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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지다…85년 영욕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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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동초' 지다…85년 영욕의 생애

한반도의 민주주의와 평화에 거대한 족적

다섯 차례나 죽을 고비를 넘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노년의 병마를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서거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반도 평화와 민주주의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그를 빼고는 한국 현대사를 구성하기 어렵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85년 영욕의 삶은 '인동초'라는 별명처럼 고난과 시련 속에도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를 향한 의지로 일관됐다.

■ 섬소년의 정계 도전

김 전 대통령은 1924년 전남 목포에서 뱃길로 3시간 가량 떨어진 섬마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교육열이 남달랐던 어머니가 전답을 팔아 뒷바라지한 덕으로 초등학교 4학년 때 목포로 이사해 북교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목포상업학교(현 전남제일고)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 후 그는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해 해운회사인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해방 후 일본인들이 물러가자 이 회사 관리인으로 사업수완을 발휘했다. 또한 목포일보를 경영하는 등 언론인의 길을 걷기도 했다.

해방 직후 그는 몽양 여운형 선생이 좌우익을 망라해 구성한 건준에 참여한다. 그는 좌익계열이 주도권을 잡자 환멸을 느껴 탈퇴했으나, 이 이력은 그를 한평생 따라다닌 '색깔론'의 근원이 됐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에는 공산당에 붙잡혀 투옥됐다가 총살 직전에 기적적으로 탈출해 목숨을 건졌다. 이것이 첫 번째 '죽을 고비'였다.

이후 그는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 목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 정치권에 첫 발을 디딘다. 첫 출마에서 고배를 마신 그는 56년 장면 박사가 이끌던 민주당에 입당해 본격적인 정치의 길로 들어섰으나 여전히 고난의 연속이었다. 강원도 인제로 지역을 옮겨 59년 보궐선거와 60년 5대 민의원 선거에서 거푸 낙선했다. 3전4기 끝에 61년 5월 인제 보궐선거에서 가까스로 당선됐으나 사흘 뒤 5.16 쿠데타가 발생해 등원도 못해보고 의원직을 잃었다.

잇따른 낙선으로 재산을 탕진하는 등 시련이 겹쳐 59년 첫부인 차용애 씨와 사별까지 한 그는 3년 뒤인 62년 아내이자 동지인 YWCA 활동을 하던 이희호 여사와 재혼, 가정의 안정을 되찾는다. 이어 63년 총선 때 목포로 다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면서 중앙 정치무대에 본격적인 첫발을 디뎠다.

ⓒ연합

■ 목숨을 건 박정희 정권과의 대결

그러나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과의 숙명적인 대결이 시작된다. 김대중은 67년 7대 총선에 당선된 뒤 신민당 대변인을 거치며 명성을 떨쳤고 경제통으로 당 안팎에서 인정받기에 이른다. 70년 신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이철승 의원의 막판 지원으로 YS에 역전승, 제1야당의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이듬해 치러진 대선에서 박정희 후보와 맞붙어 95만표라는 박빙의 표차로 석패했다.

이때부터 4전5기의 대권 도전의 역사가 시작되지만, 만만치 않은 저력을 보인 40대의 신예에게 박정희 정권은 엄청난 핍박으로 응수한다. 두 번 째 '죽을 고비'가 닥친 것도 71년 총선 지원유세 때다. 서울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광주 목포간 도로를 차로 이동하던 중 느닷없이 돌진한 14톤 짜리 대형 트럭에 받혀 교통사고를 당했다. 이 교통사고를 위장한 테러의 후유증으로 그는 한쪽 다리를 절게 된다.

72년 유신이 선포되면서 납치와 망명, 투옥과 연금으로 점철된 나날을 무려 17년 간이나 보내야 했다. 73년 일본 도쿄의 그랜드팔레스 호텔 복도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납치돼 토막살인 될 뻔한 위기를 맞았다. 납치범들은 토막살인이 여의치 않자 배로 옮겨 현해탄 한가운데에서 수장하려 했다. 다행히 그는 미국 정보기관의 도움으로 세 번째와 네 번째로 찾아온 '죽을 고비'를 넘긴다.

이후 그는 76년에는 명동성당에서 '3.1 민주구국선언'을 주도해 3년간 복역한 뒤 가택연금을 당하기도 했다. 79년 10.26 사태로 복권, 정치일선에 다시 섰으나 이듬해 신군부의 쿠데타로 정치 재개의 꿈이 무산됐다. 게다가 80년 군법회의에서 그는 신군부에 의해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돼 군법회의에서 사형선고를 받기에 이른다.

