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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사유하는 책

오늘날 대학의 지성은 없다. 대학은 자본 축적의 내적 메커니즘으로 포획되었으며 인문학 또한 상품이 되었다. 상징자본으로서 대학이라는 상품.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지음, 낮은산 펴냄)는 오늘날 상품화된 학문, 자본화된 지식과 다른 진정한 사유를 위한 지식과 학문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오늘날에는 심지어 철학조차 '사유 없음'의 세계에 지배당하고 있다. '사유 없음'은 비판 정신의 해체와 세계를 바라보는 인간적인 정서의 상실에 기초한다. 직업으로서 학문을 하는 자들은 현실의 냉정함을 이야기하면서 인문학적 비판 정신을 유토피아적 공상이라고 몰아붙인다.

그러나 이 책은 자본화된 지식, 상품화된 인문학을 넘어 인문학이 오늘날 어떻게 사유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사유함'에 있다. 이 책은 다양한 이론들을 늘어놓거나 사회 구조적인 개념 장치들을 통해서 현실을 분석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책은 인간의 삶에 대한 정서적 공감을 통해서 비판적 사유의 현실 비판적 능력을 발휘한다. 그것은 누구의 이론을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입을 통해서, 이론이 아니라 구체적인 개개인들의 삶을 통해서 말해진다. 따라서 이 책은 어렵지 않으며 문화인류학적인 섬세함을 통해서 진실을 드러내는 정서적 공감을 창출한다.

그렇다고 이 책이 이론적 토대 없는, 자기 배설적인 말들로 채워져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저자가 각 장의 뒤편에 덧붙이고 있는 '학습 노트'를 통해서 오늘날 이 시대의 문제들, 특히 신자유주의를 탐색하는 주요한 책들, 사유하기 위해 읽어야 하는 책들의 핵심들을 제공하고 있다. 그것은 아마도 저자가 독자들의 사유함을 위해 제공하는 또 하나의 서비스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들의 진정한 가치는 오히려 저자가 본문에서 전개하고 있는 '사유함' 그 자체에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사유한다는 것은 시대의 모순과 문제들을 천착하면서 비판적 능력을 발휘하며 대안적 실천을 모색한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책의 저자는 사유함의 방식을 통해서 신자유주의를 탐색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로 이 책이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오늘날 우리의 삶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법칙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정언명법이다. 마치 이기주의의 명제를 떠올리게 만드는 이 정언명법은 '더 이상 다른 세계는 가능하지 않다'는 대처의 슬로건 하에서 지속되는 신자유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냉정한 처세술이 내리는 결론이다.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카르페 디엠! 현재를 즐겨라

▲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엄기호 지음, 낮은산 펴냄). ⓒ프레시안
신자유주의는 남을 돌보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내가 주변을 돌아볼 때, 나는 낙오자가 된다. 오직 여기에는 적자생존의 법칙, 로버트 프랭크와 필립 쿡이 말하는 '승자독식의 법칙'만이 지배할 뿐이다. 여기서 "보편적이고 평범한 삶, 적당히 남에게 의지하고, 적당히 남과 더불어 살아가고, 적당히 독립적인, 그런 일반적인 인간의 삶"은 가능하지 않다. 실제로 이 책에 나오는 민철이의 사례는 이를 보여주고 있다. IMF 때 중소기업 사장이었던 아버지 회사가 부도를 맞아 파산한 이후, 그의 부모는 자주 다투다가 이혼을 했다. 이혼 이후 그의 가족은 끝없는 갈등과 자책 속에 놓이게 되며 가족은 더 이상 따뜻한 보금자리가 되지 못한다. 가족은 같이 살지만 이미 내적으로 해체되어 있었다. 경제 위기가 개인들의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예외가 아니다. IMF 이후 이런 식의 경제적 위기가 파괴하는 삶은 도처에 존재한다. 예를 들어 2003년 KT에서 명예퇴직을 당한 5500명이었는데, 재취업한 사람 중에 월급이 100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절반이 넘었고 퇴사 전처럼 300만 원 정도를 수입을 얻는 사람 4.2%에 불과했다. 또, 다섯 명 중 한 명은 창업을 했으나 현재 많은 음식점이나 가게들의 운명처럼 대부분 몰락의 길을 밟았다. 따라서 몰락은 오늘날 예외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정상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지금은 예외적인 극히 일부만이 탈락하고 망하는 시대가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이 언제든 예외가 되어버리는 그런 시대이다." "신자유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체제에는 '중간'이 없다." 따라서 이 책의 저자가 경고하듯이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극히 일부의 주변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자신에게는 여전히 소시민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다.

그러나 이런 경고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저자가 말하듯이 '자유'라는 이름으로 펼쳐지는 신자유주의적 삶은 인간의 감수성까지도 바꾸어 놓고 있으니 말이다. 경고는 경고일 뿐이다. 저자가 지젝의 말을 빌려 이야기하듯이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도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모르기 때문이 아니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동한다. 여기서 작동하는 '전도'의 메커니즘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욕망'에 포획된 탐욕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몰락에 대한 공포'이다. 뉴타운 공약이 지난 총선에서의 여당에 대한 지지를 만들어냈으며 '부자 되세요'가 이명박 대통령 후보를 당선시켰다. 그러나 이런 욕망은 욕망의 실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망하지 않으려는 욕망의 지평 위에서 작동한다. 실업자가 되지 않으려는 욕망, 중산층에서 몰락하지 않으려는 욕망, 이 사회로부터 버림받지 않으려는 욕망이 더 많은 소유에 대한 욕망을 생산한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은 원초적인 불확실성에서 오는 공포에 대처하기 위해서 "과학의 힘을 빌려" 발전시킨 "근대는 위대한 도약"이었다고 말하면서 르페브르의 말을 빌려 "우리의 시대 역시 공포가 가득한 시대"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국가는 시장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보호하기 위해 국민을 배제한다. 그리고 국가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 그러니 "카르페 디엠!(carpe diem), 현재를 즐겨라." 따라서 마샬 버먼은 "현대 에너지의 영광과 동력론, 현대적 분열의 파괴행위와 허무주의, 이 두 요소가 이상할 정도로 밀착되는 것"을 본다.

