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득이는 재치와 날카로운 분석이 어우러졌던 홍 박사의 대담 내용을 재구성했다.
▲ 홍기빈 박사. ⓒ프레시안 |
'줄빠따' 휘두르는 시장
여러분, 혹시 '줄빠따'라고 들어보셨어요? 아마 1980년대 이후에 태어난 분들은 줄빠따 못 맞아보셨을 텐데요, 간단합니다. 맨 위 상급자가 바로 아랫사람을 두 대 정도 치면 그 사람은 또 자기 아래 사람을 팹니다. 그러다보면 인간 피라미드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빠따'의 물결이 지나가는, 그야말로 '다단계 빠따'가 형성됩니다. 여러분, 돈은 위로 가고 '빠따'는 아래로 갑니다. (웃음)
유럽의 근대국가는 바로 이처럼 사회 전체를 줄빠따로 줄세우는 조직 원리로 형성됐습니다. '법 앞에 모든 사람이 줄서야 된다'는 거죠. 19세기 접어들면서는 이 줄빠따 논리가 시장으로 옮겨가기 시작합니다. 폴라니가 쓴 <거대한 전환>의 절반은 바로 이처럼 '국가 줄빠따'가 '시장 줄빠따'로 가는 상황을 정리해놨습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박정희-전두환 기간은 국가 줄빠따였죠. 1972년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박정희가 국가 줄빠따의 사회적 합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파도의 결이 바뀌었습니다. 신자유주의 질서가 들어오면서 줄빠다가 시장 중심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사회 전체가 헤쳐 모이면서 다시 줄서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필요없어. 돈 버는 게 장땡'이라는 합의가 사회적으로 이뤄졌습니다. 이 합의 위에서 세워진 이명박 정권은 1970년대와 비유하자면 유신과 같습니다.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가 아주 상징적인 사건인데요. 1972년 유신이 민주주의에 대한 폭거였다면 용산 참사, 쌍용차 사태는 시장이 본격적으로 사회를 줄빠따를 치기 시작했다는 신호입니다.
누구를 위해 경찰은 줄빠따를 휘두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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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쌍용차 사태가 끝나고 경찰이 노동조합에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냈죠. 이거 보고서 딱 든 생각이 '경찰이 돈 되는 모델을 찾았구나'입니다. 앞으로 모든 범죄자를 잡아들일 때마다 '너 때문에 피곤해졌으니 그거 견적 뽑겠다'는 거니까요.
심각한 문제입니다. 경찰이라는 조직이 공적기구인지 민간의 행위자인지 스스로 헷갈려하고 있잖아요. 소방서가 불 꺼준 다음에 '수도값 내주세요' 이러면 얼마나 '골 때리는' 상황이 되겠어요. 아시다시피 민영 조직이던 19세기 미국의 소방서가 그랬죠.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갱 오브 뉴욕>에 보면 이 에피소드가 나옵니다.
옛날에는 경찰이 말 그대로 줄빠따를 때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방식이 바뀌었어요. 손해배상소송하는 식으로 줄빠따의 개념이 변한 겁니다. 명예훼손 소송도 마찬가지입니다. 촛불 집회 끝나고 농림수산식품부에서 명예훼손 소송 마구 걸었죠. 공적영역의 기구가 사적 영역에 나와서 싸움꾼 행세를 하려는 겁니다. 저는 이를 시장의 폭력, 곧 '시장이 휘두르는 줄빠따' 정도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자유주의의 거짓말
이처럼 폭력을 휘두르는 자유주의가 만든 대표적인 근대사상의 허구가 있습니다. 개인이 자유로워지면 부유해진다는 겁니다. 거짓말입니다. 농경 사회에서는 가능하지만 산업 사회에서는 불가능합니다.
농경제는 내가 내 땅에서 열심히 일하면 되는 시대였죠. 그러나 산업사회는 사회 전체가 풍요로워지고, 그 부를 개인이 향유하면서 부유해지는 구조입니다. 개인이 혼자 열심히 한다고 부유해지지 않습니다. 누가 얼마만큼 기여했느냐를 아무리 회귀분석해도 알 수 없는 게 산업 사회입니다. 사회 전체가 다 같이 뭔가를 해야 합니다.
문제는 자유주의 사상이 농경제 모델을 그대로 가져와 현대 산업경제에 적용했다는 겁니다. 이 논리가 곧 '경쟁력'이라는 단어입니다. 신자유주의식으로 경쟁시켜서 개개인이 부유해지는 모델을 따르면 사회 전체는 거지가 됩니다.
빈곤의 문제는 어떨 거 같습니까?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속담은 농경제 시대에 해당합니다. 산업경제에서 빈곤의 문제는 발생한 부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철저히 사회적이라는 말이죠.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경제적 고통의 본질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영양실조가 아닙니다. 불안이에요. 두려운 대상이 없이 그저 불안하기만 한 겁니다. 사람들이 흔히들 장기간 노동, 영양 실조 이런 얘기들을 하는데요, 정신의 파괴 문제를 거론해야 합니다. 빈곤의 객관적 측면뿐만 아니라 주관적 면을 고민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교회의 자본주의
대담 후반, 김민웅 교수는 참석자들에게 "한국 교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했다. 교회가 권력이 됐다는 답변들이 오간 후 마이크는 홍 박사에게로 넘어갔다. 그는 교회가 자기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지 못하다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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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제가 들은 얘기가 교회융자입니다. 교회를 새로 지어서 예상되는 수익을 가지고 목사나 장로가 은행에서 융자를 받습니다. 벤처기업 창업과 같죠.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반과 한국 교회의 정신적 기반이 완벽히 일치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무대뽀 정신'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맨땅에 헤딩해서 물질적 풍요를 이루고야 만다는 거죠.
1960년대 이후 나타난 이른바 성장 신화입니다. 교회로 놓고 보면 '맨손으로 개척교회를 열심히 했더니 현금이 들어오고 기타 등등 해서 성공하더라'는 겁니다. 인류학적 연구 대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교회는 정말 좋은 장사입니다. 일단 원자재비가 거의 안 듭니다. 자산이라는 건 설교자와 목사 뿐입니다. (목사님이기도 하신 사회자 선생님께 죄송합니다.) 그리고 들어온 돈은 100% 캐시(현금)입니다. 이 정도로 환상적인 캐시 플로를 가진 비즈니스 흔치 않습니다. 한국 자본주의의 정신적 기초가 유교니 어쩌니 말들 많은데, 한국 개신교가 바로 신화입니다.
제가 교회에 바라는 건 다른 것 아닙니다. 좀 본연의 임무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신자유주의가 일관되게 쏟아내는 메시지가 '호모 이코노미쿠스'인데요, 이에 대항해야 할 균형을 잡아야 할 곳이 인문학과 종교입니다. 비단 교회뿐만 아니라 절이든 성당이든 사회가 가진 질문들, 예를 들면 '영혼의 문제'에 대답해주는 데 집중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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