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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이제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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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이제 '살자'!

[철학자의 서재] 임레 케르테스의 <운명>

이 시대에 아우슈비츠를 다시 거론하는 것이 필자에게도 유쾌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운명>(박종대·모명숙 옮김, 다른우리 펴냄)의 저자 임레 케르테스가 제시하는 삶에 대한 관점과 생존 방식은 철학적으로나 현실적으로 충분히 숙고해 볼 필요가 있다. 새로운 관점과 실천적 삶의 방식이 궁극적으로 운명을 넘어 우리 삶의 방향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이 책은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케르테스는 유대계 헝가리 인으로 1944년 열다섯 살의 나이에 강제 수용소에 끌려간다. 전쟁이 끝나고 자유의 몸이 되기까지 1년간의 수용소 경험은 그를 평생 같은 주제에 몸 바치게 한다. 유대어도 못하는 어린 소년이었던 저자가 유대인으로 분류되고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의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 체념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자신의 '운명'인가의 문제이다. 그는 아파트 단칸방에 자신을 가두고 평생 이 문제를 규명하는 일에 천착한다. 그리고 2002년 73세의 나이에 그는 이 <운명>이라는 소설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열다섯 살 소년의 강제 수용소 생존기

▲ <운명>(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모명숙 옮김, 다른우리 펴냄). ⓒ프레시안
"아우슈비츠 이후에 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이다"라는 아도르노의 경구가 아니더라도 홀로코스트로 인한 유럽인들의 육체적, 정신적 트라우마는 치유될 수 없을 만큼 깊다. 많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을 체념하고 공동체적 운명에 돌리기도 하였으며, 많은 작가들은 이러한 야만적 상황에 대해 회의하고, 고발하면서 나치에 저항하기도 하였다.

저자는 놀랍게도 이러한 방법 모두를 거부한다. 쉽게 체념하고 물러서거나, 이데올로기를 들이대고 윤리성을 따지는 대신, 저자는 인간이 처한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의 생존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춘다. 즉 감정이나 이성을 가진 인간이 아닌 극단적 상황에 처한 동물과도 같은 본능만 남은 인간을 새로운 양식과 관점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서술하는 소년의 시선도 놀랍도록 순수하고 독특하기만 하다.

1944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 독일에 점령당한 헝가리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다페스트에서 아버지와 계모와 함께 살던 소년 '죄르지'도 아버지가 징집된데 이어 벽돌 공장에 동원되고, 얼마 뒤 아우슈비츠 행 기차에 오르게 된다.

소년이 처한 강제 수용소의 고통스러운 상황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특별한 것은 소년 죄르지의 삶에 대한 관점과 대처 능력이다. 아버지가 노동 수용소에 들어갈 때도, 자신이 군수 공장에 동원되어 일을 해야 할 때도, 심지어 예고도 없이 경찰들에 의해 강제 수용소로 이송될 때도 소년은 절망감에 빠지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유대인들을 몰아넣은 기차 안의 비참한 상황에서나 강제 수용소의 학살과 억압 속에서도 그는 살아남는 것 자체에만 몰두한다. 감정적으로 격분하고 저항하거나, 체념하고 자살을 선택하는 대신 상황에 적응하고, 수용소의 논리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 이러한 상황에 얼떨떨한 것은 오히려 독자들 쪽이다.

"독일군의 모습을 보니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그들에게서 말쑥하고도 세련된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첫 날 도저히 먹지 못하던 멀건 스프를 "둘째 날부터는 먹게 되고, 셋째 날에는 심지어 수프를 기다리기까지 했다.", "착실한 수감자가 되는 것은 중요했다.", "이 아름다운 강제 수용소에서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다는 동경이었다"라고까지 말할 때는 불편하다 못해 거부감까지 들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단지 열다섯 소년의 철없는 시선과 행동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윤리나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판단하고 행동하는 인물이 아니라 극단적 상황을 자신의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극복해 나가는 완전히 새로운 인간 유형을 저자는 제시하려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년이 처한 상황과 그의 독특한 생존 방식에는 적절한 해명과 더불어 따뜻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는 명령과 구타, 굶주림, 질병 등 그것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얗게 연기로 소각되어 나가는 굴뚝을 끼고 있는 수용소 안에서 소년은 자신의 방식으로 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도 한때 자살이나 탈출을 생각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보고 듣고 경험한 바에 따르면, 강제 수용소에서 벗어나는 방법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나 자신은 스스로 보기에도 가능성이 가장 적은 첫 번째 방법으로 살았다. 나는 영원히 인간 본성에 속하는 영역들이 있다고 배웠던 것 같은데, 상상이 그 중 하나였다. 사실 죄수 생활에서도 상상은 자유였다. (…) 수용소를 벗어나는 두 번째 방법은 영원히 잠을 잘 수 있게 해주는 자살이다. 최소한 단 한번이라도 이런 유혹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 수용소를 벗어나는 마지막 세 번째 방법은 수용소를 탈출하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을 써먹은 예가 우리 수용소에서 딱 한번 있었다. 도망친 사람은 셋이었고, 모두 라트비아인들이었다.

도망친 라트비아인들은 탈출한 그날 밤 붙잡혔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만세! 내가 다시 왔다'라는 표지판을 목에 걸고 그들 모두 교수형을 당하고 만다. 우리는 탈출이 불가능했다 하더라도 강제 수용소의 삶이 자살보다 결코 낫지는 않으리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런 고통과 야만 속에서 굳이 생존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그러나 소년이 수용소에서 자살을 선택하지 않았던 궁극적 이유는 이 책의 주제인 자유 의지와 관련되어 있다.