이후 그는 국제사회의 도움으로 사형에서 무기, 무기에서 20년 형으로 감형돼 다섯 번 째 '죽을 고비'를 넘겼으나 82년 말 미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망명 중에도 김상현 씨를 대리인으로 내세워 YS와 공동으로 민주화추진협의회(민추협)을 결성했다. 85년 2.12 총선을 앞두고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귀국했으나 김포공항에서 강제 연행돼 가택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의 귀국은 신민당 돌풍의 원동력이 돼 총선 승리의 견인차 역할을 하게 된다. 이후 그는 민추협 공동의장에 취임, 직선제 개헌투쟁에 나서 87년 6월 항쟁을 촉발시켰고 마침내 직선제 개헌을 관철시켰다.

■ 드라마 같은 대선 도전기

민주화의 열기를 타고 그는 정치인생의 전환점을 맞았으나, 87년 13대 대선을 앞두고 YS와 후보단일화에 실패하면서 '야권 분열'의 책임론을 피해가지 못했다. 당시 평민당 대선후보로 출마한 그는 노태우, 김영삼 후보에 이어 3위에 그치면서 2선 퇴진 압력에 직면했다. 그는 훗날 "당시 내가 후보직을 사퇴하는 게 옳았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그가 기사회생하게 된 계기는 평민당이 88년 총선에서 호남을 황색 돌풍으로 석권하면서 원내 제1야당으로 부상하면서부터였다. 그러나 이 역시 90년 노태우, 김영삼, 김종필이 민자당 3당 합당으로 손을 잡으면서 위기에 봉착했다. 하지만 91년 민주당 이기택 씨와 야권을 통합해 재기의 발판을 마련하고 92년 총선에서 97석의 의석을 얻어 대권 재도전의 기반을 다져갔다.

그러나 92년 대선에서 YS에 패해 대권 3수에 실패하자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홀연히 영국 유학을 떠났다. 파란만장한 그의 정치인생이 여기서 마감되는 듯 했다. 93년 귀국한 뒤에도 아태평화재단을 설립하는 등 통일운동에만 전념하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나 95년 민주당을 떠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해 정치에 복귀했고 97년 대선에 도전하기에 이른다.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에 맞서 자력 당선이 불투명하자 그는 충청권의 JP와 손잡고 'DJP 공조'를 이끌어내 정권교체의 꿈을 현실로 만들었다. DJP 공조에 대해선 무원칙한 야합이라는 평가가 엄존하지만, 36년간 지속된 보수정당의 장기집권에 마침표를 찍은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를 달성하기 위한 현실적 선택이었다는 후한 평가도 있다.

■ 평화적 정권교체, 그러나…

역사적 의미와 함께 출범한 김대중 정부의 항로도 순탄치 않았다. IMF라는 초유의 경제적 위기, 자민련과의 공동정부를 구성한 한계, 보수진영의 지속적인 공격에 5년 내내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취임과 동시에 그는 적극적인 외국인 투자 유치, 재벌간 빅딜 등 경제구조조정을 단행, IMF 체제를 졸업하는 외형적 성과를 거뒀다. 하지만 한국 경제는 재벌 경제와 신자유주의의 외길로 들어서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집권 말기에는 소위 '3홍 비리'로 명명된 아들 비리로 홍역을 앓았다. 세 아들이 모두 권력형 비리에 줄줄이 연루돼 구속되거나 검찰 조사를 받았고 김 전 대통령은 결국 "자식들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책임을 통절히 느껴왔으며 국민들게 마음의 상처를 드린 데 대해 부끄럽고 죄송한 심정"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해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보수 세력의 '퍼주기' 시비에도 중단 없는 '햇볕정책' 기조를 지켜내 2000년 6월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냈다. 이는 그와 김대중 정부의 최대 업적으로 기록됐으며 그해 10월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신장 및 한반도 평화정착에 기여한 공로로 21세기 첫 노벨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퇴임 후 남북정상회담 직전 현대가 4억 달러, 정부가 1억 달러를 북측에 건넨 사실이 밝혀지면서 후임인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으로 남북정상회담 성과에 흠집이 나고 측근인 박지원 전 청와대 비서실장 등 측근들이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하지만 김 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의 인적 버팀목으로써 노무현 정부 시절 불어닥친 북핵 위기의 국면에도 햇볕정책의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출범과 함께 보수진영의 '잃어버린 10년' 공세는 전직 대통령들의 조용한 생애 정리를 허락지 않았다. 끝내 노 전 대통령이 지난 5월 자살로서 생을 마감한 지 석달 만에 김 전 대통령도 눈을 감고 말았다. 그는 입원 직전까지 민주주의와 남북관계 악화에 허망함과 서글픔을 토로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국민들에게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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