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는 자신의 정체성을 선비에 둔다. 이들은 사회 정의의 방편으로 의료를 연구하고 실천했다. 반면 일반의는 임상에 직접 활용할 수 있는 의술을 습득하는 데 치중할 뿐만 아니라, 작은 의술도 일종의 사유재산으로 보면서 공유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둘 중 한의학의 발전에 기여한 이들은 누구일까?
당연히 유의다. 일반의가 대대로 전해져오는 비방에 근거해 진료를 할 때, 유의는 가족, 지인의 건강을 보살피면서 다양한 임상 경험을 수집하고, 여러 학문 전통을 습득해 나름의 의학 체계를 추구했다. 이런 유의의 활동의 결과 여러 가지 저서가 나왔음은 물론이고, 한의학도 소멸되지 않고 생명력을 가지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 조헌영(1900~1988). ⓒ프레시안 |
이런 사회 참여의 배경에는 유학에 기반을 둔 선비 전통이 있다. 조헌영은 경상북도 영양군에 터를 잡은 퇴계 이황의 영향을 받은 남인 계통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을미년 항일 의병장으로 유명한 조승기다. 그는 이런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었다. 그는 대구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 대학 영문학부를 졸업했다.
조헌영이 한의학에 입문한 것은 삼십대로 늦은 나이다. 그는 <통속한의학원론>에서 늦깎이 한의학 연구자가 된 이유를 이렇게 밝히고 있다. (일설에 따르면, 다른 이유도 있었다. 일본 유학 시절 사랑하는 애인이 폐결핵에 걸렸는데, 이를 치료해주고자 한의학을 공부한 것이 직접적인 이유라는 것. 실제로 그는 1934년 <폐병치료법>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내가 한의학에 관한 저서를 쓴다는 것은 나 자신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삼십이 되어서 한의학 책을 처음 펴보게 된 것은 한의학이 대중 의료에 가장 공헌이 많은데도 쇠퇴해 가는 것이 애석하기 때문이다."
조헌영이 한의학에 매료된 가장 큰 이유는 가난하고 병든 민중의 삶을 외면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1935년 <신동아>에 기고한 그의 글은 당시의 시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양의는 훌륭한 진단 기계를 많이 갖추어야 하고 약품도 대규모의 설비로 제제해야 하므로 돈이 많지 않으면 치료를 충분히 받을 수 없다. 하지만 한의는 약물을 쉽게 구할 수 있고 치료도 하등의 설비를 필요로 하지 않아서 민중 의료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렇게 민중의 아픔을 구제하고자 유의의 삶을 선택했지만, 그런 민중이 늘 그를 기쁘게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또 다른 글에서 환자에 대한 불평도 늘어놓는 인간적인 모습을 보인다.
"남의 바쁜 시간은 생각지도 않고 병 이야기를 두세 시간을 장황하게 늘어놓고, 있는 말 없는 말 다해가며 처방을 얻어가지고 가면서 미안하거나 감사하다는 표정도 없이 가는 무례한 사람이 있으니 이는 유의학자들의 인술에 어린 양하던 민중의 버릇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조헌영이 저술한 <통속한의학원론>은 현대 한의학의 시작을 열었다. 전통적인 한의학에서 벗어나 현대 의학과 접합점을 찾았다. 그는 "동양과 서양의 진리는 단지 다른 모습으로 나누어진 것일 뿐, 하나의 원칙을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런 원칙하에 서양의학을 염두에 둔 현대 한의학의 설명 틀을 만든다.
일본 한의학이 서양 의학과 일원화된 이후의 의료 변화는 조헌영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 한의학은 급속히 서양 의학으로 흡수되었다. 증상에 따라 개인의 차이를 무시하고 같은 약물을 치료하는 것은 대표적인 예였다. 그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의학이 합쳐졌을 때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1950년 정부의 보건의료행정법안에 대항해 한의학을 지켰다.
한국전쟁 때 납북됐지만, 북에서도 한의학 연구는 멈추지 않았다. <동의보감>은 우리가 내세우는 세계적 문화유산이다. 이 <동의보감>을 제대로 번역하려면, 단순히 한문을 번역하는 것뿐만 아니라 당시의 문화, 음식, 관제, 복식, 의료 등의 전반적인 삶을 고증해서 오늘날에 맞게 살려야 한다. 북한의 <동의보감> 번역본이 국내에 소개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 <동의보감> 번역본이 가능하도록 노력한 이가 바로 조헌영이다.
조헌영이 생각한 한의학 개혁의 마지막은 유의의 부활에 있었다. 의료의 사유화가 아니라 보편적, 대중적이며 사회 정의를 실천하는 유의(儒醫)적 한의사야말로 민족의학의 희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가 그토록 지키고자 했던 한의사의 현재 모습은 어떤가 우리의 모습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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