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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계 '펜타곤'…오바마는 그로부터 자유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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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기계 '펜타곤'…오바마는 그로부터 자유로운가?

[철학자의 서재] 제임스 캐럴의 <전쟁의 집>

<전쟁의 집>(제임스 캐럴 지음, 전일휘·추미란 옮김, 동녘 펴냄)은 펜타곤(미국 국방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더 정확하게 말해서, 1943년 1월 22일 펜타곤이 완공되면서부터 벌어진 각종 전쟁과 전쟁 계획, 그리고 그것들을 일으킨 사람들과 미국의 세계 재편에 관한 이야기이다. 지난 60여 년간 수많은 무고한 인명을 살상하고 사람들의 터전을 파괴했던 미국의 전쟁이 어떠한 메커니즘에 의해서 이루어졌는지를 이 책은 매우 상세하게 분석한다.

<전쟁의 집>은 저자인 제임스 캐럴의 특이한 이력과 경험, 그리고 방대한 자료와 수많은 사람들과의 인터뷰로 생생하면서도 냉철하게 미국의 전쟁사를 설명하고 있다. 제임스 캐럴의 아버지인 조지프 F 캐럴은 미국 FBI 출신 공군 중장이었다. 그리고 1960년대 초반 케네디 대통령 시절 신설된 미국 국방정보국(DIA) 초대 국장을 역임했다.

제임스 캐럴은 어린 시절부터 펜타곤을 드나들었고, 누구보다도 펜타곤에 대한 기억과 사랑이 넘쳤던 유년기를 보냈다. 게다가 그의 생년월일은 펜타곤의 완공일과 똑같은 1943년 1월 22일이라는 우연도 있었기에 그의 펜타곤에 대한 관심은 어릴 때부터 대단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그의 아버지가 국방정보국 국장으로 펜타곤에 있을 때, 그는 베트남전 반대 시위대의 일원이 돼 펜타곤 앞에서 반전평화시위를 함께 하기도 했다는 점이다. 그때부터 그의 펜타곤에 대한 사랑은 식었고, 오히려 그 펜타곤의 본질을 조금씩 깨달아갔던 것이다.

대중관료주의, 견제를 받지 않는 거대한 괴물

▲ <전쟁의 집>(제임스 캐럴 지음, 전일휘·추미란 옮김, 동녘 펴냄). ⓒ프레시안
제임스 캐럴은 "재래식 군사력이 거의 무제한의 기술력과 결합하는 시대에 일단 그러한 힘이 펜타곤에 집중되면서 미국의 군부는 스스로 동력을 얻게 되었다"면서 펜타곤의 '통제할 수 없는 구조적 힘'을 펜타곤의 태생에서부터 추적해 간다. 미국은 자신의 세계적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 2차 제국주의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전쟁을 확실하게 승리로 이끌 육군 지휘부의 주둔지가 필요했다.

육군 장관의 요청에 루스벨트 대통령은 규모를 최대한 축소할 것을 지시했지만, 육군 공병대장 그르브스는 그 명령을 무시하고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로 펜타곤을 건설했다. 펜타곤은 둘레 1.6킬로미터, 연면적 12만 제곱미터, 지상 5층 지하 2층 건물로 현존하는 미국 최대의 건물이다. 이 거대한 건물이 들어선 후, 전쟁을 포함한 미국의 대외 정책은 거의 다 펜타곤을 거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펜타곤 완공 후 불과 25만 명이었던 미국 육군은 1400만 명으로 순식간에 증강되었다.

펜타곤이 완공되어 거대한 관료주의가 태동하던 그해 같은 달 셋째 주에 매우 중요한 사건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카사블랑카에서 미국의 루스벨트는 영국의 처칠 등 연합군 지도자들과의 회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를 선언했다. 이것은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두 적국의 민간인들과 도시들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하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이로써 협상을 통한 전쟁 종식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실제로 '포인트 블랭크 작전'으로 불렸던 독일 도시에 대한 무작위적인 공습이 바로 그 주에 감행되었다. 타격 대상은 군사 시설에서 군수 물자를 생산하는 도시의 공장으로 바뀌었다. 그들에게 노동자 주거 밀집 지역에 둘러싸인 공장을 타격하는가, 노동자 주거 밀집 지역을 타격하는가에 대한 약간의 의문과 도덕적 고민은 있었지만 그것은 대세를 바꿀 수 없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무차별 공습으로 최소 30만5000명의 독일 민간인이 사망했으며, 드레스덴 한 곳에서만 최대 13만 명이 죽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살상의 와중에 인류 최대의 비극이 그 주간에 잉태되고 있었다. 맨해튼 계획에 의한 미국의 핵무기 개발이 본격적으로 착수되었던 것이다.

