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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역사 교과서는 권력으로 재단할 일이 아니다"

[박동천 칼럼] '이간질' 교과서 없애길 바란다

정부가 역사 교과서 편찬 기준을 새로이 정했다. <연합뉴스>는 이를 전하면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대폭 강화했다고 제목을 달았다. (☞ 바로가기). 내용을 보면, "1948년 8월15일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한 정통성 있는 국가임을 설명한다", "유엔의 결의에 따른 총선거를 통해 대한민국이 수립되고 유엔에 의해 합법 정부로 승인되었음을 강조한다", "대한민국은 농지개혁을 추진하고 친일파 청산에 노력했음을 서술한다"고 정했다고 한다. 그리고 6· 25전쟁이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됐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도록 했으며, 이승만 정부의 경우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기여한 긍정적인 면과 독재화와 관련한 비판적인 점을 모두 객관적으로 서술하도록 했다고 한다.

누가 무슨 생각을 가지고 저런 기준을 정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는데, "특정 이념이나 역사관에 편향되지 않고 객관적인 관점에서 서술하도록 했으며, 역사적 사실에 대한 해석이 다양할 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제시하도록 하는 등 서술의 공정성, 균형성에 초점을 맞췄다"는 해명은 나온 모양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인문학적 소양이 크게 부족한 발상에서 나온 듯하여 내 의견을 밝힌다. 먼저 내용에 관해 세 가지 사항을 살펴 보자.

정통성이란 소리는 건국과정 이야기를 꺼내려면 쉽게 의존하는 일종의 상투적인 경로에 해당한다. 그런데 대한제국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계승하면 정통성이 확보되는 것일까? 이에 답하려면 먼저 정통성이 무슨 의미인지부터 조금은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의미가 섞여 있다. 하나는 북한과 남한이 서로 한반도 인민을 대표하는 정부라고 국제사회에 대해서 주장하는 목적과 관계되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대한민국 내부에서 유일한 합법적인 정부라는 의미이다. 그런데 1948년이나 1970년이라면 몰라도, 2009년의 시점에서 이 두 가지 중 어떤 의미로든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굳이 새삼스럽게 강조해서 학생들에게 교육해야 할 이유는 없다.

현재 한반도에는 두 개의 합법적인 정부가 있고, 국제적으로 공인을 받아서 둘 다 국제연합의 회원국이다. 그러므로 대한제국의 계승자로서 북한보다 남한이 더 정통적이라는 주장은 공연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통일을 고려해 보더라도, 통일이란 더 정통적인 측이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있는 쪽이 주도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정부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정통성을 강화한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발상은 곧 국가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라는 순응주의를 세뇌하겠다는 생각과 같다.

다음, 농지개혁과 친일파청산 등은 일각에서 시도와 노력이 있었다면 다른 일각에서는 방해와 저항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나름대로 결과가 나왔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불만족스럽게 느낄 사람도 있고 괜찮았다고 평가할 사람도 있다. 이와 같은 경우 역사라는 것은 이런 다양한 의견과 평가들 모두로 구성되는 것이고, 그 중에서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는 일부 단면만을 부각하면 곧 관제 역사가 되고 만다. 관제 역사를 편찬한다는 것은 바로 역사에 관한 진실을 권력의 향배에 따라 춤추도록 방치한다는 말과 같다. 지금 이 나라 우익들이 원하는 대로 학생들이 관제 역사만을 배우고 자라 사회에 대한 비판정신을 상실한 결과 우익 정권이 영속화된다면 다름 아닌 전체주의 체제의 확립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만약 정권이 선거에 따라서 바뀌는 현재의 체제가 유지된다면 장차 한국인들은 세대에 따라 판이한 역사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어떤 경우라도 관제 역사는 공동체의 연대를 크게 해치고, 세상을 바라보는 기본적인 프레임에 관해서부터 인민들을 이간질 하는 짓이다.
▲ "교육과학기술부가 우리나라의 정통성을 부정하는 근현대교과서의 재검정에 나서지 않으면 학교현장에서 추방운동을 벌이겠다"고 주장하는 자유교육연합과 뉴라이트학부모연합 등 보수성향의 단체들. ⓒ연합뉴스

