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이 할머니, 반가워요 '훈' 할머니가 드디어 국적을 회복하며 이남이(李南伊)라는 이름도 되찾았다. 반세기 전 일제(日帝)에 끌려가 비참한 시절도 겪고 기나긴 간난(艱難)의 세월을 지낸 끝에 이제 고국의 품에 안긴 것이다. 지난 6월 13일 <프놈펜 포스트>의 보도로 알려진 뒤 4개월간의 곡절을 끝맺는 해피엔딩이다. 훈 할머니의 신원이 8월말 유전자 감식으로 확인되자 법무부는 할머니의 국적 회복에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밝혔고, 할머니가 9월 10일에 국적을 신청하자 최대한 서둘러서 엊그제 처리를 끝낸 것이다. 만리절역(萬里絶域)에서 반세기 넘어 지내는 동안 가족은 물론 우리말까지도 잊어버린 할머니, 그래도 잊을 수 없는 아리랑 가락과 고향 마을의 풍경을 따라 고향과 가족, 그리고 이름을 찾은 할머니에게 국적을 찾아주려는 정부의 노력은 지당한 것이다. 50여 년 만에 고국을 찾은 남이 할머니를 보며, 얼마 전 죽은 한 일본인 병사가 생각난다. 요코이라는 이름의 이 병사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당시 괌에 주둔해 있다가 "현 위치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27년간 지키며 숨어 있다가 1972년에 발견됐다. 사수 명령을 내렸던 당시 중대장을 찾아 보내 겨우 항복 명령을 전하고 무장을 해제시킬 수 있었다. 요코이의 귀환은 물질적 풍요에 젖어 있던 당시의 일본 사회에 충격을 던져 '요코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천황 폐하께 부여받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해 부끄럽다"는 그의 말은 그 2년 전 자위대 청사에서 할복한 미시마 유키오의 절규보다 더 큰 반향을 불러왔다. 그의 존재는 극우파의 상징이 되고 그가 숨어있던 토굴은 괌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요코이보다 갑절의 세월을 이역만리 한 마을에 파묻혀 살다가 돌아온 남이 할머니, 부모님의 산소를 끌어안고 우는 그 모습에서 우리가 느끼는 것은 요코이의 독기(毒氣)와 전혀 다른 숙연한 기운이다. 전쟁의 피해자로서 비참한 세월을 과거에 묻어둔 채 남에게 해 끼치는 일 없이 열심히 살아 온 할머니의 얼굴은 바로 우리 민족의 근대사로 그려진 것 아니겠는가. 나라가 나라 노릇 못하는 바람에 온 민족이 올바른 국적을 가지지 못한 채 35년을 지냈고, 해방을 맞고도 조국의 광복에 동참하지 못한 동포가 수없이 많다. 근현대사의 비극 속에 찢어진 겨레의 마음을 아물리는, 정말 통일다운 통일을 바라보기 위해서는 남이 할머니를 부둥켜안은 우리의 마음을 모든 겨레에게 넓혀야 할 것이다. (1997년 10월) |
▲ 해방 후 60여 년 동안 우리 모두 많이 변했다. 남한 사람들, 북한 사람들, 조선족, 고려인, 재일동포…, 모두. 누가 더 많이 변하고 적게 변하고 따질 일도 아니다. 각자 주어진 처지에 따라 변할 만큼 변해 왔다. 어쩔 수 없는 차이를 서로 인정하면서 공통분모를 챙길 뿐이다. 서로를 바라보며 거울로 삼을 줄 알아야겠다. ⓒ연합뉴스 |
지금부터 150년 전, 고종이 즉위할 무렵 조선 왕국 밖에 거주하는 한국인의 수가 얼마나 되었을까? 여기서 '한국인'이라 함은 한민족의 후예일 뿐 아니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생활 속에 지키고 있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무렵에 일본과 중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의 후손으로서 현지에 동화된 사람들은 제외한다.
