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 소회를 이렇게 풀었다. 80년대 전두환 신군부의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함께 연루돼 옥고를 치렀고, 이어진 DJ의 미국 망명 기간에도 교분이 두터웠던 그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한 전 총재는 군사법정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최후진술에서 "내가 죽더라도 다시는 이러한 정치보복이 없어져야 한다는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고 했던 DJ에게서 예수를 떠올렸다고 한다. 그는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심경에 이른 경륜가, 사상가, 신념인의 말씀이었다"며 이같이 회고했다.
▲ 한완상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 ⓒ프레시안 |
그에게 DJ는 '눈물 많은 인간미 있는 정치인'으로 기억돼 있다. 한 전 총재는 "비인간적 정치를 김대중 선생은 단연히 거부했다"면서 미국 망명 시절 성당에서 미사를 보던 도중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낸 DJ를 회상하며 "선생과 비견되는 정치인들 중에 그렇게 목 놓아 우는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다"고 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부총리, 김대중 정부에서 교육부총리로 발탁됐을 정도로 한 전 총재는 양김 모두와 인연이 깊다. 그런 그에게 한 사람이 세상을 뜬 뒤에야 이뤄진 양김의 화해는 아쉬움을 많은 듯했다. 한 전 총재는 양김의 집권기에 YS에게는 "김대중 선생을 문민정부의 정치고문으로 모시자"고 건의했던 일, DJ에게는 "더 높은 도덕적 마음으로 YS를 껴안을 때가 됐다"는 메시지를 전한 비사 등을 회고하며 결과적으로 화해의 적기를 놓진 점에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한 전 총재는 또한 남북의 적대적 공존 극복을 위해 살았던 DJ의 일관성을 높이 평가하며 YS에 대해선 "햇볕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YS가 자신의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낳을 수 없다"고 했음에도 최근 이를 부정하는 듯한 반응을 보인 데 대해서도 한 전 총재는 당혹감을 보였다. 햇볕정책에 대한 YS 자신의 이해 부족과 함께 주변의 냉전적 인사들의 영향으로 "93년 초의 YS와 그 후의 YS는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이명박 대통령에게 던지는 시사점이 적지 않다. 한 전 총재는 "이명박 정부를 어렵게 하는 건 냉전 근본주의 세력"이라며 "이 대통령이 역사에서 아름다운 성취를 못하게 된다면 그 태반의 이유는 그를 극우 쪽으로 끌고가려는 냉전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라고 했다.
한 전 총재는 클린턴 전 대통령과 현정은 회장의 방북, 북한 조문단 파견 등으로 남북관계 개선의 전환점이 마련된 점을 지적하며 "현 정부가 이 기회를 놓지만 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내내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민주주의는 훼손될 염려가 있다"고 충고했다.
한편 한 전 총재는 "양김의 화해에 더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르는 그룹과 DJ를 따르는 그룹 사이의 협력과 통합이 절박하다"고 개혁진영의 '현재적 화해'에 방점을 찍기도 했다. 그는 "두 민주세력이 불신을 하루빨리 극복하고 NGO와 긴밀히 협력해 통합하고 약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DJ를 "진정한 실용주의자"로 규정한 한 전 총재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를 "냉전 실용주의"라며 "하루빨리 창조적 실용주의 정신으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했다.
다음은 20일 오후 한완상 전 총재 자택에서 진행한 인터뷰 전문.
프레시안 : 한 전 총재께선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함께 연루됐고, 80년대 DJ의 미국 체류 때에도 인연이 깊었던 것으로 압니다. 김 전 대통령의 서거를 접한 심경이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 ⓒ프레시안 |
한완상 : 서거 소식을 듣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아, 김구 선생 이후에 가장 훌륭한 정치인, 애국자, 경륜가가 가셨구나…. 김구 선생 이후 가장 훌륭한 분이 김대중 선생입니다. 둘 다 민족분단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했습니다. 그 의지가 너무 강해서 두 분 다 색깔론 비방을 들었던 것도 비슷합니다. 심지어 수구 냉전세력에서는 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라고 비방하지 않았습니까. 김대중 대통령이 돌아가신 마당에도 인터넷을 보면 아직까지 색깔론 비방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두 분 다 민족의 장래를 생각하며 어떤 나라 만들지 고민하신 분이었는데 생각하는 바가 비슷하셨던 것 같아요. 김구 선생은 문화대국을 꿈꿨고, 김대중 선생은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있는 한국을 평화대국으로 만들고 싶어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정보 소프트웨어 대국, 정보인프라를 구축하고 정보화를 통한 참여민주주의 인프라를 구축하고 싶어한 거죠. 이를 바탕으로 20세기 정치 후진국에서 대번에 참여민주주의가 발달한 정치 선진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 분이 비슷한 점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한명의 김구 선생'을 잃었다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김대중 선생이 돌아가신 후 개인적으로 마음 아픈 이유는 생전에 그분과 의견 차이를 보였던 적이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미국 망명 시절 선생이 간혹 정치인적인 행태를 보일 때면 '간디처럼 사십시오'라고 권고했습니다. 그랬더니 선생은 '한 선생은 학자니까 그러는데 난 실제 정치인이란 거 잊지 마세요'라고 답을 하더군요. 내가 말하는 바의 깊은 뜻은 이해하시는 걸로 알았지만 막상 돌아가시니 그런 기억이 떠올라 마음이 아픕니다.