청소년들에게 우리 공동체의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어떻게 서술해서 가르치느냐는 문제는 나름 대단히 중요한 일로 옛날부터 지금까지 여러 번 반복되었으며, 작년부터 지금까지 다시금 불붙고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논쟁이 붙을 때마다 대개 그렇듯이, 논쟁의 내용에 대해서는 무성한 의견들이 많지만 논쟁의 형식에 대해서는 신경 쓰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논쟁의 형식이란 그 논쟁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얼마나 중요하며, 어떤 식으로 해소될 수 있는지 등에 관한 항목들을 가리킨다. 부연하자면, 주어진 쟁점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 자료나 증거에 의해 가부간에 판정이 비교적 명확하게 이뤄질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논쟁 참여자들 사이에서 상호 신뢰와 아량의 기풍이 생기기 전에는 악착같은 싸움이 계속될 일인지 같은 차원의 고려가 형식에 관한 고려에 포함된다. 무력, 공권력, 정부의 권위 따위를 통해 해소될 일인지 여부도 당연히 형식에 관한 고려에 속한다.

한반도의 남과 북에 각각 하나씩 정부가 생기게 된 사연, 이승만의 주도로 이뤄진 건국의 사연과 그 와중에서 빚어진 전횡과 야만의 사연,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부독재와 그 와중에 민주적 인민이 성장하여 거기에 끈질기게 저항한 사연, 정치가 그처럼 시끄러운 가운데 이룩한 경제성장은 어떤 요인에 힘입은 것이라고 봐야 할지에 관해 나올 수 있는 무수한 주장 등은 어느 것 하나도 간단한 대답을 허락하지 않는 주제들이다. 이런 종류의 질문에 "공정성과 균형성"을 갖춘 정답이 있을 수 있다고 보는 무지몽매한 폐쇄성에서 벗어나는 것이야말로 교육의 본령이다.

역사를 어떻게 서술할 것이냐는 문제는 단순한 과거의 일이 아니고 현재 우리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묻는 엄중한 질문이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대사 서술방식에 관한 논쟁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이 무엇이냐는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공정성과 균형성"을 갖춘 하나의 표준적인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보는 발상이란 곧, 자기 맘에 드는 서술을 공정하고 균형잡힌 것으로 간주하겠다는 배짱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편파적인 배짱을 "공정"이나 "균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서 가식을 부리면서 반론과 항의를 무지르겠다는 심보일 뿐이다.

현대 한국의 정치적인 쟁점들은 정부가 해결하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부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특정한 개인이나 집단 몇몇이 손을 써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서 발생하고 있는 것들이다. 이는 한국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영국의 경우 17세기 혁명을 어떻게 볼지, 윈스턴 처칠, 해럴드 윌슨, 마가레트 대처 같은 정치인들을 어떻게 평가할지는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논란거리고, 역사 서술을 둘러싼 논쟁은 당연히 당면한 정치현실의 쟁점들과 맞물려서 돌아간다. 프랑스 혁명, 파리 코뮌, 샤를 드골, 프랑수아 미테랑 등등,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평가를 어떻게 할 것인지는 프랑스에서 여전히 논쟁거리이고 또한 21세기의 현안들과 맞물려 있다. 단, 만약 영국이나 프랑스에서 정부가 교과서의 역사 서술에서 "공정성과 균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슨 집필 기준을 마련한다면 지식인들로부터 조롱과 경멸이 섞인 강력한 저항이 일어날 것이 틀림없다.