몇 백 명 수준이나 되었을까? 관헌의 눈을 피해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편에 황무지를 개간하던 한 줌의 사람들 외에는 조선 왕국 밖에 한국인의 사회가 자리 잡는 길이 없었다. 당시 조선 인구 천여만 명의 0.01% 수준이었을 것이다. 유학, 무역, 외교 등의 목적으로 국외에 체류하는 사람의 숫자도 얼마 안 되었다. 당시의 서양인들에게 "은둔의 나라(hermit nation)"로 보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지금은 어떤가? 한반도 밖의 다른 나라 국적을 가진 교민 수가 700만 명에 이른다. 한민족 인구의 10%에 달하는 숫자다. 그중에는 현지 사정이나 본인의 선택에 따라 한국어와 한국 문화를 벗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압도적인 대다수는 한민족 후예로서 상당 수준의 민족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민족의 '분단'을 얘기할 때 우리는 흔히 남북 간의 분단만을 의식한다. 하나여야 할 것이 둘로 쪼개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구의 10%에 달하는 교민 사회의 존재를 생각하면 이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교민 사회에도 분단의 주체로 생각할 측면이 있다.
한민족의 교민 사회가 세계 여러 나라에 존재하는 것은 현상적으로 볼 때 '분산'이다. 그런데 그 사회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구성원들이 어떤 이유로 한반도를 떠나게 되었는지 따져보면 그 분산 현상에서 폭력적인 분단의 측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한반도 안에서 살 만한 조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아 이민의 길을 택한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분단의 의미가 없는 단순한 분산일 뿐이다. 그러나 이남이 할머니처럼 상황에 몰려 고향과 조국을 억지로 떠나 산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들이 겪은 것은 분단이다.
미국의 교민 사회는 대개 자발적 이민을 통해 이뤄진 것으로 이해된다. 물론 이주자 개개인에게는 상황에 몰려 달갑지 않은 마음으로 이민의 길에 오른 측면도 어느 정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국권이 쇠미하거나 단절된 시기에 조국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에 비하면 본인의 자유 의지가 전체적으로 훨씬 크게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미국 외의 큰 교민 사회는 중국, 일본과 러시아에 존재하는데 이들은 모두 해방 전 이주자들의 자손을 주축으로 하는 집단들이다. 따라서 형성 과정에서 폭력적 분단의 경험을 많이 가진 사회들이다. 그중 민족 정체성을 가장 뚜렷이 보존하고 있으며 반도 내의 민족 사회와 꾸준한 접촉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국 조선족 사회다. 200만 명에 이르는 중국 조선족은 한민족의 분단 극복 노력에 동참할 큰 의미를 가진 존재다.
요하 유역을 동쪽으로 벗어난 만주의 대부분 지역은 근세까지 집약 농업의 발달이 늦어진 인구 희박 지대였다. 이 지역 출신의 만주족이 천하를 제패한(1644년) 후 황실의 발상지라 하여 조선인 뿐 아니라 중국인의 이주까지 금하는 봉금(封禁) 정책을 폄에 따라 이 지역의 개발은 더욱 늦어졌다.
조선 중기까지 한반도 농업 사회가 포화 상태에 이르면서 농토 부족으로 대다수 농민들이 곤경에 처했으나 청나라의 봉금 정책 때문에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이 사정이 1860년대부터 변하기 시작했다.
청나라가 제2차 중영전쟁(1856~60)에 패하면서 지방 통제력이 약해졌고, 연해주에 러시아 세력이 진출했다. 조선 북방민의 월경이 1860년의 기근을 계기로 두드러지게 되기 시작했다가 1869~70년의 연이은 흉년으로 크게 확대되었다. 청나라 관헌은 러시아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이 불법 월경을 전에 비해 묵인하는 자세를 취하다가 1880년대에 들어서는 조정 차원에서 실변(實邊) 정책을 채택, 이 지역으로의 이주를 권장하면서 조선인의 이주도 양성화하는 방향으로 나섰다.