귀국 후에도 군부 권위주의 종식을 위해 양김이 후보단일화를 했어야 합니다. 그 쪽으로 내가 애를 썼는데 결과적으로 양김에게서 다 오해 받은 격이 됐어요. 하지만 양김이 분열한 결과 군부 권위주의는 5년 더 연장됐습니다. 이렇게 후광 선생과 이견이나 마찰이 있었는데 돌아가시니 마음이 안 좋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후 다 이해하신 것 같아요.
그 외에 남북관계에 있어 대통령이 되기 전 선생이 보여준 탁견을 저는 항상 지지했고, 대통령되신 후나 대통령 퇴임 이후 보여준 것, 그리고 돌아가시면서 남기신 것까지 앞으로도 지지할 겁니다.
프레시안 : 한 총재의 기억 속에 가장 또렷하게 남아있는 고인과의 개인적 인연이 있다면 소개해 주십시오.
한완상 : 제일 인상적이었던 기억은 1980년 가을 내란음모 사건 때 피고인 신분으로 구형받을 때입니다. 그때 '김대중 사형' 이란 말이 나왔을 때 간담이 서늘했어요. 김대중 선생의 최후진술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시간 40분 가까이 김대중 선생이 최후진술을 하시는데 사형 받은 사람이 어떻게 저렇게 차분하게 목소리를 깔아서 논리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통은 사형선고를 받으면 혼미백산하거나, 쓰러지거나, 말을 하더라도 중언부언 하거나 헛소리 하는데 말이죠.
최후진술 마지막에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우리 피고인들뿐만 아니라 역사에 남기는 유언이었죠. 내 죽음으로 한국에 정치적 보복은 끝나기를 바란다는 뜻의 말씀은 한 정치인의 이야기기 아니었습니다. 죽음을 초월할 수 있는 심경에 이른 경륜가, 사상가, 신념인의 말씀이었습니다. 자신의 희생으로 정치의 악순환이 끝나길 바란다고 말하는 건 예수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폭력정권에 폭력으로 맞서지 말고 내 죽음으로 끝내라는 당부였습니다.
제가 최근에 우아한 패배야 말로 함께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는 말을 하는데 그때의 선생님 말씀이 내 가슴에 깊이 각인되었지요. 평소에 그렇게 말하면 몰라도 사형을 구형을 받은 후에 나온 말씀이니 가벼이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을 듣고 당시에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선창한 것도 아닌데 모두가 즉흥적으로 울면서 애국가를 목 놓아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그 분을 책략가니 좌빨이니 하며 색깔을 덧칠하는 건 본질을 모르는 얘기입니다.
프레시안 : 가정이지만, 당시 국제적인 구명운동이 없었다면 신군부는 실제로 사형 집행을 했을까요?
한완상 : 구형을 받고 돌아오자 김홍일 씨가 내게 '우리 아버지 어떻게 됐어요?' 그러더라고요. 차마 대답하기가 힘들어서 가만히 있다가 '사형' 이러니까 김홍일 씨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어요. 한화갑 씨도 사형 구형 소식에 의기소침에 있기에 위로하고 싶었습니다. 김 선생은 사형 당하지 않는다는 취지였는데 포인트는 이거였습니다. 당시 미국에 레이건 대통령이 등장한 게 우리에게 불리할 것이라는 말이 많았어요. 하지만 미국에서는 대통령이 되고 나면 왼쪽도 중간으로, 오른쪽도 중간으로 오게 돼있습니다. 결국 레이건도 보수 대통령이지만 중간으로 올 것이라고 봤어요. 그렇게 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군부 통치 하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김대중 선생을 구함으로써 자기는 누구보다 인권 문제에 관심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그런 논리로 위로했어요.
