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장님이 코끼리 더듬는 격이나…
출구전략(exit strategy)이란 경제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시행된 재정·금융상의 확장정책을 평상시 정책기조 또는 긴축정책으로 전환하는 것을 말한다. 과도한 확장정책이 경기회복 차원을 넘어 경제 전반의 인플레이션 압력을 가중시키거나 일부 자산시장의 버블을 초래하여 또 다른 위기를 잉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출구전략 논란의 배경은 간단하다. 최근 각종 국내외 경기지표가 빠르게 개선되고 있고, 투자심리는 경기지표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호전되어 부동산·주식 등의 자산시장에서 또다시 버블이 만들어지는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강남의 재건축 아파트 호가가 2006년 말의 전고점을 돌파했다느니, 그동안 박스권으로 간주되던 코스피 1400선의 천정이 뚫렸다는 등의 자극적인 뉴스가 연일 보도되고 있는 것이다.
솔직히 고백하겠다. 비록 필자가 경제학 교수이기는 하나, 경기전망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다. 더구나 경제학자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많이 틀리는 것이 경기전망이라고 자조하는 평소 필자의 생각 때문에 경기전망 및 이와 관련한 거시안정화정책에 대해 언급하는 것은 최대한 자제해 왔다. 필자가 떠들어 봐야 결국 쓰레기 더미에 오물봉지 하나 더 투척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작금의 출구전략 논란도 마찬가지다. 한국경제 또는 세계경제가 언제 회복될지, 일시 회복된 이후 다시 침체에 빠지는 더블딥(double dip)의 위험이 어느 정도나 되는지 등에 대한 소위 전문가들의 의견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도 장님 코끼리 더듬는 격이라는 느낌뿐이다.
하지만 필자 역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동서고금의 진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출구전략 논란에 대한 최근 정책당국의 공식 입장, 특히 논란 자체를 잠재우려는 듯한 27일 대통령의 단정적 발언에 대해서는 한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출구전략에 대한 여러 가지 오해와 왜곡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이명박 대통령이 27일 직접 나서 "출구전략은 시기상조"라는 입장을 밝힘에 따라 그야말로 논란의 '출구'를 닫아버렸다. ⓒ청와대 제공 |
한 번에 금리 2%p 올리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출구전략의 핵심은 뭐니 뭐니 해도 금리인상이다. 금리인상? 이게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기업과 가계 부문의 과잉부채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서, 금리인상은 부채상환 능력을 떨어뜨려 경기회복세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 더구나 정책금리의 결정은 한국은행의 고유권한으로서, 제3자가 왈가왈부하는 것 자체가 한국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출구전략의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는 분들이 흔히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마치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한꺼번에 대폭 인상하는 것처럼 전제한다는 것이다. 현재 기준금리는 2%다. 사상 유례가 없는 저금리다. 한편, 위기를 극복한 이후의 정상금리 수준은 어느 정도나 될까? 필자로서는 정말 자신 없는 문제이지만, 그냥 4% 언저리로 가정(!)해보자.
그러면, 출구전략의 가시화 주장, 즉 금리인상 주장이 지금 당장 한국은행의 기준금리를 2%에서 4%로 한꺼번에 조정하자는 말이겠는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세상 어느 나라 중앙은행도 그런 식으로 금리를 조정하지는 않는다. 기준금리는, 어린아이가 아장아장 걸음걸이 하듯이(Greenspan's baby step), 한 달에 0.25%p씩 조정하는 것이다. 2%에서 4%까지 2%p의 기준금리 인상을 위해서는 최소 8달 이상이 걸린다. 가다가 상황 보고 쉬어갈 수도 있다. 문제는 최초의 0.25%p 인상을 언제 시작할 것이냐는 것이다.
중앙은행의 금리정책이 갖는 중요성은 유동성에 미치는 실체적 효과에 못지않게 정책당국의 의지를 시장에 전달하는 신호 효과(signaling effect)에 있다. 매우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필자의 '무식용감'한 판단으로는, 현 상황에서 0.25%p의 기준금리 인상이 겨우 살아나는 경기회복의 불씨를 꺼뜨리는 부정적 효과는 그리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 그렇지만, 과잉유동성이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자산시장의 버블을 만들어내는 것을 좌시하지는 않겠다는 정책당국의 의지를 보여주는 효과는 매우 크리라고 생각한다.
이명박 대통령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였듯이,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경기회복이 빠르다"면, 출구전략의 구사도 빨라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다른 나라 중앙은행들이 금리인상을 시작한 다음에 뒤좇아 가겠다는 전략이라면, 너무 늦는 것 아닐까? 다른 정책은 다 선제적으로 하면서, 왜 출구전략은 선제적으로 하지 못하는가?
더블딥 대비 위한 룸이 필요하다
지난 주 미국의 다우지수는 9000선을 넘어서며 작년 9월 리먼브리더스 파산 사태 직전의 주가수준을 회복했다. 올 3월 한때 6470선까지 떨어졌던 것을 감안하면 놀라운 상승세다. 대표적 비관론자였던 루비니 교수 등도 '최악의 상황은 지났다'고 평가할 정도로 시장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물론 미국경제와 세계경제의 회복세를 장담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미국의 상업용 모기지론의 부실이 심상치 않고, 고용시장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는 등 여전히 불확실성이 가득하다. 한마디로, 더블딥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세계경제의 부침에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한국경제로서는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출구전략 시기상조론의 주요 논거이다.
