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전 세계 각국의 정부, 기업, 시민사회 등이 기후 변화를 둘러싼 대응 방안을 마련하는데 고심하는 동안, 유독 조용한 곳이 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정부는 '녹색 성장'을 얘기하고, 기업은 '녹색 경영'을 얘기하지만, 절박감을 느끼기는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조합이 기후 변화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면 다소 생뚱맞다.
그러나 기후 변화 문제를 놓고 조금만 고민을 해보면, 노동조합이야말로 지금 발 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다. 기후 변화를 막고자 2013년부터 강도 높은 온실가스 규제가 이뤄진다면 한국의 여러 산업은 큰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다.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화석연료에 의존하는 발전, 석유화학, 철강, 시멘트 산업 등은 직격탄을 맞을 가능성이 크다.
이렇게 상황이 전개되면, 기업은 갑작스런 비용 상승을 노동자에게 전가할 것이다. 상황이 더 심각하면, 대형 화력 발전 산업과 같은 몇몇 산업은 강도 높은 구조 조정 요구를 받을 수도 있다. 당연히 해당 산업의 노동자는 실업자 신세로 전락할 것이다. 먼 미래의 얘기가 아니다. 당장 수년 뒤에 이런 일이 현실이 될 수 있다.
아나벨라 로젬버그 국제노총(ITUC) 정책국장이 "노동조합이 나서서 '정의로운 전환'을 준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이런 사정 때문이다. '정의로운 전환(Just Transition)'은 환경문제가 초래할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변화에 맞서 대응 방안을 마련할 때, 노동자와 같은 약자의 입장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환경오염 때문에 공장을 폐쇄해야 할 상황이라면, 그 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또 그 공장에 의존하던 지역 경제는 어떻게 할 것인가? 1980~90년대 미국, 캐나다 등의 노동조합은 바로 이런 문제의 해답을 찾는 과정에서 정의로운 전환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할 기후 변화가 논의될 때마다 정의로운 전환이 정답처럼 얘기되는 것도 이런 맥락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이 정의로운 전환이 본격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지난 27일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소장 박진희)가 창립한 데 이어서, 잇따라 열린 토론회에서 민주노총, 한국노총 등의 관계자들이 뜨거운 관심을 보였기 때문이다. 늦었지만 한국의 노동조합도 정의로운 전환의 중요성을 파악한 것.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의 초청으로 한국을 찾은 로젬버그 국장은 전 세계 노동조합을 상대로 '정의로운 전환'의 중요성을 교육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지난 27일 그를 만나 '정의로운 전환'을 둘러싼 여러 가지 쟁점을 짚었다. 그는 "정의로운 전환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딱 하나의 길"이라고 단언했다.
▲ 아나벨라 로젬버그 국제노총(ITUC) 정책국장. ⓒ프레시안 |
다음은 1시간 30분에 걸친 로젬버그 국장과의 인터뷰 전문이다. 환경운동가 조보영 씨가 통역을 맡았다.
"기후 변화 대응, 노동조합의 역할이 중요하다"
▲ 내 일터에서, 내 가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함께 해야 한다. ⓒ프레시안 |
로젬버그 : 내 생각에는 '정의로운 전환'뿐만 아니라 기후 변화 자체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낯선 문제다. '정의로운 전환'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우선, 문제를 알려야 한다. 기후 변화가 자신의 직장을, 사회를, 환경을 바꾸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특히 농업, 관광 등의 산업 종사자는 더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이 두 번째다. 내 일터에서, 내 가정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바로 기후 변화에 대한 대응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라 다 같이 함께 해야 한다. 이런 것이 '정의로운 전환'이다.
프레시안 : '기후 변화가 나와 공동체의 삶에 큰 변화를 줄 수 있으니 함께 대응하자', 이런 얘기를 누구나 원론적으로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인 상황에서는 다를 것 같다. 예를 들면, 한국은 에너지를 많이 소비하는 산업이 경제의 핵심 축을 차지하고 있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자, 그런 산업을 구조 조정하려면 특정는 노동자의 실업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로젬버그 : 그게 '정의로운 전환'의 핵심 문제다. 기후 변화에 대응하고자 한국뿐만 아니라 많은 산업국가가 에너지 시스템을 전환해야 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일자리를 잃는 노동자가 생길 수 있다. 자, 그럼 우리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먼저 이런 시스템을 바꾸는 게 하루아침에 가능한 일이 아니고, 시간이 많이 필요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선 기후 변화가 구체적으로 어떤 산업에 어떤 영향을 줄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사실 많은 기업은 기후 변화가 자기 산업에 미칠 영향을 먼저 고민하고 조사하는 일에 소극적이다. 그래서 노동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노동조합이 다른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기업을 압박해야 한다. 기업이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찾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우선 노동조합이 변해야 한다. 특히 노동조합을 이끄는 지도자를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 기후 변화가 특정 산업의 일자리에 어떤 영향을 줄지를 예측하는 것은 굉장히 많은 연구, 조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국제노총도 한국의 양대 노총 지도부를 비롯한 전 세계 노동조합 지도자를 상대로 이런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에너지 산업 개편에 따른 일자리 변화, 당사자들과 함께 논의해야"
프레시안 : 방금 노동조합의 대응을 주문했다. 그러나 기후 변화에 대응하려면 어떤 산업, 예를 들면 화석연료에 기반을 둔 에너지 산업은 퇴출이 불가피하다. 과연 노동조합이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역사를 보면, 자신의 일자리가 위협을 받을 때 노동자 대다수는 가장 반동적으로 대응했다.