실제로 레이건은 김 선생이 죽으면 안 된다는 입장이 명백했던 것 같습니다. 신군부는 레이건에게 매우 약했어요. 세계 여론도 있었지만 그 여론을 참작한 레이건이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신군부는 이념적으로 비슷한 공화당이 미국에서 집권한 이상 레이건 대통령의 이야기를 안들을 수 없었습니다.
또한 김대중 선생이 나중에 미국으로 가게 되리라고도 말했습니다. 만약 선생이 살게 되면 신군부가 절대 선생을 한국에 남아 활동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어디로 보내겠어요. 일본에는 60만 동포가 있어서 선생이 다시 위협적인 힘을 모을까봐 절대 보내지 못할 겁니다. 결국 멀리 떨어진 미국에 보낼 거라고 나는 믿는다고 말했어요. 결국 1981년에 내가 먼저 미국에 갔고 1982년 12월 선생이 왔어요. 내가 한 말이 들어맞은 거죠.
"눈물, 그것이 선생의 인간미"
ⓒ프레시안 |
프레시안 : 김구 선생 이후 가장 훌륭한 분이라고 말씀했는데, 김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하자면 어떻습니까?
한완상 : 1970년대부터 오늘까지 40년간의 정치사를 쓰려면 선생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정치사뿐만 아니라 한국 현대사도 이 기간 김 선생 없이 서술이 힘들 겁니다. 왜냐하면 지난 40년 우리 역사는 '군사권위주의 극복사'라고 해도 과언 아니기 때문이에요. 다른 쪽으로는 '민주화 진행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선생을 빼고는 설명이 안 됩니다.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지만 '냉전 극복사'의 관점에서도 볼 수 있어요. 이건 군사 권위주의 극복사보다 더 깊은 맥락에서 봐야합니다. 냉전주의는 문민문화 속에도 강고하게 남아있는 문제이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 민주화 위해 헌신한 정치인은 많지만 대체로 남북 분단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미흡했습니다. 분단 유지 혹은 강화를 주장하면서 민주화를 강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보수 야당의 계보를 보면 그런 이들이 주류처럼 보입니다. 군사 권위주의를 극복하는 역사의 궤도에서 김 선생이 다른 이들과 차별적으로 탁월한 위치 차지하는 이유입니다.
김대중 선생에 대해 하나 더 평가하자면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개선을 병행하려한 최초의 정치인이라는 점입니다. 지난 40~50년 동안의 한반도 정세를 보면 남북관계가 악화 되었을 때 대내 민주주의 역시 후퇴했습니다. 일종의 함수관계가 있어요. 별개 문제 같지만 꼭 맞물려서 그렇게 됐습니다. DJ는 그 함수관계를 이해한 드문 정치인입니다. 남북관계가 개선되면 남한 내 민주주의적인 소통 구조가 세워지고, 그 소통 내용도 풍부해지고, 그 속도도 빨라졌습니다. 이것은 법칙에 가깝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이걸 이해했어요. 큰 야당 정치인 중에서 남북관계에 일괄타결을 일관성 있게 끝까지 지지했던 정치인은 선생뿐이었습니다.
내가 김영삼 정부에서 통일부총리를 하던 시절 미국이 일괄타결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김 선생은 영국에서 야인으로 있으면서 벌써 일괄타결 얘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93년 가을 안보회의에서 내가 일괄타결 얘기를 꺼냈더니 다른 사람들은 애매모호하게 얘기했어요. 그때 외교안보수석이 '일괄타결은 시기상조'라고 하니까 김영삼 대통령이 대번에 일괄타결 안을 거부했습니다. 그런데 김대중 선생은 대통령 하기 전에도, 그리고 최근에도 클린턴의 방북을 원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일괄타결의 해법을 일관성 있게 주장했습니다.