운명과 자유 의지와의 차이

1945년 4월 독일군의 패전과 함께 해방이 찾아온다. 심신이 쇠약해진 소년은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의 집은 이미 다른 사람이 살고 있고, 아버지는 아우슈비츠에서 사망했다는 소식만 전해 듣는다. 그는 이웃들에게 수용소에서 겪었던 일에 대해 설명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끔찍한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고만 충고한다. 사람들은 모든 일들이 소용돌이처럼 밀어닥쳤으며 자신들도 어쩔 도리가 없는 운명인 것처럼 소년에게 말할 뿐이다. 소년 죄르지가, 아니 73세의 케르테스가 분노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이다.

다만 그러한 일이 단순히 '오기만 한 것'이 아니라 '우리도 그리로 갔다'고 덧붙였다. 그런데도 마치 모든 것이 갑자기 우리한테 그냥 '왔던' 것처럼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모든 것이 그냥 지나간 것처럼, 끝난 것처럼, 변할 수 없는 것처럼, 되돌릴 수 없는 것처럼, 불분명한 것처럼 그렇게 흐지부지되고 있다.

과거와 단절된 새로운 삶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 한 시대의 광기를 규명하지 못하고, 그것을 운명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흘려버릴 때 그것은 추상적인 실체가 되어 연기처럼 숨어버린다. 홀로코스트의 만행 뒤에는 전체주의 이데올로기가 숨어있으며 이에 각자가 개입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마치 '그냥 온 것'처럼 운명으로 간주할 때 사건은 잊혀지고, 아무도 책임지는 일 없이 본질은 흐지부지되고 말 것이다. 소년의 삶의 방식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소년이 수용소에서 자살을 했다면 결국 그는 거대한 운명의 힘에 휩쓸리는 한 개인으로 끝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닦달했던 운명에 끝까지 자신의 방식대로 대처하는 가운데 이를 극복하고 살아남는다. 자신의 방식이란 현실에 부단히도 자신을 변형시키는 방식이다. 그의 관점과 인식, 그리고 행동이 끊임없이 질적으로 변화할 때 그는 자신의 운명에 갇히지 않고 내적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이는 갑작스럽게 덮치는 운명에 매몰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하나의 단계를 통해 진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인고의 과정인 것이다. 현재뿐 아니라 미래까지 변형시키는 그의 자유 의지에 의해 결정론이 힘을 잃는 순간이 바로 이때이다.

만일 운명이 존재한다면 자유란 불가능하다. 만일 자유가 존재한다면 운명은 없다. 이 말은 '나 자신이 곧 운명'이라는 뜻이다.

왜 수용소에서 소년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이제 내가 가게 될 길 위에 피할 수 없는 덫처럼 행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임을 잘 알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굴뚝에서조차도 고통들 사이로 잠시 쉬는 시간에 행복과 비슷한 무엇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두 내게 악과 끔찍한 일에 대해서만 묻는다. 내게는 이런 체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데도 말이다. 그래, 난 사람들이 내게 묻는다면 다음엔 강제수용소의 행복에 대해서 말할 것이다.

소년의 행복감도 이러한 자유 의지의 연장에서만 설명될 수 있다. 그 누가 아우슈비츠의 상황 아래에서 행복할 수 있는가? 너무 철이 없어서? 아니면 그의 행복감은 고통이 과장되거나 미화된 것인가? 그러나 보다 결정적인 가능성은 그의 자유 의지가 그를 행복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상황이 운명적으로 주어졌고 그것을 피해갈 수 없다면 체념하고, 인내할 수는 있어도 그는 결코 행복해질 수는 없다.

반면 소년은 자신의 관점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변형하여 아주 작은 행운조차 상대적으로나마 만족하고, 행복해 한다. 예를 들면 사탕무보다 좋아하는 사료용 무를 먹을 수 있을 때, 종기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도 설탕을 받을 수 있을 때, 바닥이 아닌 짚으로 만든 침대 위에서 잘 수 있을 때…. 너무나 보잘 것 없지만 그러한 작은 행복들 때문에 수용소의 삶은 비참한 현실이 아니라 일상이 될 수 있다. 자유 의지가 현실적 상황 자체를 바꾸는 실로 엄청난 기적이 전개되는 것이다.

운명을 거부하는 개인들의 역량이 필요할 때

저자가 제시하는 이러한 생존 방식은 현대적 상황에서도 숙고해볼 여지가 크다. 우리도 아우슈비츠만큼이나 고통스럽고 힘든 민주화의 역사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기만과 협박, 폭력과 억압 아래 독재자에 대한 복종과 충성을 강요받은 상황도 비슷하다. 수없이 많은 개인의 희생과 상처가 그 길 위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단 몇 순간에 일어난 사건도, 몇몇 지도자의 투쟁의 결과만도 아니다. 각각의 갈피마다 운명에 저항하고 생존을 모색했던 개인들의 각고의 노력이 숨어있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각자가 지닌 생존에의 열망과 인내심이다. 현실에 실망하거나 좌절하면 자신의 상황을 극단적으로 몰고 가기 쉽다. 서슴없이 폭력을 행사하거나,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생을 끝내고 만다.

소년 죄르지가 강제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아야 했던 이유는 생명을 끝내라는 운명의 명령에 굴복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삶을 보호할 수 있으며, 그것을 그 다음 단계로 이전시키며 성장시킬 수 있다. 소년에 의하면 생존은 그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하는 것이며 자신의 가치,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는 기나긴 여정인 것이다.

하나의 단계가 끝나고, 그것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다가온다. 그런 식으로 해서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그 사이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을 이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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