절대무기, 무소불위의 권력체

제임스 캐럴은 펜타곤의 무소불위의 권력은 절대무기인 원자폭탄의 제조로 더욱 확고해졌음을 말한다. 미국 국방부는 맨해튼 계획을 수립한 지 2년 6개월여 만에 핵분열 원자폭탄을 만들어냈다. 이른바 '트루먼의 결정'으로 불리는 일본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 명령이 1945년 7월 24일에 포츠담에서 발동되었다.

그러나 그 명령서는 펜타곤을 완공시키고, 핵무기 개발 공장을 지었던 그르브스라는 일개 공병대장이 작성한 것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일본에 핵무기를 투하한다는 결정은 펜타곤의 한 회의실에서 미리 이루어졌다. 당시 일본은 태평양에서 미국 해군의 포위망이 좁혀오자 더 이상 전의를 가다듬지 못한 채 항복할 의사를 직간접적으로 내비치고 있었다.

일본 내부에서도 평화주의자들의 입지가 강해졌던 것이다. 일본의 교신을 감청했던 미국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도, 펜타곤의 육군 장관, 해군 장관 등 군부 고위층 몇몇과 오펜하이머 등 원자폭탄 개발과학자 몇몇이 모여서 일본에 원폭을 투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트루먼은 최종 명령 전달자였을 뿐, 핵무기 사용과 관련해서 많은 부분을 군부와 관료들이 쥐고 있었던 것이다.

굳이 원자폭탄을 쓰지 않아도 얼마 지나지 않아 일본이 항복할 것이 자명함에 불구하고 그들이 그 같은 선택을 내린 이유 또는 명분은 다음과 같다. 우선 일본에 대한 육군의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할 경우 미군의 피해가 100만 명은 될 것이라는 수치를 제시하여 공포심을 유발한 것이었다.

더 본질적으로는 전쟁 후 세계 질서 재편에서 소련을 굴복시키고 미국이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절대무기의 위력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일본인은 모두가 전투원이며 민간인은 한 명도 없다는 터무니없는 선전으로 트루먼의 결정을 종용했던 것이다. 8월 6일 히로시마에, 8월 9일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으로 최소 25만 명이 죽었다. 도시의 모든 것은 지옥불 같은 섬광과 열에 녹아버렸다.

대통령조차도 우습게 본 펜타곤

절대무기를 손아귀에 쥔 펜타곤은 누구도 넘보지 못할 세계적 권력을 확립했다. "펜타곤은 인간 의지의 속박에서 벗어났"으며 "순수한 정부기관과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는 비인격적인 힘이 상호작용하는" 거대한 관료기구가 미국의 권력중심이라고 제임스 캐럴은 지적한다. 심지어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 거의 모두가 펜타곤을 통제하고자 했지만, 펜타곤과 함께 부화내동하거나 굴복하거나 무시당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전쟁의 집>에서 제임스 캐럴은 펜타곤의 권력 위에 단지 형식적인 역할을 하는 데 머물렀던 역대 대통령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공화당 출신 '전쟁 영웅'이었던 아이젠하워는 '견제를 받지 않는 거대한 괴물'이라는 이름과 '군산 복합체'라는 이름을 붙였다. 케네디도 소련과의 미사일 위기를 넘기면서 절대적 평화를 갈구했지만 펜타곤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는 최종적으로 미국의 어느 대학에서 절대적인 평화를 주장하는 연설을 했고, 그 결과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암살자의 총탄에 의해 비운의 삶을 마감했다. 케네디의 죽음은 아직도 미해결인 상태다.