선생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하나 더 보태자면 정보인프라를 전국적으로 구축한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것입니다. 21세기에 접어드는 즈음 한국의 정보 인프라는 전 세계적으로 봐도 놀라웠습니다. '줄씨알'들이 줄 안팎에서 자유롭게 힘을 모으는 일에 우리나라가 매우 활발했습니다. 이점은 세계에서 우리나라가 제일 앞서가고 있었어요. 이걸 가능케 한 사람이 김대중 선생입니다. 김 대통령 때 모든 산간지역 초등학교까지 전산망을 깔았습니다. 선생 자신은 남북관계에 공헌한 점을 강조하지만, 정보 인프라 구축으로 참여민주주의의 기초를 깐 것에 대해서는 주위에서도 제대로 평가를 잘 안해주고 있고 본인도 내세우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점은 역사적으로 높게 평가 받을 겁니다.
한반도는 예외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20세기는 냉전 종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21세기는 정보화로 막이 올랐습니다. 김 선생은 21세기의 막을 올리는데 주역이 됐어요. 그런데 20세기를 종식시키는 것은 미완의 과제로 남겨놓고 돌아가셨습니다. 여전히 냉전체계가 남북분단 구조 하에 상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은 대통령이 되기 전이나 된 후에나 퇴임 이후에도 항상 우리가 정보화에서는 중심 국가가 되고 있는데 왜 냉전 극복에서는 후진국으로 남아있게 되는가를 안타까워했어요.
프레시안 : 한 총재 말씀대로 사형을 언도받고도 최후진술을 그렇게 한 걸 보면 기독교적 소명의식을 가진 사람 같기도 하고, 남북문제를 풀어가는 모습이나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에선 가장 철저한 현실주의자 같기도 합니다. 한 총재가 본 인간 김대중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완상 : 김대중 선생은 타고난 정치인입니다. 그런데 인간을 위한 정치가 아닌 정치 즉 비인간적 정치를 그는 단연히 거부했습니다. 그게 참 독특했어요. 어디까지나 인간을 위한 정치, 인권을 신장시키는 정치를 지향했고 정치가 인권을 훼손하는 경우엔 단연코 그 정치에 맞섰습니다. 즐겨한 말이 '민중을 통해서 하늘을 섬긴다'는 것 아니었습니까.
김대중 선생의 인간미가 그 분의 독특한 면입니다. 인간미를 영어로 말하면 'compassion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 '동고(同苦)심'의 사람입니다. 선생은 대통령까지 한 사람이 슬픈 일이 있으면 근엄하게 감정 관리를 하지 않았어요. 눈물이 많고 큰 소리로 우시기도 했죠.
개인적인 경험을 들자면 1982년 12월 미국에 망명 오셨는데, 워싱턴에 있는 성당에 미사를 드리러 갔어요. 그때 카메라맨들이 사진을 찍으니까 감격에 겨워서 우시는데 당황스러울 정도로 엉엉 우셨습니다. 당신은 미국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아직도 한국에서 감옥에 갇힌 동지들과 남아있는 국민을 생각하며 하염없이 우셨어요. 그때 우는 모습을 일본 기자가 찍어서 톱뉴스로 보도하기도 했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도 영결식장에서 소리 내어 우시지 않았습니까. 예전에 광주 5.18 묘지에 가셨을 때도, 문익환 목사 장례식 때도 울고…. 선생과 비견되는 정치인들 중에 그렇게 목 놓아 우는 모습을 나는 한 번도 못 봤습니다. 그렇게 울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적인 면입니다.
그런 면에서 인간 김대중과 정치인 김대중은 분리가 될 수 없어요. 멀리서 보면 그는 근엄한 분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참 인간적인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의 철학을 보면 섞일 수 없는 게 공존합니다. 선생은 흑백논리를 굉장히 싫어했어요. 정치적으로는 정적과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북한을 바라보는 눈도 그런 마음에서 봤기 때문에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려 했던 거죠.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을 하기 두 달 전에 각계각층 사람들을 불러서 의견 수렴할 때 나는 '가시면 역지사지 하십시오. 저쪽 정상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면 잘 풀릴 겁니다'고 했어요. 그 후 나는 놀라운 결과를 목도했습니다. 정상회담 몇 달 뒤 내가 북한에 간 일이 있습니다.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평양에 왔으니 김일성 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문화궁전에 가자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때 북한 당국은 예전 같으면 보고가라고 적극 권고했을 겁니다. 그러나 그때 북측 당국은 '가지마세요'라고 했어요. 남한으로 돌아가서 어려워지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깜짝 놀랐어요. 그들도 우리와 역지사지 하고 있었던 거죠. 정상회담 끝나고 넉달도 안 됐는데 그렇게 나온 겁니다. '아 4개월 전에 DJ가 역지사지를 실천한 효과가 이렇게 나타나는 구나. 그들도 서울과 역지사지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역지사지 얘기는 내가 했지만 김대중 선생이 몸으로 실천한 겁니다. 역지사지가 남북관계 개선에 대단히 중요한데 선생은 실사구시의 정신으로, 창조적 실용주의 정신으로 그것을 실천하셨습니다.
