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기념사업회는 지난 6일 제1회 전태일청소년문학상을 선정하기 위한 백일장을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중고교 학생들 70여 명이 참석한 이날 백일장에서 시, 소설(꽁트), 생활글, 독후감 부문별로 각각 4편의 글이 수상작에 올랐다.
이 중 이주노동자를 대상으로 한글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는 여선생과 한 이주노동자 간의 교감, 나아가 법과 제도로 인한 유대 관계의 단절을 간결한 문체로 잘 드러낸 "눈물젖은 시개"(소설부문)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에 〈프레시안〉은 이 행사를 주최한 전태일기념사업회와 작품을 쓴 부산 장안제일고 2학년 김건형 군의 허락을 받아 전문을 싣는다.〈편집자〉
***1.**
점점이 가로등 불빛의 주광색이 흩어져 있다. 낮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도시. 정말로 내가 수십 년을 살아온 도시가 맞긴 한걸까? 예전엔 미처 몰랐던 모습. 밤의 자락에 덮인 도시는 너무나 낯설었다. 달빛 한 줌이 이 어둠을 모두 밝혀내기엔 미약한 모양이다. 골목집의 불빛들도 모조리 잠에 취해 있었다.
또각또각. 발소리가 공허하게 빈 골목을 울렸다. 하이힐을 괜히 신었나? 발이 조이는 느낌이다. 신발을 좀 느슨하게 만들려고 몸을 숙였다. 터벅터벅. 누군가의 발소리. 뒤를 돌아보았다.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저 언저리. 얼굴도 몸도 까만 어둠 속에 숨기고 있다. 자세히 보이진 않아도 분명 사내다. 후줄근한 옷가지. 덜컥 겁이 났다. 깜깜한 어둠 아래 나와 저 이상한 남자뿐이라니. 얼른 달아나야 한다.
하지만 하이힐은 내 맘처럼 속도를 내주질 않는다. 젠장 앞으론 절대 안 신어.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그가 따라온다. 발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이제 10여 미터를 남겨두고 있다. 이런, 어쩌지. 뛰었다. 겁이 나서 심장이 쿵쾅거렸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신발을 벗어들었다. 눈앞에 편의점이 보였다. 살았구나 싶어 달려 들어갔다. 점원이 놀란 토끼눈을 하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맙소사. 사내는 유유히 이리로 걸어오는 게 아닌가. 어쩌지? 어쩌지? 그가 문을 열고 나를 쳐다보면서 가까이 다가온다. 검은 얼굴, 수염, 외국인이다. 뭐야? 저 찌그러진 손목시계는.
"아저씨, 어, 디스 한 개 주세요."
어눌한 우리말로, 그는 꾸깃한 돈을 내밀어 담배를 받아들고 나갔다.
***2.**
"그럴 리가요, 신부님. 전 못해요."
"혜연씨 아니면 누가 있어? 우리 성당에서 혜연 씨가 유일한 거 알면서 그런다. 잠시만이야. 사람 구할 때까지만. 응? 좋은 일 하는 거잖아."
"그래도…. 제가 할 수 있을지…."
신부님이 싱긋이 웃으며, 내 손을 잡아 쥐었다. 그것으로 이야기는 끝난 셈이다. 돌아서서 한숨을 푹 쉬었다. 뭐, 어쩔 수 없지. 서점가서 교재나 골라봐야겠다.
후아. 심호흡을 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성당 한 쪽을 빌린 교실. 10여명의 사람들, 사내들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 후훗, 내가 선생님이라니. 저 이방의 낯선 남정네들이 깍듯이 인사하는 모습에 살짝 웃음이 나왔다. 신부님의 부탁이기도 하지만 재미있을 것 같기도 하다. 유일하게 신도들 중에 국문과 출신이라는 이유로 나는 임시 한글학교의 선생님이 되어 버렸다. 신부님께서 다들 한국에 제법 오래 살았지만 제대로 배우지는 못했으니 좀 가르쳐달라고 하신 것이다. 앞으로 어찌 수업을 해야 하나. 그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욱신거려 온다. 뭐, 일단 첫날이니까 서로 통성명이나 하지 뭐.
다들 똑같이 생긴 모습이라 자기소개를 하는 동안 얼굴을 익히려고 노력했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그들의 이름 앞에서 새로운 묘안을 찾아냈다. 그들에게 한국어 이름을 만들어 주기로 했다. 강물님, 단풍님, 바위님…. 아무리 생각해봐도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재밌다고 좋아해주었다.
"나무님."
나무라고 내 맘대로 이름 붙인 사람이 일어섰다.
"네, 여기요. 받으세요."
복사한 한글 교습서를 건네주려는 순간, 그가 혼자 킬킬거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싱겁긴. 무심코 다음 사람으로 넘어가려다 다시 그를 보았다. 여전히 그는 킥킥거리고 있었다. 누군지 기억났다. 며칠 전 그 밤, 오밤중에 미친년처럼 손에 신발 들고 뛰게 만들었던 그 사람. 그 달밤의 촌극을 본 사람이었다.