조선인의 대거 이주가 진행됨에 따라 조선 문화를 그대로 옮겨온 조선족 마을들이 생기고 조선족 인구가 압도적인 조선족 집거 지역이 만들어졌다. 압록강 중·상류 건너편과 두만강 건너편의 큰 집거 지역이 '서간도'와 '북간도'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간도(間島)'라 함은 두만강과 압록강 강 속의 섬을 말하는 것인데, 월경이 금지된 시절 강 건너편에 소규모 개간을 행하던 사람들이 월경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강중의 샛섬에 밭을 만들었다고 둘러댄 데서 이 이름이 유래한다는 것이 통설이다. 1910년 합방 당시까지 서간도에 약 5만, 북간도에 약 16만 명의 조선인이 정착했다는 집계가 있다. (김택 등, <길림조선족>, 1995년, 10, 16쪽)
을사조약과 합방을 겪으면서 이주 양상에 큰 변화가 생겼다. 그 이전의 이주는 영세민의 '생계형 월경'이 위주였는데, 국권 상실을 계기로 일제의 지배를 피하려는 '망명형 이민'이 늘어난 것이다. 이로써 간도의 조선인 이주민 사회는 양적 팽창만이 아니라 조선 사회의 입체적 구조를 그대로 옮겨놓는 질적 변화를 겪게 되고, 그 결과 일제 식민지 시대를 통해 독립군 활동 등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다. 1922년까지 만주 지역의 조선인 인구는 약 65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위 책 17쪽)
1930년대에 일본이 만주 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만주국을 세우면서 조선인의 만주 이주에 또 한 차례 양상 변화가 있었다. 일본 당국은 만주 개발을 위해 조선인의 이주를 권장, 많은 영세민들이 만주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그 결과 해방 때까지 만주의 조선족 인구는 200만 명에 육박하게 된다.
일본의 만주 진출은 남쪽 지방 영세민의 만주 이주를 확대시켰을 뿐 아니라 만주의 조선인 사회에 친일파의 계보를 만들어주었다. 만주국에서 내세운 오족협화(五族協和 : 만주족, 한족, 몽골족, 일본인, 조선인) 슬로건 뒤에서 조선인은 일본인 다음의 2등 국민 지위를 부여받았다. 만주국의 조선인 우대 정책은 친일파 조선인의 새로운 활동 무대를 만들어주었을 뿐 아니라, 영세민들까지도 일본의 힘에 기대어 현지 중국인들에게 대항하는 풍조를 불러일으켰다. 1931년의 만보산 사건은 이런 풍조의 한 단면을 보여준 것이다.
일본의 만주 경영과 중국 침략으로 인해 조선인은 중국인에게 두 얼굴을 가진 존재가 되었다. 일본 침략에 함께 맞서는 동지로서 독립운동 세력이 있는가 하면 일본의 주구 노릇을 하는 친일 세력이 있었고, 이주 조선인 사회에는 두 세력이 엇갈려 있었다.
해방을 맞아 많은 이주 조선인들이 진퇴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에게서 되찾은 조국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함께 조선인에 대한 중국인의 일반적 반감도 중국을 떠나고 싶은 동기로 작용했다. 그러나 해방 후 국내의 혼란스러운 상황, 지금까지 쌓아놓은 생활 근거를 버리고 돌아가 새로 근거를 쌓기 어려우리라는 전망이 귀국을 꺼리게 했다. 그 결과 200만 이주민 중 대략 절반이 귀국하고 절반이 중국에 남았다.
조선 이주민들과 이해관계가 대립되는 현지 토호 세력을 포섭하려는 중국 국민당의 정책이 잔류 조선인들을 더욱 곤경에 몰아넣었다. 그 때문에 조선인 사회는 민족 모순의 극복과 민생 안정을 제창하는 공산당을 지지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고, 실제로 공산당이 동북(만주) 지역에 거점을 만들어 국민당 세력을 남쪽으로 밀고 내려가는 과정에서 인민해방군에 대거 참여하는 등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우는 소수민족이 되었다. 이를 통해 조선족은 '일본의 주구'란 오명을 벗어던지고 중국 인민의 확고한 일부가 되었다.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은 다민족 국가 중 뛰어나게 포용적인 민족 정책을 펴 온 나라다. 한 예로, 만주족은 소수 민족 중 세 번째로 큰 1300만 인구를 가지고 있지만, 언어와 문화가 한족에 동화되어 민족 정체성이 약하다. 소수 민족 등록의 기준과 절차에 따르면 이들은 한족으로 등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도 이들이 소수 민족으로 등록하는 것은 소수 민족에 대한 혜택이 탄압보다 크기 때문이다. 조선족 지식층 중에는 해방전쟁에서 조선인의 공로가 소수 민족 우대 정책을 이끌어내는 데 공헌했다는 자부심을 가진 이들도 있다.
