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정·청의 이같은 움직임은 단순한 국면전환용 기획에 그치는 게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꾸준하게 준비돼 온 보수진영의 '역사 재해석'이 바탕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광복절이 다가오면서 '건국 이데올로기'가 새로운 이념대결의 장으로 부상할 조짐이다.
달아오르는 '역사전쟁'
31일 민주당 고위정책회의. 김재균 원내부대표는 "정부는 건국 60주년 기념사업위원회를 구성해 광복보다 건국의 의미를 기념하려 한다"며 "이는 중대한 문제"라고 했다.
그는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꾸자는 주장도 헌법 전문에 명시된 임시정부의 법통을 무시하는 반헌법적이고 반민족적 발상"이라고 비판한 뒤 "정부수립 60주년 행사에 민주당이 참여하는 게 맞는지 심각하게 고려해야 한다"고 '보이코트'를 주문했다.
우윤근 정책위부의장도 "정부여당이 대한민국 역사와 정체성에 관한 형편없는 인식을 드러낸 것"이라고 가세했다. 강창일 의원은 전날 개인 성명을 내고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하는 행위"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강창일, 우윤근 의원 등은 노무현 정부 당시 각종 과거사법안을 주도적으로 마련했던 의원들. 이들은 이명박 정부의 '건국 세리모니'의 배경에 뉴라이트 계열의 사관이 깔려있다고 본다.
실제로 지난 22일에는 뉴라이트 등 민간 보수 단체가 중심이 되어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기념 국제학술회의'를 이틀간 열었다. 이 자리에는 건국위원회의 공동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가 전야제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했다.
또한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기 이전인 지난해 11월 박효종 서울대 교수, 김영호 성신여대 교수 등 뉴라이트 계열 학자가 주축이 된 민간차원의 '건국 60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하기도 했다. 이들은 현재 정부의 건국위원회와 긴밀히 협조하여 각종 '건국' 관련 학술대회를 주도하고 있다.
이같은 뉴라이트의 활약을 배경으로 정부와 한나라당은 지난 4월 16일 대통령 훈령으로 '대한민국 건국60년 기념사업위원회의 설치 및 운영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여, 60개 주요사업에 대한 예산 279억 원을 확보했다. 이번 8월 15일 행사는 '대한민국 건국60년 및 광복63주년 중앙경축식'이란 명칭으로 치러진다.
청와대는 광복절을 앞두고 '우리가 만드는 대한민국'을 주제로 한 국민 아이디어를 공모 중이다. 또한 관련 사업으로 박정희 가옥 등을 사료 고증 통해 원형복원하고 역사교육 공간으로 조성하면서 등록문화재로 등록·보존하는 사업, 이승만 저서 간행 등이 준비되고 있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 강 의원은 "일부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이 친일청산을 부정하고, 이승만을 건국 영웅으로 만들려고 하는 등 국민 일반의 역사인식과는 동떨어진 차원에서 추진하던 것을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공식적으로 받아들여 추진하는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그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정부가 나서는 것은 상식에 맞지 않다"며 "이는 선조를 팔아먹는 짓이고 독립운동을 부정하는 발상이며, 진보-보수의 이념대결이 아니라 상식과 반상식의 이야기다"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건국 이데올로기', 왜?
정갑윤 의원의 '건국절 법안'도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의 주장과 맥락이 닿아있다. 일례로 2006년 7월 서울대 이영훈 교수가 <동아일보>에 '건국절을 만들자'는 칼럼을 썼던 일이 있다.
그는 이 칼럼에서 "1948년의 제헌이 2000년 국가 역사에서 처음으로 '국민주권과 신체의 자유'를 보장했다"며 "누가 이 나라를 잘못 세워진 나라라고 하는가. 누가 이 자랑스러운 건국사를 분열주의자들의 책동이었다고 하는가. 그런 망령된 소릴랑 훠이훠이 밤하늘로 물리치자. 그런 참람한 자들이 다시는 활개 치지 못하도록 한목소리로 외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사학계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1948년 8월 15일을 건국절로 인정함으로써 그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근대사에서 북한을 배제하고, 항일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며, 대한민국을 건국 60년의 신생국가로 만들어버리려 한다는 것이다.
또한 '건국 이데올로기'는 기본적으로 '위로부터의 민주화'에 정당성을 두고 있어 한국 현대사에서 일어났던 민주화운동을 상대적으로 축소시키는 효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진보사학계가 우려하는 대목이다. 보수 진영이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에 대항하는 정통성을 회복할 목적으로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의 도식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이다.
1919년에 세워진 임시정부의 헌법도 국민주권과 신체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영훈 교수 등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는 반론도 있다. 1948년 제정된 헌법도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법통은 임시정부에서 찾는 게 타당하다는 것이다.
이는 8.15를 광복절에서 건국절로 바꾸자는 법안이 위헌소 지가 있다는 주장과 연결된다. 강창일 의원은 "헌법 제3조는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라고 하여 한반도 전체를 우리 영토로 하고 있으므로 반쪽 정부가 아니라 통일정부 수립을 과제로 삼고 있다"면서 "헌법전문, 영토조항 및 통일지향 등 헌법 정신을 유린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반면 정갑윤 의원 측은 "건국 문제는 학계에서도 논란이 있는 문제로 위헌 소지까지 갈 것은 없다"면서 "'임시 정부 법통 계승' 문구가 주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이를 계승해서 결국 48년에 '건국'을 한 것이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전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 토대 위에 '건국절'이 있음을 분명히 하는 게 맞다"며 이같이 말했다.
그는 또한 임시정부의 헌법 역시 민주공화제를 표방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선 "1948년에 선포된 정부수립이 세계적으로 알려졌고, 실효적이었다"고 말했다. 임시정부는 말 그대로 '임시'였을 뿐이라는 논리다.
이에 대해 강창일 의원은 "그렇다면 고려가 원나라 지배 하에 있다가 공민왕 체제로 복귀한 것도 건국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냐"고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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