다시 출구를 틀어막고 현실 아닌 현실을 지탱하는 데에 일조한다. 절망적이게도 MB의 지지율은 40%대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다양한 의견들과 갈등들이 반영될 수 있는 가능성이 차단되면 발생하는 것이 소통의 왜곡 문제다. 최장집의 지적대로, 아래로부터의 다양한 참여보다는 대중의 형태로 집단을 동원하는 운동의 극단적인 진영논리만이 강화된다. 최근 그 영향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위에서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국가권력은 그 반작용으로 아래로부터 대중들을 획일적으로 동원하는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가상의 괴물과 싸우며 그를 닮아가는 것처럼 이는 현실이 아닌 현실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반지성주의적인 것들이다. 어쩌면 이 두 가지 모두가 지식인들을 위협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지식인으로서 진중권의 발언은 사회의 다양한 갈등들을 반영하는 소중한 역할을 해왔음이 확실하다. 자신의 학문 영역에서만이 아니다. 예를 들자면, 그는 대중적 논객으로서 시사와 문화 비평을 훌륭히 수행하면서, 거대한 전선들 사이에 포획되지 않은 선택지들을 끊임없이 환기시켰다. 흔히 진보 진영으로 분류되는 민주노동당 내 주사파, 그리고 노무현 지지자들과의 불화와 논쟁들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다. 당시 그는 자의적으로 설정된 거대한 갈등축인 '친미 대 반미' 또는 '민주 대 반민주'의 프레임에 의해 사라졌을지 모를 다양한 갈등의 지점들을 포착해냈다.
또한 과거 황우석 사건에서 정부와 국민이 일삼던 <PD수첩>에 탄압에 반대하기도 했으며, '디워' 사건에서 심형래의 영화를 둘러싸고 벌어진 비평가들에 대한 대중의 반지성주의에 분노하기도 했다. 이는 균질적일 수 없는 집단에게 강요하는, 애국주의 및 '민족 대 반민족'의 허구적 프레임을 폭로하는 사건이었다. 언제나 그는 자칫하면 논객의 생명이 걸릴 수 있는 규모가 큰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그리고 다소 거칠긴 했지만, 스스럼없이 글을 쓰고 발언했다. 이에 반해, 몇몇 보수 인터넷 매체와 대학에서 그의 학문적 역량에 대해 걸고넘어지는 최근의 방식들은 대부분 복고적으로 비칠 정도로 저급한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앞서도 지적한 바 있듯이 허구적 프레임을 설정하여 반대편에 분노를 투사하는 행위는 내부의 다양한 갈등들을 억압할 위험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실천적 보수성으로 귀결될지 모른다는 점에서 결코 생산적이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는 한 사회의 교양과 인문사회학의 발전에 기여한 한 지식인에게 지금 조금씩 드리우고 있는 희미한 권력의 그림자를 직시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대학이 자신의 의무와 학생들에 대한 책임을 방기하면서까지 권력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 것에 분노해야만 한다. 마땅한 분노를 하다가 징계를 당한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야말로 사회의 불화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자들과 공범이 되는 길일 것이다.
P.S. 여담이지만, 대학생인 나는 사실 그를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하지만 지금도 어느 책에서 그가 기입했던, "정신, 유희, 구원"이라는 강렬한 영혼의 문구를 기억한다. 그는 글쓰기라는 여인을 통해 영혼의 구원을 추구한다. 그리고 그의 이어지는 말에서처럼, 나에게도 "주판알 튕기지 않고 내게 궁극적 신뢰를 보내는 대책 없는 여인이 있다."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갱신해나가는 그의 즐거운 미학적 작업.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동일성의 폭력을 깨부수는 그의 날카로운 비판. 황혼이 다가오기 전에 바야흐로 이제 우리가 나서서 그의 풀무질을 도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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