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흐느꼈는지는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분명하지는 않다. 미국에서 투표할 길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그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다. 투표할 수 있었더라면 아마 김대중 씨에게 한 표를 던졌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씨가 낙선한 것 때문에 아쉬웠던 것보다는 민주화 운동의 양대 지도자 중 한 축이었던 김영삼 씨가 마침내 대통령에 당선된 역사적인 의미가 내게는 훨씬 더 무거웠던 것 같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 '87년 항쟁의 결실이 부분적으로나마 맺어지는 모습에 감격했던 것이 아닐까, 분명하지는 않지만 느닷없이 터져 나온 눈물의 의미는 그런 근처에 있었을 것이다.
정계은퇴 선언과 번복을 거쳐서 대선 4수에 도전한 김대중 씨는 1997년 기어이 뜻을 이뤘다. 이 때는 이미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이었기 때문에 나도 투표권을 행사했고 내가 지지한 후보가 당선되었기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1992년에 느꼈던 정도의 감격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내 마음에는 걱정이 더 많았다. DJP 연합이라는 동상이몽의 전략적 제휴가 어디로 이어질지가 걱정이었고, 아슬아슬한 표차로 겨우 대통령 자리 하나 따낸 처지에서 강고한 기득권의 저항을 어떻게 상대할 수 있을지가 또 걱정이었다. 하지만 이런 흔해 빠진 소리들은 말머리를 잡기 위해 늘어놓았을 뿐이고, 이제 흔히 거론되지 않은 관점에서 한 가지를 말해보고자 한다.
만약 김대중 씨가 1971년 40대 후반의 나이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어땠을까? 박정희 씨와 대결을 새삼스럽게 다시 시켜보자는 뜻이 전혀 아니니까 오해말기 바란다. 1971년의 김대중과 1971년의 박정희를 다시 비교해보자는 말이 아니라, 1971년 40대 후반의 김대중 대통령과 1997년 70대 중반의 김대중 대통령을 가상적으로 비교해 보자는 말이다.
1971년에 김대중이 당선되었더라도 '70년대의 고도성장이 가능했을지, 또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더라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함께 잡을 수 있었을지' 따위에 질문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나는 모른다. 나아가 그런 가상적인 시나리오를 거론하려는 것도 아니다. 더구나 김대중 씨 본인으로서도 1971년보다는 1997년에 대통령이 되었기에 노벨상 수상이라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197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더라면 군부나 보수의 저항으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과거에 일어난 일을 다르게 가정해서 그 결과가 어땠으리라고 이러쿵저러쿵 할 생각은 없다.
내가 이 가정을 통해 제안하려는 초점은 한 정치인이 48세 때 대통령이 되느냐 아니면 73세 때 대통령이 되느냐는 차원에 한번 주목해 보자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한국 사회가 어떤 종류의 사회인지를 한번 자의식적으로 되새겨보자는 것이다.
▲ ⓒ연합뉴스 |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오르기까지 26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특별한 연고나 의지할 만한 배경이 없이 순전히 의지와 명분만 가지고 무슨 일을 성사시키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를 엿볼 수 있는 좋은 단서다. 좁은 땅에 인구가 밀집해서 사는 만큼 얽히고설킨 사연과 관계들이 그만큼 복잡해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한국사회 평균적 구성원들이 변화와 도전을 두려워하고 안전한 보신을 원하는 성향 때문이라고 본다. 군부정권이 권력을 사유화하고 남용하더라도 그것이 잘못임을 알면서도 막상 뜯어고치기는 주저하면서 "구관이 명관"이라는 따위 케케묵은 속된 상투어에 몸과 마음을 기대버리는 습관이다. 물론 한국인 대다수가 항상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캐스팅 보트를 쥐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소위 부동층에 속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저런 습관에 젖어있는 사람들이 꽤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정치란 실험보다는 신중이 미덕인 사업이다. 그래서 오크쇼트(Michael Oakeshott)는 젊은이들은 그들의 단점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장점 때문에 정치라는 사업에는 알맞지 않다고 지적했다. 1971년 47세의 김대중을 한국의 시민들은 너무나 젊고 패기에 차서 거부한 셈이다. 1961년 44세의 박정희도 쿠데타가 아니라 선거였다면 집권할 수 없었다. 멱살을 잡아서 끌고 간다면 억지로 끌려가 줄 수는 있지만 자발적으로 따라가는 경우는 매우 드문 것이 보통 한국의 인민이다. 이치에 따라 설득되어본 경험이 별로 없고, 정치인들과 상호신뢰의 끈으로 엮였다는 느낌을 가져본 경험도 별로 없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 중에는 아직 정치인을 동료들의 대표라기보다는 지도자 또는 지배자로 인식하는 사람이 많다. 어쨌든 오크쇼트의 영국에서는 "변화"를 주창하는 정치인들이 너무나 많아서 오히려 유권자들의 신중한 선택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면, 한국의 경우는 너무나 신중한 유권자들과 너무나 눈치만 보는 정치인들이 많기 때문에 오히려 실험정신을 더 많이 수용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역사상 가장 젊은 대통령은 노무현이었다. 그가 시도한 여러 가지 실험들은 보수파에게는 물론이고 지지자들로부터도 환영받지 못했다. 개중에는 설익고 경솔했다고 볼 수 있는 구상도 없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시도들은 바람직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한번 시도해봄으로써 결과를 지켜볼 가치는 있었다. 균형발전계획이 그랬고 종합부동산세도 그랬으며, 항상 비난의 표적이 되었던 그의 일상어 화법도 내가 보기에는 결국 우리 모두가 변해갈 수밖에 없는 지점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는 그의 그런 시도들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나중에 바뀔 때 바뀌더라도 지금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식이었다.
