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의 크기, 장려함이 실로 한성 전 시가지를 압도하기에 족할 것이고, 그 규모와 설비는 일본 유수의 병원에 비해 손색이 없다."
1908년 대한의원 준공식에 참여한 일본인 기자의 소감이다. 대한의원이 자리한 마등산은 높지는 않지만 창경궁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 산 위에 대한의원이 세워졌다. 당시 서울에는 고층건물이 없었다. 궁궐을 제외하면 초가집과 기와집 일색인 시절이었다.
1908년 준공을 계기로 이제 서울 주민은 누구나 고개만 쳐들면 대한의원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그 의원의 규모나 설비는 일본의 어느 병원에 비해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평이었다. 한국이 '자랑할 만한' 병원이 세워진 것이었다.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구상
▲ 1905년의 통감부 개청 기념 엽서. ⓒ프레시안 |
그 중 의료와 관련된 구상도 있었다. 그는 기존에 있던 의료기관인 의학교, 광제원, 적십자병원을 하나로 통폐합하겠다는 구상을 발표하였다. 명분은 있었다. 규모가 작은 병원들이 분산돼 활동하기보다는 통합된 하나의 큰 병원을 세운다면 진료가 보다 효과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진료의 효율화였다.
이토 히로부미의 통합 구상은 기존 의료기관에 소속돼 있던 의료인에게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의학교 학생들의 경우 의학교가 폐지된다는 소문에 장기간 '정학'을 하였다. 의학교의 교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지석영은 새로이 설립되는 교육기관에서 일본어만이 사용된다는 점을 비판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당시 여론은 새로운 의료기관의 설립이 결국 일본인 의사 고용을 위한 방책이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 의심은 타당한 근거를 가지고 있었다. 1905년 광제원이 개편되는 과정에서 기존의 한의사들이 대거 탈락하고 그 자리에 일본인 의사들이 고용되었기 때문이다.
황실을 배제하라
▲ 대한의원 개원식 기념 엽서(원장 사토 스스무·1908). ⓒ동은의학박물관 |
조선 초기 설립된 의료기관인 혜민서와 활인서는 국왕들이 자신의 자혜로움을 전하는 통로였다. 적자(赤子)인 자신의 백성들이 질병에 걸려 신음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적절한 구제를 시행하지 않는 것은 국왕의 잘못이었다. 고종은 인정(仁政)의 시책들을 이어받고자 개항 이후 관제개혁 과정에서 폐지된 혜민서와 활인서에 대신해 적십자사병원을 설립했다. 따라서 적십자사병원에서 이루어지는 진료는 곧 대한제국 황실이 베푸는 시혜였다. 적십자사병원은 러일전쟁 이후 점차 약화하던 황제권을 강화하기 위해 고종이 시도한 다양한 노력 중의 하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진료의 효율화라는 명분 아래 바로 그 적십자사병원을 폐지하고자 하였다. 새롭게 새워지는 병원에 비록 '대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는 했지만, 그 병원은 대한제국의 중심이었던 황실과는 무관한 병원이었다. 통감부는 진료를 통해 군신 관계가 강화될 여지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을 지칭하며 "이번에 설립하고자 하는 병원은 한국 황실이 사회 일반을 위해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한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통감부의 입장에서 볼 때 한국에 대한 배타적인 지배를 위해서 우선 배격해야 할 대상은 황실이었다.
▲ 대한의원. ⓒ동은의학박물관 |
조선인이 빠진 창립 준비위원회
대한의원 설립을 위해 일본에서 의료계 원로인 사토 스스무가 초빙되어 '대한의원 창립 준비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취임하였다. 통감부 관리, 육군 군의, 적십자사병원 촉탁의사, 건축소 기사 등으로 근무하던 일본인들이 위원으로 가담하였다.
재무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는 30만 원에 이르는 막대한 건설 비용을 제공하였다. 이들은 이토 히로부미의 구상 아래 새로운 의료기관인 대한의원의 창립을 진행시켜 나갔다. 대한의원은 철저히 통감부의 구도 아래 설립된 병원이었다.