리처드 닉슨은 감정의 기복이 심한 술주정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베트남전을 종식시킨다고 해놓고서 전쟁을 7년이나 더 끌었는데, 자신의 광기로 인해 베트남에 핵폭탄을 터뜨릴지도 모른다는 엄포를 놓아 북베트남의 항복을 받아내려고 무모한 작전을 수립했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군부의 냉소와 무시로 인해 웃음꺼리가 된 후,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지미 카터는 초기에 평화군축이라는 이상과 인권에 대한 엄격한 도덕관으로 군부를 압박했다. 그러나 그의 도덕적 이상주의는 군축의 상대방인 소련을 자극할 뿐이었고, 완전한 핵무장 해제를 주장했기에 당연히 펜타곤으로부터도 외면당했다. 그래서 오히려 집권 하반기에는 펜타곤의 요구대로 더 많은 핵전력 증강에 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중동에서 영구적인 석유 지배권을 주장한 카터 독트린을 발표하는 데까지 무너지고 말았다.

로널드 레이건에 와서야 펜타곤과 미국 대통령의 궁합이 맞아 떨어지는 듯했다. 레이건은 네오콘을 자신의 각료로 받아들였다. 광포한 군국주의의 상징 와인버거를 필두로 울포위츠, 럼스펠드 등이 등용되었다. 소련을 악마의 근거지로 만들면서 미국의 도덕성 회복을 획책했으며, 1980년 1420억 달러였던 국방 예산을 1982년엔 2220억 달러로, 1986년엔 3760억 달러로 증가시켰다.

레이건 행정부는 소련이 따라오지 못할 새로운 전략 방위 구상으로 '스타워즈'를 제시했고 소련을 굴복시킬 방안으로 아마겟돈을 상상했다. 핵전쟁 대비 예산 확보 등을 의회에 요구했으며, 이제 미국 국민들은 소련이 아니라 레이건을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펜타곤이 날개를 단 격이었다.

그러나 레이건은 집권 후반기에 전격적으로 고르바초프와 함께 군축을 단행했고, 냉전 종식을 선언했다. 제임스 캐럴은 레이건이 이렇게 180도로 변신한 것은 그 자신의 고뇌도 있었겠지만, 실상은 이란-콘트라 게이트에 연루되어 닉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 전격적으로 고르바초프의 협상 제의를 받아들인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공포와 계산이 낳은 전쟁기계

군축 단행과 냉전 종식은 현실이 되었다. 소련과 미국 양쪽 진영의 엘리트 정치인, 무기 제조업자, 정보기관 및 정치기구들, 학계 전문가, 부동의 관료와 평론가들 모두 죽도록 고르바초프와 레이건의 선언에 반대했다.

냉전의 종식은 펜타곤의 종말을 의미하는 듯했다. 사실상 펜타곤은 미치광이 전쟁광들의 집합소가 아니었다. 물론 냉전의 최초 근원지라고 볼 수 있는 소련과 미국의 끊임없는 핵개발과 군비 경쟁은 일종의 광기로부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제임스 캐럴은 그 광기를 '자기 충족적 편집증'으로 표현한다. 절대무기에 대한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더 큰 공포를 가져올 절대무기를 개발하는 것밖에 없다.

미국 초대 국방장관인 포레스털은 '러시아가 쳐들어온다'는 공포를 미국 국민에게 주입시켰고, 그 자신도 그 공포에 휩싸여 자결하고 만다. 캐럴은 이후 펜타곤의 거의 대다수 관료들은 동일하게 포레스털의 공포에 놓여 있었다고 보았다. 소련이 핵공격을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소련보다 언제나 한 발 앞서 새로운 핵무기를 개발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공포를 적절하게 이용하여 사실은 아주 재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었다. 소련의 핵미사일 전력이 더 뛰어나다는 소문을 퍼뜨리고 나서는 더 좋은 미사일을 개발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해내기도 했고, 소련과의 군축 협상에 응해서 실제로 전략핵탄두를 감축하면서도 새로운 핵무기 개발을 '현대화'라는 명분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국방예산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고, 군수자본의 이윤과 고위 관료들의 재산은 축적되어 갔다.

냉전 종식 이후에 펜타곤은 새로운 적을 만들어야 했다. 그 첫 번째 희생양이 이라크였다. 걸프전을 통해서 미국의 건재를 과시했다. 아버지 부시는 소련이 없는 상태서 마음껏 팍스아메리카를 구가했다. 인권과 인도주의를 위한 전쟁이라고 했지만, 실상은 석유를 위한 전쟁이었다.