맞다. 세계경제의 더블딥 가능성에 대해서는 필자도 동의한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0.25%p씩 한두 차례 인상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역시 조심스럽지만, 필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거꾸로 생각해보자. 만약 세계경제가 더블딥에 빠진다면, 그때 한국정부는 어떤 정책수단으로 대응할 것인가? 한국은행은 지난 2월 이후 6개월째 2%의 기준금리를 유지하고 있다. 물론 미국이나 일본 등은 제로금리를 시행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물가상승률과 환율 동향, 그리고 국내외 금리차 등을 감안할 때 2%의 기준금리는 더 이상 인하할 여지가 없는 최저금리 수준이다. 내리고 싶어도 더 내릴 수가 없다는 말이다.
한편, 단기 안정화정책의 또 다른 축인 재정정책은 어떤가? 올해 재정적자 규모는 GDP의 5.3%에 이를 전망이고, 그나마 상반기에 올 지출예산의 60%를 쏟아 부었다. 올 하반기와 내년에는 재정정책으로 경기를 떠받칠 여력이 전혀 없다는 뜻이다. 재정정책은 경기대응책으로서의 탄력성을 상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진짜 세계경제가 더블딥에 빠진다면, 한국경제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아니면, 산업은행 등의 금융공기업을 동원한 유사 공적자금과 관치금융이 판을 칠 것이고, 그 후유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가까운 시일 내에 한국은행이 0.25%p씩 한두 차례 기준금리를 인상하는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인플레이션 및 자산버블 압력에 선제적으로 대응한다는 의미와 함께, 필요시 금리를 다시 인하할 수 있는 룸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있다. 금리정책은 올릴 때 올리고 내릴 때 내려야 정책수단으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금리정책은 한 달에 한 번씩 정책의 방향을 재검토·수정할 수 있는, 미세조정(fine tuning)을 위한 유일한 정책수단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정책조합의 폭을 넓혀야 한다
필자가 보기에, 출구전략 시기상조론의 가장 설득력 있는 논거는,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써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시중에 유동성이 과잉되어 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는 그 문제점이 일반적인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현재화된 것은 아니고, 강남의 부동산시장 및 주식시장 등의 일부 자산시장에서만 버블 조짐을 보이는 것일 뿐이며, 그것도 가격 상승기조가 계속될 것으로 확언할 수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해당 자산시장을 직접 타겟팅(targeting)하는 선별적 정책수단으로 대응할 수 있는 문제를, 금리인상이라는 핵폭탄을 터뜨려 죄 없는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다는 논리다.
정확한 지적이다. 자산시장, 특히 부동산시장의 버블이 문제라면, LTV·DTI 등 금융기관의 부동산담보대출 관련 규제를 강화하거나, 불로소득 환수를 위한 부동산 관련 세제를 손질하면 될 일이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적·정책적 현실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부동산 관련 정책은 가장 이념적인, 따라서 합리적 토론을 통해 생산적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한 영역이 되어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버블을 진정시킬 수 있는 정책이 적절한 타이밍에 엄정한 의지를 갖고 시행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하기는 어렵다.
한편, 27일 라디오·인터넷 연설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보다 회복세가 빠르지만, 성장의 혜택이 서민들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당분간 확장기조를 지속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금융적 완화정책을 과도하게 오래 끌고 감으로써 자산시장의 버블 내지 인플레이션 압력을 방치하는 것이야말로 서민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최악의 정책이다.
진정 서민들에게 경기부양책의 혜택이 돌아가게 하려면, 취약계층을 직접 타겟팅하는 선별적 재정정책을 써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항구적 감세정책과 토목건설 위주의 지출정책을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재정의 측면에서 선별적 수단을 사용할 여지를 없애버렸다. 필자가 보기에, 이명박 대통령이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을 핵심으로 하는 출구전략 논란에 종지부를 찍고자 한 것도 이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즉, 선별적 재정정책의 룸이 사라진 제약조건 하에서 확장적 금리정책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에 직면한 것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재정정책 기조 하에서 정부가 할 수 있는 것은 저금리를 유지하는 것 뿐이다. 그 장기적인 비용이 아무리 크더라도….
강조하건대, 금리인상이 출구전략의 전부는 아니다. 금리인상 여부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서 결정해야 할 매우 민감한 사안이다. 그러나 다른 정책수단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상태에서 저금리 정책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 현 상황에서 선별적 정책수단의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는 주장은 정당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소폭의 금리인상이라는 일반적 정책수단을 통해 정책조합(policy mix)의 선택의 폭을 넓혀야 한다.
출구전략도 일방통행인가?
27일 대통령의 라디오·인터넷 연설이 끝나자마자 한국금융연구원은 '출구전략은 시기상조'임을 강조한 올 하반기 경제전망 보고서를 내놓았다. 타이밍이 기가 막히게 맞아떨어진 것은 오비이락일 거다. 하지만, '씽크탱크가 마우스탱크로 전락했다'라는 전임 연구원장의 우려가 다시금 뇌리를 스쳐간다.
대통령이 출구전략 논란에 종지부를 찍었는데,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어느 정부기구 또는 어느 국책연구원이 이 문제를 다시 꺼낼 수 있을 것인가? 민간 기업연구소도 별 차이 없을 것이다.
필자가 미적미적하면서도, 오늘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 문제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고 결심한 유일한 이유가 이것이다. 출구전략에 대한 생각이야 각자 다르겠지만, 논란 자체가 사라져서는 안 된다. 그것이야말로 출구를 봉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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