로젬버그 : 가장 어려운 문제다. 사실 에너지 분야에서 나오는 온실가스 배출량이 가장 많다. 여기서 조심해야 한다. '너희는 나빠! 너희 때문에 온실가스가 나오잖아.' 이렇게 그들을 몰아붙여서도 안 된다. '당신들의 일자리를 보장해주는 건 불가능해!', 이런 생각을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생각은 결국 끊임없는 갈등의 악순환을 만들어낼 뿐이다.
그들과 머리를 맞대고 논의를 해야 한다. 그 논의의 장에는 기업도, 정부도, 노동조합도, 개별 노동자도 들어가야 한다. 그런 공론의 장을 통해서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 산업의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려면, 일자리의 퇴출이 불가피하다. 모두가 '윈-윈'할 방법은 없을까? 이런 질문을 던지고 같이 해법을 찾아야 한다.
이런 과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루아침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100에서 0으로 줄이고자 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노동자는 정년퇴직을 할 때까지 일자리가 유지될 수도 있다. 또 어떤 노동자는 재교육을 통해서 다른 산업에 재취업을 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장시간에 걸친 이런 '전환'은 충분히 가능하다.
물론 이런 전환을 위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개별 산업에 미치는 기후 변화의 영향에 대한 연구가 우선돼야 한다.
프레시안 : 한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에서는 노동조합의 힘이 약하다. 정부, 기업이 노동조합을 대화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연 노동조합의 주도하는 기후 변화 대응이 가능할까?
로젬버그 : 노동조합이 정부와 함께 논의할 수 있을 때, 가장 효과적이다. 그러나 기후 변화 대응은 어느 한 쪽만 서두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먼저 준비된 쪽부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예를 들면, 아르헨티나에서는 정부가 환경문제에 관심이 없다 최근에야 태양 에너지 등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은 정부보다 훨씬 오래 전부터 이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해 왔다. 뒤늦게 정부가 관심을 가졌을 때, 기후 변화 대응 논의가 노동조합의 앞선 고민 때문에 탄력을 받을 수 있었다.
중앙 정부가 움직이지 않으면 지방 정부와 함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서는 노동조합이 온실가스의 상당 부분이 출·퇴근 과정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노동조합은 스스로 출·퇴근 과정에서 온실가스를 줄이려는 방법을 찾으면서, 지방 정부에 교통 정책 개선 정책을 적극적으로 제안해 관철시켰다.
▲ "기후 변화 대응은 어느 한 쪽만 서두른다고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먼저 준비된 쪽부터 시작하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 ⓒ프레시안 |
"정의로운 전환, 평등이 열쇳말"
프레시안 : 일단 '정의로운 전환'에 대한 공감대가 있다고 하자. 그런 전환에는 막대한 비용이 든다. 그런 비용의 조달 방법은 또 다른 심각한 갈등을 낳을 수 있다.
로젬버그 : '정의로운 전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쇳말은 '평등'이다. 결국 이것은 세금과 직결된다. 잘 알다시피 지구 온난화를 비롯한 환경문제는 부유한 이들에게 책임이 있다. 그러나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세금은 대부분의 국가에서 소득 대비 비중을 놓고 보면 저소득층이 많이 낸다. 이런 세금 제도는 개편이 필요하다.
국제사회도 마찬가지다. 선진국들이 후진국과 비교했을 때 기후 변화에 대응하는 비용을 더 많이 지불해야 한다. 아주 간단한 원리다. 기후 변화에 책임이 더 큰 사람, 국가가 또 무엇인가 지킬 것이 더 많은 사람, 국가가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하도록 제도를 짜야 모두가 납득할 것이다.
"노동자는 우리의 엄마, 아빠…이해가 중요하다"
▲ "지금 당장 노동조합의 대응이 답답하더라도, 노동자를 환경운동의 편으로 만든다면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프레시안 |
로젬버그 : 한국의 상황을 자세히 모른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산업사회에서 노동조합이야말로 그 사회의 구심점이라는 사실이다. 사실 노동조합 조합원은 특별한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의 엄마, 아빠다.
지금 당장 노동조합의 대응이 답답하더라도, 노동자를 환경운동의 편으로 만든다면 기후 변화에 대응하기가 훨씬 더 수월해질 것이다.
사실 15년 전만 해도 다른 나라의 노동조합도 환경 보호 활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예를 들면 미국이 그랬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 노동운동과 환경운동은 그 어느 나라보다 긴밀하게 협력한다(Blue-Green Alliance).
"50년 후 모든 것이 무너지는 현실…우리에겐 길은 하나뿐"
프레시안 : 지금 이 순간도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기후 변화 대응이 가능한지, 더 나아가 '정의로운 전환'이 가능한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로젬버그 : 솔직히 말하면, 우리에겐 많은 선택지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딱 하나의 길만 있을지 모른다. 지금처럼 우리가 하고 싶은 대로 살면 50년 후에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걸음, 한 걸음 벼랑 끝으로 걸어가고 있다.
벼랑 끝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각자가 '좋은 사람'이 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각자가 가정에서 기후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더라도, 일터가 바뀌지 않으면 기후 변화는 막을 수 없다. 기후 변화 대응을 핑계로 가난한 이웃을 희생시킨다면 그 사회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못할 것이다. 기후 변화가 아니라 불평등이 우리를 벼랑 끝에서 떠밀 테니까.
이런 모든 것을 염두에 두면 우리는 결국 '정의로운 전환'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정의롭고, 평등하고, 민주적인 길. 바로 이것이 '정의로운 전환'이 지향하는 길이다. 한국의 시민도 열린 마음으로 연대하면서 이 길을 같이 찾아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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