ⓒ프레시안 |
그렇게 비교해보면 현 정부는 냉전 실용주의 정부 같아요. 진정한 실용주의가 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냉전적 가치관은 본래 실용적인 가치관을 배제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 실용주의와 서민중심으로 가겠다고 하니까 어떤 수구세력 대표자는 그의 홈페이지에서 이 대통령을 당장 탄핵하자고 나오는 것이 이를 반증합니다. 이들은 실용주의를 경기 일으킬 정도로 싫어합니다. 이 대통령은 그들 이야기에서 아직 자유롭지 못합니다. 올곧은 실용주의를 취하려다가 또다시 수구 쪽으로 미끄러지고 있는 듯해요. 하루빨리 이명박 정부는 창조적 실용주의 정신으로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DJ의 실용주의는 원칙이 확고한 실용주의입니다. 평화, 인권, 자유주의 그 가치 위에 굳건히 서 있는 실용주의죠. 그 원칙을 구현하는 수단 선택에 있어서는 문을 활짝 열어놓습니다. 목적이 확고하기 때문에 거기에 이르는 수단들은 다 열어놓고 토론해보자는 겁니다. 이게 올바른 실용주의입니다. 정당한 목표를 합리적 수단으로 달성하는 실용주의. 이 철학을 선생은 확실하게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김, 대통령 됐을 때 상대방 껴안았어야"
프레시안 : 고인이 많은 업적을 남긴 지도자임에도 불구하고 고인의 일생 중에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한완상 : 국민의 정부 출범 후 그 정부를 구성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내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민주개혁, 평화 노선을 구현하려면 신념이 확고한 동지들로 개혁 몸통을 든든하게 구축하고 나서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좌우의 전문가들이나 관료들을 써야 합니다. 진보도 좋고 보수도 좋습니다. 합리적이고 창조적 실용주의는 좋습니다. 그런데 몸통이 없고 대통령 혼자만 있는 듯 했어요. 개인 지도자의 카리스마만으로는 개혁이 힘듭니다. 개혁 정치는 어디까지나 시스템으로 운영돼야 합니다. 내가 YS 정부 5년의 공과를 안팎에서 관찰했기 때문에 염려돼서 그런 경고를 한 적이 있는데 결과적으로는 그 염려가 현실로 나타난 것 같습니다.
프레시안 : 양김의 화해가 화제인데, 87년의 양김 분열이 두 사람 사이 애증의 씨앗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쩌면 동서로 나뉜 현재의 기형적 정치구도가 정착된 것도 양김 분열에 연원한 측면도 있습니다. 양김 모두와 인연이 깊은 분으로써 그 점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한완상 : 그렇습니다. 내가 93년에 부총리로 입각했을 때 김대중 선생은 대선에 실패하고 영국에 갔습니다. 그때 나는 김영삼 대통령에게 지금 영국에 간 김대중 선생을 문민정부의 대통령 정치고문으로 모시자고 건의했어요.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DJ를 고문으로 모시면 첫째는 민주세력이 단합하는 효과가 있고 둘째로 동서를 통합해 지역정치를 극복할 수 있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김영삼 대통령은 '앞으로 그 분에 대해선 좋은 점도 나쁜 점도 내 앞에서 일체 얘기하지 말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나도 더 말을 못하겠더군요.
그렇게 5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97년 대선 이틀 전에 김영삼 대통령이 청와대로 나를 불렀습니다. 김 대통령이 '모레 누가 대통령이 되겠냐'고 묻기에 '1~2% 차이로 DJ가 될 것 같다'고 하니까 강하게 동의했습니다. 그런 저런 말을 하고 집에 와보니 도대체 나를 왜 불렀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만 한 가지 뇌리에 스친 게 김영삼 대통령이 이인제 씨 출마를 말리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하신 듯 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당선된 뒤 12월 말 경에 밤 12시가 지나서 김영삼 대통령이 내게 전화를 하더니 '전에 얘기할 때 감 잡았죠?' 하더군요. 그때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인제 후보의 출마를 말리지 않았다는 점을 동교동에 전하라는 말로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삼성병원에 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최측근 K씨를 만났어요. '5년 전 DJ가 쓸쓸하게 영국 갈 때 YS가 껴안지 못했지만 이제는 DJ가 더 높은 도덕적 마음으로 YS를 껴안을 때가 됐다'고 권했습니다. K씨가 이 내용을 종이에 써달라고 해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는 논리와 함께 포용의 정치의 중요성을 A4 8장 정도로 써줬습니다.