빌 클린턴이 집권을 해도 별반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러시아와의 군축은 더디게 진행되었다. 빌 클린턴은 자신의 군 입대 기피 전력과 동성애자 군 입대 허용 추진, 그리고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으로 인해 처음부터 끝까지 펜타곤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했다. 심지어 핵무기 사용에 관한 전권은 펜타곤의 수중에 떨어지기도 했다. 군부에 아무런 영향력도 못 미치는 대통령은 펜타곤의 새로운 적, 또는 가상의 적 만들기에 동조할 수밖에 없었다. 핵 선제 공격 전략을 담은 '핵 태세 검토 보고서'도 이때에 나온 것이다.

펜타곤의 준공일은 1943년 9월 11일이었다. 그로부터 딱 60년이 지난 2001년 9월 11일 펜타곤이 공격을 받았다. 미국의 아프간 침공은 그해 9·11사태가 발생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은 상태서 대단히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이 같은 신속한 전쟁 수행은 전쟁을 통해서 권력을 합법적으로 누려온 미국의 펜타곤(미국 국방부)의 오랜 준비에 의한 것이라고 제임스 캐럴은 말한다. 이어서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펜타곤의 위력을 또 한 번 입증했다.

새로운 세계는 가능할까

제임스 캐럴의 <전쟁의 집>을 보고 있노라면, 어쩌면 새로운 세계는 가능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냉전 종식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재편하고자 하는 펜타곤에게는 이 세계가 새롭다고 할 수 있겠다.

아프간에 대한 해법에서도 보이듯이, 오바마도 펜타곤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이지 않는다. 펜타곤이 미국의 이익을 이야기하는 한, 오바마 역시 미국의 이익의 수호자임을 거부할 수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도 통제하지 못하는 거대한 관료 권력 앞에서 지켜야 할 보편적 가치는 감동 있는 연설에 불과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하지만 캐럴은 의외의 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엿보인다. 1980년대 네오콘이 본격적으로 확립되어 활동했던 레이건 정권 하에서 결정적인 군축협상과 냉전 종식 가능성이 열린 원인을 대중운동에서 찾기 때문이다. 캐럴은 1979년 6월 10일에 100만 인파가 폴란드 크라쿠프에 모였고, 1982년 6월 12일 100만에 가까운 사람들이 뉴욕 중심에 모여서 냉전의 고정 핀을 각각 하나씩 뽑았다고 말한다.

그들이 냉전을 끝내기 위해서 교황 바오로 2세, 미하일 고르바초프, 그리고 수동적인 로널드 레이건을 이용했다고 한다. 비로소 냉전이 종식되었을 때, 군부와 군산복합체 자본은 격렬 반대했지만, 이들 대중은 열렬히 환호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또한,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서 캐럴은 대중의 열망을 보여줬다. 대중이 볼 때, 펜타곤은 온통 악령의 화신이며 전쟁 미치광이였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캐럴은 대중의 그 같은 시선을 불편해 한다. 이것은 그 자신이 펜타곤과 더불어 자란 탓과 아버지가 펜타곤의 중요 직책에 있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우선, 개인의 도덕과 양심으로서는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펜타곤의 구조를 더 면밀히 보아야만, 펜타곤에 대한 비판을 냉철하게 수행할 수 있다는 데 관심을 가졌다. 또,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그 같은 펜타곤에 맞서 대항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속의 개인들이 나름의 고뇌를 안고 있었다는 점도 고려한 것 같다.

만약 <전쟁의 집>이 단지 미국 군부의 건드릴 수 없는 권력과 몇몇 집단의 음모에만 국한시켜 미국의 전쟁사를 논했다면, 그것에 대항하는 세력이 존재하며 그들이 희망일 수 있음을 적어도 이 책에서는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도 저자 제임스 캐럴은 거대한 권력 구조에 대항해서 대안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주체로 '사람들'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가질지도 모르는 오류 가능성에 대해서도 함께 성찰하고자 한다. 이 점이 이 책을 단지 미국 전쟁사를 무협지처럼 읽게만 하지 않는 무게감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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