그 까닭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사회에서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을 구분하는 분별력이 관습적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이다. 공론의 영역과 권력의 영역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물론 어떤 사회에나 있다. 그런 사람들은 좌파에도 있고 우파에도 있다. 그렇지만 개명된 사회에서는 좌파나 우파를 막론하고 이를 분간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존경받지 못하며, 따라서 예외적인 소수에 불과하다. 대다수 상식인들은 공론의 판정에 맡겨야 할 영역과 권력에 의해 가시적인 성과를 낳을 수 있는 영역을 명확하게 분별하면서, 마땅히 전자의 영역에 속해야 할 일을 권력으로 어찌해보려 드는 자들을 전제(專制)한다고 꾸짖고, 후자의 영역에 속하는 일인데도 무작정 공론에만 맡기는 자들을 우유부단이라고 나무란다.

지금 교육부가 하려는 일은 이명박 정부의 전체적인 행태가 그렇듯이 전제에 해당하는 일이다. 이승만 정부의 농지개혁이 나름대로 성과가 있었다고 봐줘야 할지 지주와 농민을 동시에 몰락시킨 결과로 극소수 정경유착형 재벌이 발호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줬는지는 앞으로도 몇 백 년간 이 나라에서 논쟁이 계속될 일이다. 정권이 논쟁을 막는다면 그 때문에 반정부투쟁의 불씨가 하나 더 생길 것이다. 중고등학생에게 정부가 원하는 내용을 아무리 가르쳐봤자, 상당수는 결국 대학에 가서는 주입받은 내용과 상반되는 역사서술에 접할 것이다. 그랬을 때 젊은이들의 마음에는 새로 접한 역사서술에 더해서 정부의 조작 시도에 대한 반감이 겹쳐질 것이고, 나아가 한국 사회의 기존질서 에 대한 전반적인 불신과 적대감으로 이어질 것이다.

역사는 교육부 관료들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대통령도 국회도 사법부도 역사의 서술을 자기 입맛대로 재단할 수는 없다. 이는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니고, 해봤자 그렇게 안 된다는 말이다. 안 될 일을 억지로 시도하는 것은 쓸데없는 오기 싸움에 사회의 정기와 자원을 낭비하는 결과를 낳을 뿐이다. 역사 교육에 진정으로 관심이 있다면 집필 기준 따위 몽매한 발상을 빨리 털어버리고, 오히려 인문사회계 과목에서 교과서를 없애는 결단을 내리기 바란다. 인문사회계열의 공부란 결국 당대의 실존적인 문제들에 관한 공부다. 당대의 문제들에 관해서는 교과서가 따로 필요 없다. 무수히 많은 저술과 담론들이 바로 생생한 토론 자료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갑신정변, 한일합병, 한국전쟁, 반민특위, 기타 등등, 어떤 주제가 됐든, 교사가 화두를 던져주고 학생들은 각자 최선을 다해서 조사하고 판단하도록 하는 것이 역사를 교육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자료를 얼마나 많이 뒤졌는지, 자료를 얼마나 잘 정리하고 요약했는지, 자료에 근거해서 자신의 주장을 어떻게 구축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과 품위를 가지고 있는지 등에 따라서 교사가 채점한다면 역사학이라는 학문의 형식적인 본질에 가장 부합한 교육이 이뤄질 것이다. 역사 교육이 그렇게 이뤄져야 대학에 가서도 문화적 충격을 받을 필요 없이 바로 고등학문의 진수를 음미할 능력이 배양될 것이다. 아울러 대학에 가서 사회과 전공을 하지 않을 학생들에게도 이와 같은 인문학적 소양을 중등과정에서 함양할 수 있게 해줘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의견이나 주장을 관용하는 가운데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정성과 균형 감각을 내면화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교육부가 원하는 내용만을 모아서 교과서라는 이름을 붙이고, 수능시험은 거기서만 나온다는 식으로 협박하는 짓은 소중한 우리 청소년들의 영혼에 상처만을 남기는 악행이다. 흑백 이분법을 강요당하면서 자라게 되면 권위에 맹종하든지 아니면 권위를 무조건 적대시하는 더 이상 야만적일 수 없는 패거리 구분에 사로잡히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명백한 이치를 교육부 관료들과 그 주변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하루라도 빨리 깨닫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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