간접적으로 그 메시지가 전달됐다고 들었는데 반응은 없었어요. 게다가 청문회까지 하게되니까 양김 사이가 더 벌어지게 됐어요. 두 사람 모두 대통령이 됐는데, 대통령이 됐을 때 상대방을 껴안았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렇게 못한 것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YS 때는 내가 안에 있었는데 못했고 DJ 때는 밖에서 전달했는데 하나도 못했습니다. 오히려 썰렁한 방향으로 전개됐어요. 그 분들의 불신의 골이 깊어져서 아쉽습니다.
지금에 와선 양김의 화해도 필요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노무현 전 대통령을 따르는 그룹과 DJ를 따르는 그룹 사이의 협력과 통합이 절박합니다. 현재는 이 두 민주세력이 불신을 하루빨리 극복해야 합니다. 이걸 하려면 NGO와 긴밀히 협력하여 두 민주개혁 세력을 통합하고 약진하게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제 NGO도 힘이 많이 약화된 것 같아요. 그래서 줄씨알들이 힘을 모아 시민언론과 협력하여 민주개혁 평화세력의 통합을 이뤄내야 합니다.
프레시안 : DJ가 서거하고 나서야 양김의 화해가 나오는 건 아쉬운 일이지만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그래도 의아한 건 통일부총리로 한완상을 발탁했고, 보수세력의 반대에도 이인모 씨를 송환했고, 성사는 안됐지만 김일성 주석과 정상회담까지 추진했던 YS가 왜 그토록 DJ의 햇볕정책과 6.15 정상회담에 대해선 최근까지도 저주에 가까운 독설을 퍼부었는지 입니다.
한완상 :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93년 2월~3월에는 햇볕정책의 뜻을 받을 수 있는 여유가 있었어요. 취임사에서 남북 정상회담을 제의하기도 했습니다. 그때 나는 취임사 작성에 적극 관여했는데 매일 독회를 했습니다. 한라산도 좋고 백두산도 좋고 어디서든 민족이라는 원점으로 돌아가서 허심탄회하게 남북정상이 이야기하자고 했죠. 그리고 취임사에는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 없다'는 선언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김영삼 대통령은 이 선언에 대해 일종의 거부반응을 보이는 것 같아요. 93년 초의 YS와 그 후의 YS는 달라진 것 같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는가를 따져보면 초기부터 그의 주변에 냉전적인 인사가 적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북한도 오산을 했어요. 이인모 노인을 보낸 하루 뒤 NPT 탈퇴를 선언한 겁니다. NPT 탈퇴 변수가 남북관계를 새로운 문법으로 풀어가려는 남쪽 의지를 손상시킨다는 점에 대한 합리적 고려가 북한 당국자에게는 부족했습니다. 북한의 NPT 탈퇴를 결과적으로 가장 좋아 한 것은 남쪽 냉전세력과 북쪽의 강경세력이었습니다. 가장 이득을 보는 세력은 북과 남 양쪽의 강경세력이었던 거죠. 이런 상황들이 YS를 더욱 보수적인 생각을 갖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취임사 정신에서 점점 멀어져 갔습니다. 취임사에서 보여준 정신, 화해협력 정신을 잃어갔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그해 11월 APEC 때 한미 양국 외무장관 사이에 북핵문제에 대한 일괄타결책이 합의되었고, 양국의 대통령이 사인만 하면 됐는데, 그때 문민정부는 일괄타결의 입장을 교묘하게 왜곡시켰습니다. '광범위하고 철저한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일괄타결의 원칙을 훼손시킨 것이죠. 그때 미국 당국은 당황했었습니다. 우리 외무장관도 당황했던 게 기억납니다. 김영삼 대통령이 그때 또다시 냉전적인 입장을 취했어요.