1949년 이후 조선족은 자치구 설정, 공항 건설(연길), 민족대학 설립(연변대) 등 소수 민족 정책에서 특별 우대까지는 아니라도 충분한 존중을 받아 왔다. 시국에 따라(예컨대 문혁 절정기) '박해' 비슷한 상황도 없지 않았지만, 당시 중국의 일반적 상황에 비해 두드러진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지금의 조선족은 '중국 공민'이란 국가 정체성을 편안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김학철 선생과 함께 조선족의 정신적 지도자로 추앙받는 정판룡 교수의 '며느리 론'이 조선족 정체성의 표준으로 널리 인정받아 왔다. 조선족에게 조선(한국)은 친정이고 중국은 시댁이란 것이다. 일상적인 일과 생활은 중국인으로서 하되, 모국을 아끼는 마음을 마음에서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1970년대까지 조선족 사회는 북한과 많이 교류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남한과 관계를 늘려 왔다. 그 관계와 교류의 표면에는 경제적 이익이 덮여 있지만, 그 밑에는 조선족의 민족심(민족의식)이 깔려 있다. 한국이 중국과의 관계에 있어서 먼저 나섰던 일본보다 더 큰 성과를 이뤄 온 데는 조선족의 역할이 작지 않다.
근년 조선족 사회에서는 '정체성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다. 자치 구역에서는 조선어가 한어와 함께 공용어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자진해서 한어 교육을 선택하는 추세가 단적인 문제로 지적된다. 개혁·개방에 따라 사회 유동성이 커지면서 활동 영역을 자치 구역 밖으로 넓히기 위해서는 한족 사회와의 경계선을 뛰어넘어야겠다는 판단으로, 엘리트 계층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추세다.
언어는 민족 정체성의 가장 큰 지표다. 민족어 포기는 민족 정체성 상실의 지름길이다. 그러나 이것은 억지로 가로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한국어만이 공용어로 통하는 남한에서 한국어 자체가 어떻게 약화돼 왔는가? 또 얼마나 많은 한국인이 자발적 선택을 통해 미국 사회로 넘어가 왔는가? 민족 정체성의 약화는 세계화 시대의 어쩔 수 없는 추세다. 본국민과 중국 조선족, 그리고 어느 교민 사회에서나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피할 수 없는 현상이라면 그를 받아들이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야 할 일이다. 정체성 약화의 한 가지 결과는 민족 공동체의 입체화다. 민족 구성원의 99.99%가 하나의 정치체제 아래 일정한 생활방식에 따라 살아가고 있던 150년 전과 달리 지금은 한민족 구성원들이 여러 정치체제 아래 여러 형태, 여러 층위의 민족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21세기의 민족주의자는 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의식을 가진 어느 위치의 구성원에게도 나름대로 공동체에 공헌하는 길을 열어주는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이다. 과거를 표준으로 한 순혈주의 잣대로 나보다 민족의식이 약한 사람들을 모두 배신자, 변절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자세다. 잔에 물이 "절반 밖에 없네!" 불평하기보다 "절반이나 있네!" 고마워해야 하는 시대에 우리는 와 있다.
150년 전에 비해 한민족 인구는 7배로 늘어나 있고 그 정체성은 크게 약화되어 있다. 정체성 약화의 원인으로는 '분단'과 '분산'이 함께 작용해 왔다. 두 요소를 구분해 볼 줄 아는 것이 해외 교민사회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바로잡는 데 요긴한 일이다. 그리고 앞으로 북한 주민들을 대하는 태도를 정하는 데도 또한 필요할 것이다.
분단은 극복의 대상이고 분산은 적응의 대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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