사유하지 않음: 진실에 대한 두려움

이 책의 저자 또한 오늘날 사유하지 않음을 교조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냉소주의와 연결시키고 있다. 그는 "사유를 방해하는 교조주의와 상대주의의 밑바닥에는 진실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그 진실 가운데 하나는 우리 사회가 봉합이 불가능한 불화와 적대에 기초해 있다는 사실"이라고 하면서 지젝의 냉소주의 비판을 빌려 "적대와 불화를 응시하는 데 두려움을 느끼는 우리의 마음은 확실히 냉소와 공포로 가득 차 있다."고 지적한다. 그 공식이 바로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공식이다. 그러나 이 진실은 피할 수 없다. 진실을 피하는 그 곳에서 우리의 몸과 사랑이 상품화된 자본의 증식 욕구에 포획되며 내 자신의 몸과 삶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진실에 대한 대면의 두려움은 신자유주의적 자유=무수한 선택의 자유를 '자유의 천국'으로 그려낸다. 그러나 이 선택은 대가를 지불한다. 그것은 자신의 몸과 사랑조차 하나의 상품으로 철저히 관리되어야 한다. 중산층 엄마들은 아이의 사회 자본 매니지먼트가 되며 아이의 삶을 관리하는 '헬리콥터 맘'이 되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실업계를 졸업한 여학생들은 "아름다워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성형을 해야 한다. 심지어 못 생긴 트랜스젠더 은영이의 사례에서 보듯이 성소수자 안에서도 육체는 하나의 상품으로 작동한다. 그리고 이런 몸의 상품화는 다양한 생명체를 자본화하는 '유전자조작생명체와 식품들'의 실험장이자 가공재료들로 변환된다.

오늘날 자본과 권력, 학문, 언론이 결합된 과학기술동맹의 폐해는 이미 황우석 사태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따라서 자본축적에 사로잡힌 신자유주의는 에리히 프롬이 말한 '소유양식으로서의 삶'을 일반화한다. 소유양식으로서의 삶의 본질은 탐욕이다. 소유는 자신이 가진 것들로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환원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곧 나의 존재 가치이다. 그러나 문제는 내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대상들은 언제든지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소유양식으로서 존재는 불안하며 항상 공포에 젖어 있으며 이를 무마하기 위해 더 많이 소유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적 삶은 이런 소유양식으로서의 삶을 일반화한다.

예를 들어 2005년 미국에서는 22만7000명의 새로운 금융백만장자가 탄생했다. 로버트 프랭크에 의하면 그들은 기업을 창업해서 팔아넘기는 기업매각이나 해지펀드, 사모펀드, 벤처캐피탈, 머니매니저, 최고경영자들이었다. 이들은 1억 달러가 넘는 5~6만 평짜리 호화 주택을 지었으며 개인용 비행기와 9억 원을 호가하는 시계 등 각종 소비열풍을 만들어냈다. 심지어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와 맞먹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언제나 자신의 현재 소득이 부족하다'는 불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이성을 깨우는 각성의 전략을 사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정서적 공감을 통해서 사유하기의 전략을 취하고 있다.

신자유주의적 자유를 넘어: 사유와 연대의 페다고지

정서적 공감을 통한 사유하기의 전략은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현재의 삶을 더 이상 누군가의 탓이나 개인적인 삶으로 돌리지 않는 현재의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에 기초한 사유와 실천이다. 이 책에 나오는 민철이는 어느 날 집 식구들의 어색한 자책감이 싫어서 다음과 같이 내뱉었다. "아니에요. 이 모든 것은 우리 잘못이 아니에요. 우리 가운데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이 말은 기적을 만든다. 그것은 자기 긍정의 가치를 창조하기 때문이다. 이런 자기 긍정은 다른 세계가 가능하다는 실천적 삶으로 발전하는 기본적인 출발점이 된다. 그것은 모든 자유를 개인의 책임과 개인적인 소유욕망으로 바꾸어 놓은 신자유주의적 삶을 넘어서는 새로운 자유의 패러다임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는 신자유주의와 다른 자유를 이야기한다.

"우리가 신자유주의로부터 배운 뼈아픈 교훈이 하나 있다. 그 자유는 결코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자유, 소유로부터 출발하는 자유일 수 없다는 교훈이다. 신자유주의 자유야말로 오로지 개인의 자유, 소유에 대한 자유로부터 출발한 근대 자유 개념의 극한이기 때문이다. (…) 자유는 개인이 소유하는 대상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존재이다."

저자는 이런 연대적 자유를 태국의 불교공동체 산티아고 속에서 찾는다. 산티아고 속에서 공동체는 그 안에서 함께 배우는 공동체이자 그 밖을 향해 개방된 가르침의 공동체이다. 따라서 여기서 연대는 단순한 타자의 인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들 속으로 나를 밀어 넣는 몸과 마음의 문제이다." 이를 위해 함께 대안을 찾아가면서 삶의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협력적 사유와 소통의 힘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이 저자가 주장하고자 하는 '사유와 연대의 페다고지'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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