사실 햇볕정책이라는 말은 김영삼 정부 때도 나왔는데 당시에는 그 말 자체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없었어요. 오히려 그것을 경원하는 분위기였죠. 그런데 DJ가 당선되면서 햇볕정책은 비로소 햇볕을 본 겁니다. 그 결과 햇볕정책은 김대중 대통령의 정책적 레이블이 됐습니다. 세계적인 브랜드 가치를 인정받는 정책으로 나아가게 되었죠. 노벨평화상 수상은 그 당연한 결과입니다. 이건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김영삼 대통령의 햇볕정책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이 안타깝습니다.
"MB정부 어렵게 하는 건 냉전근본주의 세력"
▲ ⓒ프레시안 |
프레시안 : 남북 화해에 적극적이었고 남북 정상회담까지 했던 김대중, 노무현 두 지도자의 서거로 남북문제의 위기 상황이 발생할 경우 인적 버팀목을 상실했다는 우려가 있습니다.
한완상 : 인적 버팀목이 있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평화와 민주주의, 서민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정치 등 역사적인 과제를 푸는데 있어 이제는 시스템으로 해야 합니다. 두 분이 남기신 좋은 유산을 시스템의 차원에서 계승발전해 나가야 해요. 개인만 바라보고 할 게 아니라 이제는 줄씨알이 큰 역할을 해야 합니다. 80년대엔 지식인이라는 전위그룹이 있어서 잠자는 민중을 깨우치는 일을 해 왔지만 지금은 의식화라는 게 필요 없어요. 줄씨알들이 인터넷에서 자유롭게 지식을 얻고 지혜를 활용하면서 자유롭게 토론하면 행동 옮길 수 있습니다. 의견이 밑에서부터 자발적으로 수렴되고 있어요. 그래서 지금은 특출한 영웅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이제는 모두가 미네르바 같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소망은 미약하지만, 여러 사람의 소망은 반드시 역사를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 들어 줄씨알들도 권력으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습니다. 85세 고령의 전직 대통령이 입원 전까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악화에 슬픔과 허망함을 서글퍼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당부하게 된 현실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한완상 : 줄씨알을 권력이 일시 탄압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대중사회에서는 매스미디어가 감시하고 국가 공권력이 감시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불가능하게 시스템 구조가 바뀌었어요. 이제는 20세기 식으로 탄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이명박 정부의 착각입니다. 일당 중심 통제체계인 중국 같은 중앙집권 체제에서도 그런 통제는 쉽지 않아요. 미네르바가 하나라면 통제할 수 있겠지만 수십만인데 어떻게 통제합니까. 줄씨알들은 흩어져도 힘을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개별적인 게릴라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 이게 21세기 흐름인데 이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프레시안 : 현 정부의 태도가 전반적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보수정권이기 때문에 남북문제와 민주주의에서 더욱 눈에 보이는 성과를 낼 수도 있을 텐데 기회를 활용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한완상 : 우리나라가 분단구조에 아직도 갇혀있기 때문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아시아의 만델라로 비유하는데, 내가 만델라 취임 때 대통령 특사로 직접 갔었습니다. 거기는 인종차별의 장벽 때문에 민주주의가 훼손됐어요. 그러나 남아공은 만델라 같은 흑인을 300년 이상 탄압했던 백인들이 스스로 자기 정치를 반성하고 만델라를 대통령으로 추대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만델라와 연정을 한 것이죠. 거기는 분단이 안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냉전 구도가 60년동안 지속되고 있어요. 서로를 철저한 주적으로 생각하며 미워한 게 60년입니다. 젊은 세대에서는 그런 사고가 약화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정치를 이끌어가는 기성세대에서는 아직도 냉전 근본주의가 강고하게 남아있습니다. 냉전 근본주의는 적을 만들어야만 잘 유지됩니다. 알카에다가 있어서 부시가 8년 동안 강경 호전정책을 쓸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것을 구조적으로 재생산 하는데 가장 좋은 건 분단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냉전 근본주의입니다. 냉전 근본주의적 정치문화 안에서는 정치인들이 합리적인 중간으로 오기가 힘듭니다. 현재 이명박 정부를 어렵게 하는 건 민주개혁진보 세력이라고 하기보다는 냉전 근본주의 세력입니다. 실용주의 자체를 일종의 좌파적인 움직임으로 봅니다. 진보진영에서 이 대통령을 탄핵하자고 한적 있습니까? 오히려 냉전 수구 쪽에서 MB의 실용주의를, 서민 프랜들리 정책을 좌파로 매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건전하고 합리적인 정치인들이 중간으로 오기 힘든 겁니다. 결국 이 대통령이 역사에서 아름다운 성취를 못하게 된다면 그 태반의 이유는 그를 극우 쪽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냉전 근본주의자들에게서 찾아야 할 겁니다.