"네, 이것으로 오늘 수업을 마칠게요. 다음주까지 힘들어도 자음, 모음을 외워오세요. 수고하셨습니다."
그 '나무'라는 사람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허둥지둥 가방을 챙겼다.
"선생님."
고개를 들어보니 예의 그 나무였다. 도대체 뭐가 어찌된 건지,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앞에서 자판기 커피를 들고 서 있었다. 별로 가르친 것도 없는데 보답한다나 뭐래나.
"그런데, 선생님. 어제 어제(그저께) 왜 나보고 뛰어가요?"
"예?"
"왜 한국 사람들. 우리만 보면 보기 싫어하면서 멀리멀리 도망가요? 선생님도 그래요? 어제 어제?"
어찌 이 남자에게 그 날 밤일을 설명해야하나. 이런…. 외국인이라서, 그래서 도망간 건 아닌데. 혹시 상처받은 걸까? 그 긴 사정을 알아들을 수 있을는지. 난감하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요. 나무님. 그 날은, 그러려던 게 아니라…. 정말 미안해요."
그는 다시 나를 보며 킥킥거리더니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나무'는 그 날부터 훌륭한 학생이 되었다. 매번 토요일 오후에 열리는 수업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숙제도 다 해오고 발표도 열심이었다. 수업 전과 후에 프린트물과 자료 정리하는 것을 매번 도와주곤 했다. 매번 한 턱 낸다면서 사주는 것은 고작 자판기 커피 한 잔이었지만, 그가 사주는 것은 언제나 달고 맛있었다. 다른 때 같으면 살찐다고 입에도 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3.**
그렇게 여름이 흘렀다. 제법 회화도 늘고, 글씨 실력도 늘어난 학생들을 보며 괜히 뿌듯했다. 그런 마음에 나는 학생들에게 시험을 한번 쳐보는 게 어떨까라고 제의했다. 다들 시험이라면 싫다고 소리소리 질렀지만, 백점 받으면 선물을 주겠노라고 하며 설득시켜 버렸다. 백점이라곤 했지만 내심 학생들에게 고마워서 과자며 노트를 잔뜩 샀다. 간단하게 시험 문제도 만들어 갔다.
그런데 시험 직전까지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는 학생들 사이로 나무가 보이질 않았다.
"나무님, 어디 가셨죠?"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매번 빠지질 않던 그가 무슨 일일까?
"아무도 모르세요?"
문득,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나무님, 왜 안 오신 거죠?"
어느새 목소리가 떨려서 나왔다. 나무를 알던 학생들과 함께 그가 일하던 공장으로 갔다. 조립식 건물에 시끄러운 소음과 철가루만 날리는 곳.
공장장이라는 자는 나무의 사진 앞에 모른다고 고개만 저었다. 뭔가 이상했다. 공장장이 멀리 가버리자, 옆에서 일하고 있던 한 외국인 노동자가 귀띔을 해주었다. 일하면서 공부하느라 책에 한 눈을 팔다 팔이 빨려 들어가 다쳤다고. 피를 흘리며 병원으로 실려 갔다고. 겨우겨우 수소문 끝에 그가 있다는 병원을 찾아갔다.
"나무씨!"
작달만한 병원 침대에 기대 누워있던 그가 눈을 떴다.
"선생님!"
그는 왼팔 가득히 붕대를 감고 있었다. 팔은 붕대에 파묻혀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 나의 눈길을 보던 그가 오히려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세요."
그의 말에 왈칵 울음이 나와 버렸다. 누가 죽은 것도 아닌데 뭐가 그리 서글펐을까. 나무가 당혹해할 만큼 펑펑 울고서야 시험의 상품이었던 노트와 과자 한 더미를 내려놓았다.
"어? 저 백점 아니에요."
"괜찮아요. 내 맘이죠. 난 나무 선생님이니까요."
예의 그 웃음. 그가 다시 한번 킥킥거렸다. 다음날, 나는 다시 선물을 사들고 정식으로 병문안을 가기로 했다.
"나무!"
하고 문을 열었으나 침대는 비어 있었다. 응? 어딜 간 거지.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 그 사람요? 불법체류자였어요. 자세한 건 모르지만 아마 출국조치 당했을 꺼예요."
빙글. 어지러워서 침대에 걸터앉아버렸다.
"그런데, 김혜연 씨세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니 간호사는 뭔가를 내밀었다.
"그 분이 주시라고 하더라구요. 어제 밤에."
편지? 후다닥 봉투를 열어 읽어 내려갔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저는 고향으로 가야 합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선물도 같이 보냅니다. 제 딸이 준 시개입니다. 고장 나서 시개가 안 좋지만 소중한 시개입니다. 선생님, 고마웠습니다."
선생님. 그 말을 음미하며 봉투를 기울였다. 그 찌그러진 시계가 나왔다. 멈춰버린 나무의 시계. 금이 간 시계 유리에 습기가 차 있었다. 눈물이 스며든 건가? 그의 눈물이? 눈물 젖은 시계.
그 소중한 보물을 영원히 손목에 차고 다닐 것 같았다.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