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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통령 DJ, 그에게 바치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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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대통령 DJ, 그에게 바치는 노래

[김작가의 음담악담] "아직 나의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때, 벼락처럼 닥친 소식은 오직 슬픔과 충격, 애도와 비탄이라는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한결같이 반응했다. 석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아직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정이 드문드문 보인다. 먼 일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그 충격에서 빠져 나오기도 전에 또 한 분을 보내고야 말았다. 급작스러운 사건은 아니다. 천수를 누리셨다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한 달여 투병 생활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평온한 얼굴로 선생은 가셨다.

한 마디로 정리되지 않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가 한 편의 비극을 읽은 느낌이었다면, DJ의 그것은 대하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은 느낌이기 때문이다. 노통도 없는 이 마당에 선생까지 가신 지금, 하늘에 의지해서 뱃길을 가던 항해사가 갑자기 별이 사라진 밤을 맞이한 기분이 꼭 이럴 것이다.

▲그는 한국 최초의 문화대통령이었다.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DJ 이름으로 U2 유인하기

참여 정부 때의 언젠가, U2의 내한 공연이 추진됐었다. 구체적인 단계까지 간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구상의 단계에서 끝났던 일이다. 그 작당모의의 현장에 참여한 적이 있다. 밴드 뿐만 아니라 무대를 통째로 들고 와야 하는 U2공연의 특성상, 제대로 된 개런티 다 주고 불렀다가는 아무리 사람이 많이 와도 망할 수밖에 없다.

돈이 아니라 명분이 필요했다. 현존하는 음악인 중에서 가장 국제 사회에 영향력 있는 뮤지션, 그야말로 행동하는 양심의 표상인 U2를 이 땅에 끌어들일 명분말이다. 모의의 중심에 섰던 분은 그 때 제안하셨다. DJ와 보노(U2의 보컬)가 만나면 된다고. 그들이 함께 판문점을 방문하면 된다고. 우리는 그 말을 듣고 무릎을 쳤다. U2 + ( )=내한, 이라는 산수 문제에서 돈을 제외한 다른 변수를 괄호안에 채워넣어야 하는 상황. DJ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정답!을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던 것이다.

실현 가능성이 있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는 다른 어떤 변수도 DJ만큼의 가능성은 보이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 약했다. 박근혜 대표? 이명박 시장? 에이, 설마. 허황될 수도 있는 이 산수 문제의 정답은 DJ가 유일했다. 일개 문화판 한량들에게도 그의 존재감은 그러했다. 그가 이 나라의 대통령이었고, 노벨 평화상 수상자였으며, 일생에 걸쳐 자신의 삶을 곧 한국 현대사로 만들었으며, 나아가 '아시아의 넬슨 만델라'로 세계의 유력층에 영향력을 가졌던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DJ가 그저 정치와 투쟁, 외교와 경제에 매몰된 사람이었다면 그 때 조금은 망설였을지도 모른다.

대중문화를 알았던 통치자

그는 대중문화를 세련되게 이용할 줄 아는 첫 번째 대통령이었다. 97년 대선 이전, DJ의 웃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투사이자 야당 총재, 그 뿐이었다. 그런 그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게 이른바 뉴 DJ플랜이었고, 그 계획의 정점에는 DJ DOC의 노래를 이용한 'DJ와 함께 춤을'이라는 선거 로고 송이 있었다. 그 CF에서 그는 컬러풀한 넥타이를 매고 젊은이들과 더불어 활짝 웃는 모습으로 등장했다. 이미 칠순이 넘었던 노인의 이미지적 연령은 그 장면 하나로 확 내려 갔다. 거기에 검정 두루마리의 민주화 투사는 없었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인기 가요를 대선 로고송으로 사용하고 CF까지 찍는다는 건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이었다. 그 때 이회창 후보의 선거송이 어땠더라, 기억도 나지 않는다.

대통령 취임식 때 마이클 잭슨이 참석한 것도 놀랄만한 일이었다. 마이클 잭슨 정도의 팝스타가 되면 돈으로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그랬다면 앨범을 내지 않았던 오랜 공백동안 온갖 정상들의 취임식을 기웃거렸겠지. 그런 마이클 잭슨이 공연과 상관없이 한국을 찾았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를 초청할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더 놀라웠다. 아무리 마이클 잭슨의 이름값이 있다지만, 높고 높은 어른들의 관점으로 보면 한낱 딴따라에 불과했던 게 불과 10여년 전 이 땅의 고정관념이었다.

DJ못지 않게 대중문화를 잘 이용할 줄 알았던 대통령은 박정희가 유일하다. '새마을의 노래'를 직접 만들어, 방송은 물론이고 전국의 동사무소 스피커를 통해 아침마다 틀어대며 자신의 자작곡을 온 국민이 아는 노래로 만드는 대통령이 세계에 또 어디 있었을까. 인기 정상의 작곡가였던 신중현에게 정권 캠페인 송을 부탁할 정도의 안목또한 갖추고 있었으니 대중음악의 힘을 그 또한 잘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다만, 정권의 안위를 위해 활용했던 것과, 구미에 맞지 않은 음악은 모두 금지곡으로 묶어 버리는 만행이 문제였을 뿐이지.

그러나 DJ시절의 한국 대중문화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는 명 캐치프레이즈하에 본격적인 문화 정책의 틀 안에 들어갔다. 박정희가 탄압해서 군림했다면, DJ는 포용하여 군림했다. 그리고 한 명은 총탄에, 한 명은 평온하게 이 세상을 떠났다. 신중현 선생이 박정희의 서거 소식을 듣고 어떤 기분이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마이클 잭슨이 살아 있었다면 DJ의 서거 소식에 애도를 전해왔을 게 분명하다.

그에게 바치는 노래

DJ가 조금만 더 일찍 떠났다면, 혹은 좋은 시절이 다시 찾아온 뒤 떠났다면 이렇게 복잡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이 평생을 추구해왔고 이뤘다고 느꼈을 가치가 단숨에 무너지는 걸 보면서 그 또한 우리만큼 괴로웠을 것이다. 그 괴로움이 5월의 통곡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작심하고 시작한 현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 괴로움이 조금 더 허락될 수 있었던 삶의 길이를 당겼을 것이다. 천수를 누리다 가셨어, 하고 나라의 큰 선생 가시는 길을 겸허히 지켜볼 수 만은 없는 이유다.

좋은 시절에 진정 천수를 누리고 가셨다면 밥 말리의 'One Love'를 영전에 바쳤을 것 같다. 이런 사연을 가진 노래다. 1978년, 망명중이던 밥 말리는 평화콘서트를 위해 다시 자마이카를 밟았다. 4월 22일, 무대에 선 밥 말리는 'One Love'를 부른 직후, 예정에 없던 이벤트를 벌였다. 양쪽으로 갈라져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던 자마이카의 두 수뇌부, 마이클 만리와 에드워드 시가를 무대위로 불렀다. 그리고는 둘의 오른손을 잡고 자신의 머리 위에서 두 손을 맞잡게 했다. 그 아래에서 밥 말리는 노래를 마무리했다. "이제 자마이카에 평화가 왔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의 순간, 듣고 싶었던 노래다.

그러나 지금은 U2의 'I Still Haven't Found What I'm Looking For'를 고른다. 애석한 마음으로. 하늘의 박정함을 원망하며. 우리가 찾아왔던, 거의 손에 넣었다고 생각했던 가치들을 허허롭게 그리며.

▲보노는 노벨평화상 후보로도 종종 이름을 오르내렸다. 80년대 U2는 '록의 양심'으로까지 묘사됐다. ⓒ로이터=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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