프레시안 : 이번 조문단 파견이나 앞서 현정은 회장의 방북에서 통민봉관이라는 말이 많습니다만 역으로는 정부에게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을 텐데요.
한완상 : 지금이 이 대통령에게는 좋은 기회입니다. 클린턴 방북이 이 대통령이 올곧은 방향으로 전환하는데 굉장히 좋은 조건이 됐습니다. 그 다음 현정은 회장이 가서 꽉 막힌 소통의 문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평양에서 조문단이 옵니다. 조문단 면면을 보니 북한 실세 중의 실세들입니다. 이건 중요한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확고히 잡아서 남북관계 개선의 방향으로 확실히 실용적으로 나아가야 해요.
염려스러운 것은 냉전수구 쪽에서 강하게 비판할 때 이 정부가 너무 그쪽으로 또다시 경도될까 하는 점입니다. 그렇게 되면 한반도를 둘러싸고 오랜만에 형성되고 있는 화해와 평화의 기회가 소실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이 대통령의 남은 임기 3년 내내 남북관계는 악화되고 민주주의는 훼손될 염려가 있습니다. 이번 기회는 종합적으로 중요합니다.
북한에도 한마디 하고 싶어요. 북한은 정상적인 외교중심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이제는 벼랑 끝 전술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이젠 세계 중심으로 나와서 합리적인 외교를 과감하게 펼쳐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 정부가 할 일은 워싱턴 정부로 하여금 대북정책을 좀 더 포용적으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김대중 선생이 한 게 그런 일입니다. 북한 체제를 근본적으로 흔들 수 있는 힘은 동경, 모스크바, 북경, 서울이 아니에요. 평양은 그 힘이 워싱턴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평양은 미국을 가장 미워하면서도 미국과 가장 대화하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북미관계가 풀려야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도 풀리는 것입니다. 가장 독립적인 힘을 가진 변수는 북미관계입니다. 북미관계가 풀려야 여타 관계가 바람직하게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대통령이 남북간의 적대적 공생관계를 청산하여 한반도 평화를 꽃피우게 하려면 북미관계 개선을 위해서 우리 정부의 외교적 역량을 더욱 키워야 합니다. 북한이 이번에 조문오게 된 것을 계기로 이명박 정부는 미국 정부에 대해서 북미관계 개선을 더욱 강하게 주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DJ는 항상 북한과 미국이 대화해 북미관계가 좋아지길 원했습니다. 이 대통령이라고 못할 이유 뭐가 있습니까. 북미관계 좋아지는 게 우리에게 손해될 것이 없어요. 북미관계와 한미관계는 제로섬 관계가 아닙니다.
프레시안 : 김 전 대통령의 남북 평화와 민주주의의 유업은 남은 이들의 몫이 됐습니다. 앞서 양김 화해보다 DJ 세력과 노무현 세력의 화해가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풀어주십시오.
한완상 : 논의 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을 좋아하던 사람들끼리 정당을 만든다는 얘기도 있는데 그건 바람직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노무현을 사모하는 사람들과 김대중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시민사회가 모두 합쳐서 변증법적으로 한 단계 올라간 민주평화세력을 구축하는 게 시급합니다. 두 어른이 다 돌아가셔서 그 작업이 오히려 더 쉬울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이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며 가셨기 때문에 변증법적인 통합이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프레시안 : 올해 노무현과 김대중, 두 지도자를 한꺼번에 잃었습니다. 두 분의 서거를 잇달아 접한 국민들의 마음이 무척 무거울 텐데, 국민들에게 위로의 말씀을 부탁합니다.
한완상 : 지금은 찬바람이 붑니다. 먹구름, 폭풍우가 오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폭풍우와 먹구름이 덮고 있어도 잊지 말 것은 그 뒤에 햇볕이 항상 있다는 사실입니다. 봄을 시기하는 추위가 강해도 꽃샘추위일 뿐입니다. 잘 견디고 희망을 잃지 말아달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혼자만 희망하고 있으면 허무한 개인의 소망이지만, 모든 국민이 희망을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아름다운 역사가 현실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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