한국인 회유를 위한 대한의원
대한의원의 역할과 위상은 관제 반포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1907년 3월 반포된 대한의원 관제에 따르면, 대한의원은 의정부에 직속되었다. 원장은 내부대신이 겸임하였고, 치료부, 교육부, 위생부를 두었다. 치료부는 질병 치료와 빈민 시료, 교육부는 의사, 약제사, 산파 및 간호부 양성을 담당하였다.
위생부는 종래 경무국 위생과가 담당하였던 각종 위생 관련 업무를 이관 받아 처리하게 되었다. 의료의 담당 주체인 의료인에 관한 사무, 두창을 비롯한 전염병 예방과 위생청결에 관한 사무, 전염병 예방을 위한 검역 사무, 위생조직과 병원에 관한 사무 등 의료와 관련된 모든 사무들을 총괄하였다.
대한의원이 설립된 1907년, 아직 한국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었다. 통감부는 적어도 초기에는 점진적인 행정 개선을 통해 한국인의 거부감과 저항을 무마시키고자 했지, 무리하게 즉각적인 병합을 추진하지는 않았다.
대한의원은 그 통치 정책을 보조하는 기구였다. 의료는 한국인들에게 호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좋은 도구였다. 통감부는 대한의원에서 이루어지는 시술을 통해 한국인의 환심을 사고자 하였다. 한국인 환자에 대한 무료 진료나 저가 진료는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사토 스스무의 말을 빌리면, 대한의원의 우선적인 목적은 한국인 중 빈곤한 사람을 치료하는 데 있었다. 실질적으로 무료 치료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한 언론은 대한의원을 빈곤한 환자를 무료로 치료하고 입원시키는 자선병원이라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더구나 대한의원의 시술은 종래 한국인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서양의학에 입각한 전문 치료였다. 언론에는 중상을 입은 외과 환자에 대한 치료, 이비인후과 질환으로 고생하던 환자에 대한 치료, 안질로 고생하던 부인에 대한 치료, 종래 수치심으로 진료를 받지 못했던 여성들에 대한 부인과 치료 등 대한의원의 전문치료 기사가 게재되고 있었다.
대한의원이 한국인 회유를 통해 통감부의 지배를 원조한다는 점은 일본인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었다. 그들이 판단하기에 이토 히로부미가 대한의원 창립에 진력한 이유는 한국인에게 당근을 주기 위해서였다.
러일전쟁 이후 본격화된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여 전국적으로 의병전쟁이 일어나고 있었고, 일본은 군대 파견을 통해 그들을 진입하고 있었다. 일종의 채찍이었다.
이런 강경책을 보완하는 회유책으로 통감부는 대한의원을 통한 한국인 진료를 선택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대한의원의 "발전이 한국 경영에 일조할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일본인을 위한 병원
그러나 그 진료는 일부 한국인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대한의원 건립 이후 인구 대비 이용률을 보면 대한의원은 오히려 일본인을 위한 병원이었다. 1910년을 기준으로 볼 때 일본인의 18.9%가 대한의원을 이용한 반면 한국인은 0.5%만이 대한의원을 이용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의사들이 주로 일본인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한국인들이 일본인 의사에게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전달하기는 어려웠다. 나아가 진료비가 고가였다. 가난한 사람에게는 무료 치료가 이루어졌지만, 일반인에게 대한의원의 진료비는 비쌌다. 친일파인 이완용이나 국왕의 친척인 이윤용 정도는 되어야 이용할 수 있었다.
▲ 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졸업생 이관호(왼쪽), 의학진사라는 표시가 들어있는 광고지(오른쪽). ⓒ동은의학박물관 |
자혜의원의 설립
대한의원이 담당했던 한국인 회유를 지방 차원에서 진행한 기관이 자혜의원이었다. 1909년부터 설치된 자혜의원은 식민 지배가 시작된 1910년 13개로 증가하였다. 전국 각 도에 1개씩의 자혜의원이 설치된 것이었다.
자혜의원은 대한의원과 마찬가지로 한국인에 대한 무료 혹은 저가 치료를 시행하였다. 중앙에 대한의원, 지방에 자혜의원을 설치하고, 그곳에서 한국인에 대한 치료를 시행함으로써 일본은 자신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감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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