실제로 위험부담이 매우 큰 사업이라면 신중을 거듭하면서 심사숙고를 거치는 것이 마땅하다. 김대중의 역점 사업이었던 한반도평화 정책이나 노무현의 역점사업이었던 국토균형발전계획은 백년대계에 해당하는 만큼 심사숙고를 거쳐야 마땅했고, 내가 보기에는 실제로도 사회적 공론이 충분히 이뤄졌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내내 보수파는 "퍼주기" 논란을 계속했었고, 행정수도 건설계획은 공론의 반대에 부딪쳐서 행정복합도시로 축소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기득권을 수호하기 위해 변화를 저지한 사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특별히 기득권을 가지지도 못한 사람들이 기득권 계급에게 부화뇌동한 것은 단지 새로운 길을 두려워하는 인습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평소에 "대중보다 반걸음만 앞서가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국뿐만 아니라 어디서나 현실정치의 진보라고 하는 명분을 추구할 사람이라면 깊이 새겨들어야 할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김대중 씨는 대중보다 반걸음만 앞서 갔기 때문에 그래도 "모든 게 김대중 때문"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다. 이에 비하면 노무현 씨는 때로 반걸음만 앞설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두 걸음을 앞서려는 경우도 없지 않았나보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 모든 일들을 다른 각도에서 한번 바라볼 필요도 있다. 대중이 노무현을 좀 더 적극적으로 따라 가줬더라면 차이가 반걸음으로 좁혀질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중이 김대중을 좀 더 적극적으로 따라 가줬더라면 김대중 역시 더 많은 변화를 시도하면서도 반걸음의 차이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치인이 대중보다 반걸음을 앞서는가 두 걸음을 앞서는가는 어떤 객관적인 기준으로 판정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정치의식과 의사소통의 전반적인 흐름 가운데서 상대적이다. 그러므로 "반걸음만 앞선다"는 김대중 씨의 발상은 인동초의 정치적 지혜인 만큼이나 한국 사회의 전반적인 보수성이 얼마나 강고한지를 보여주는 단면도에 해당한다. 사실 김대중 씨 정도로 명망을 떨친 인물의 삶이 "인동초"에 비유되어야 하는 현실이야말로 변화를 두려워하는 한국 사회의 폐쇄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정치개혁이라는 관점에서 내가 가장 아쉽게 생각하는 대목은 내각제와 관련된 일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에서 무작정 내각제로 개헌만 하면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해"라는 것이 조금이라도 해소될 리는 무망하다. 그런 식으로 헌법 조문만 바꾸는 식의 제도 변화는 해당 제도로부터 기대할 수 있는 바람직한 의미는 전혀 살리지 못한 채 사태의 전개과정에서 거간꾼들이 떡고물이나 챙기고 마는 조령모개가 되기 십상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1998년에 취임한 시점은 바로 그런 식의 조령모개로 흘러가지 않도록 예방하면서도 개헌에 관한 논의를 공론장에서 깊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였다는 점에서 아쉽다.
그 기회는 두 가지 사정으로 조정되었다. 하나는 물론 김종필이 연합에 참여하면서 내건 조건이었다. 다른 하나는 외환위기다. 김종필을 끌어들이기 위해서 내각제를 받아들이는 척했다고 해서, 일단 당선된 다음에 내각제 논의를 외면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당장의 여론조사에서 내각제 지지율이 아무리 낮아도, 주변의 지지세력 사이에 김종필에 대한 거부감이 아무리 커도, 내각제에 관해 찬성 측이든 반대 측이든 논의를 활성화할 수는 있었다. 즉, 대통령은 경제위기 극복에 전념하면서 권력구조 논의는 철저하게 공론의 향배에 맡긴다는 입장을 취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2년 내지 3년 정도 권력구조에 관한 논의가 학계와 정계에서 일어났더라면, 대한민국에서 중요한 헌법적인 문제에 관해 이치와 상식에 따라서 공론이 형성되어 물꼬가 트이는 최초의 사례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때나 지금이나 나는 속칭 내각제라 불리는 의회주의 정부형태의 본질과 작동원리는 널리 알려지기만 하면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있다고 확신한다. 김형오 씨처럼 불투명한 동기에서 개헌론을 들먹이는 작태에는 분개하지만, 어쨌든 지금처럼 대통령제에 관한 회의론이 주기적으로 확산되다 보면 10년이나 20년 사이에 내각제 개헌이 이뤄질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그래서 하는 말이다. 1997년에 대통령으로 결국 뽑히게 될 김대중이라면 그보다 몇 년 일찍 뽑아줄 수도 있었지 않았을까를 가정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십여년 후에 어차피 할 개헌이라면 1998년 즈음부터 좀 활발하게 논의해 봤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워지는 것이다.
김대중 씨가 돌아가신 후 사람들은 3김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들 얘기한다. 나는 그런 알맹이 빠진 작문이 싫다. 한국에 김 씨가 천만 명에 육박하는 만큼, 3김 아니라 5김 시대라도 언제든 다시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언론계 언저리에서 말품 파는 재미로 살아가는 작명가들과 호사가들이 제휴한다면 "1김 2박 3이 4최 시대" 따위라도 대한민국에 찾아오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는가. 김대중 씨의 서거로 한 시대가 구획되었다고 말하려면 무엇보다 "반걸음"의 의미가 달라져야 할 것이다. 김대중 씨와 같은 신중하기 짝이 없는 정치적 행보를 불온시하거나 급진적이라고 생각하는 무지몽매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분명하게 깨어나고, 대중보다 반 걸음 앞서기만 하면 노무현 정도의 실험을 시도해 볼 수 있는 상태가 된 다음에야, 한국 사회는 김대중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라면 김대중에게 우리가 진 빚을 모두 갚았다고 확언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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