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사법제도 개혁의 방향
제1절 재판제도의 두 형태
현대 지구상에서 문명국가라면 사실상 모두 유럽에서 비롯된 사법제도를 도입해서 시행하고 있다. 변호사, 검사, 판사로 구성되는 재판방식, 항소제, 적법절차의 강조, 죄형법정주의, 미란다 원칙, 영장제도, 기타 등등, 사법을 구성하는 수많은 원리들이 서양에서 개발된 것을 도입한 결과이다. 그런데 서양의 사법제도는 영미식 보통법(common law) 체계와 유럽대륙식 대륙법(civil law) 체계로 크게 나뉜다. 우리 사법제도는 일제강점기를 통해서 성문법체계가 근간을 이룬 후 기나긴 독재 시대를 지나는 동안 사법이 권력의 하수인으로 봉사했던 관행이 법과 관련된 직업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주도적인 문화로 자리 잡은 탓에, 보통법 체계에는 별로 관심도 기울여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관심을 기울이더라도 그 차이가 얼마나 발본적인지를 이해하는 사람이 드물다.
보통법이라는 문구는 영국의 사법체계와 법관념을 가리키므로 영미법이라고 번역되기도 하고, 대륙법은 대륙의 사법체계와 법관념을 가리키는데, 둘 다 맥락적인 용어이기 때문에 한국어로는 어떻게 번역해도 번역어만으로 의미가 전달될 수는 없다. 중세 영국에서는 지방의 영주들이 사법권을 행사했는데, 이 때문에 지방 사이에 원칙과 적용이 크게 다르게 되었다. 이처럼 지방 사이의 차이가 소송의 주제로 등장하는 경우를 해결하기 위해서 상급심으로서 순회 재판이 이뤄졌는데, 이 재판들은 지방간에 공통되는 원칙(common law)을 지향했다. 그리고 더 넓은 지역에 공통되는 원칙일수록 더 높은 원칙으로 간주되었다. 당연히 이런 차원의 원칙은 기존의 법전에 문서로 적힌 것이기 보다는 목전의 사례를 가능한 한 공정하게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발견되고 생성되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판례들 사이에서도 차이와 충돌이 나타나면서 다시 과거 판례들 중에서 공통되는 원칙을 찾아야 할 필요도 생겼다. 이것은 개별 사례에서 언제나 필요한 일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공통적인 원칙들을 문서로 정리한다는 발상 자체가 무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보통법이란 영국법의 이런 전통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미국으로 건너간 앵글로색슨 이주민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이 전통이 이어졌다. 그리고 유럽대륙의 성문법 체계와 대조해서 영미법을 가리키는 대표 명칭으로 굳어졌다. 한국어로 통상 대륙법이라고 옮기는 용어는 영어로 civil law로서 문자로만 보면 시민법 정도가 되겠지만, 가장 중요한 차이는 문서로 된 법전에 사회생활의 주요 규칙을 망라해서 정한다는 발상에 있다. 바로 1804년 나폴레옹 법전이 이런 발상의 결정체(結晶體)로 나타났다. 앙시앙 레짐에서 교육받은 판사들을 믿을 수 없었던 계몽주의자 몽테스키외의 표어 "판사는 법의 입에 불과하다"는 관념이 구현된 결과였다. 나폴레옹은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법전편찬을 흉내 내면서, "프랑스인의 시민법전"(Code civil des Français)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래서 이 법전의 내용만이 아니라 바탕을 이루는 발상의 형태까지 물려받게 되는 대륙법 체계가 civil law라고 일컬어지는 기원을 제공했다. 고대 로마인들은 자신들이 개명된 도시의 시민이라는 취지에서 시민법(civil law)라고 불렀다. 로마법 자체는 내용상으로 대륙법에게 전해진 만큼이나 영미법에도 전해졌다. 단, 법전에 기본원칙을 정하고 판사들은 그대로 따르면 된다는 발상은 로마법과 상관이 없이 근대 계몽주의의 야심과 오만을 반영하는 것으로, 대륙법적 사고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보통법과 대륙법의 차이는 여기서 본격적으로 다룰 수 있는 주제가 아니다. 단, 재판제도의 차이를 논의하기 위해 필요한 배경만을 위에 제시한 것이다. 보통법 체계의 재판은 당사자주의(adversarial system, 또는 accusatorial system)라고 하고, 대륙법 체계의 재판은 직권주의(inquisitorial system)라고 한다. 한국에서 법률을 전공한 사람들 가운데 대륙법 체계의 법관념에 깊게 빠진 이들은 흔히 당사자주의를 민사재판의 원리로 보고 직권주의를 형사재판의 원리로 보는 정도로 구분하는데, 사법의 한국적인 관행을 저렇게 구분할 수는 있겠지만, 한국 민사재판의 당사자주의가 보통법의 당사자주의와 같은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 절에서 논의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일단 차이가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는 형사재판의 방식만을 살펴본다.
모든 재판은 두 가지 판단, 사실에 관한 판단과 법률에 관한 판단으로 이뤄진다. 보통법에서는 사실에 관한 판단을 피고인과 급이 비슷한 사람들(peers)인 배심원단에게 맡기고 판사는 법률적인 판단만을 담당한다. 사실에 관한 판단이란 어떤 일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관한 확인만이 아니라, 그 일이 "살인"인지 "과실치사"인지 "절도"인지 "권리침해"인지 "정당방위"인지 "도발행위"인지 등을 판단하는 것이다. 모든 형사사건에서 이것은 유죄와 무죄를 가르는 결정적인 판단인데, 이것을 피고인과 급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맡긴다는 것은 곧 공동체의 상식에 따라 무엇이 범죄인지를 가늠하겠다는 얘기다. 전통적으로 배심원단은 통상 12명으로 구성되고 평결은 만장일치로만 가능하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토론을 한 후에도 유죄 또는 무죄로 만장일치가 끝내 이뤄지지 않는다면 재판은 무효가 되고 원고 측은 다시 소송을 시작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부분적으로 10 대 2 정도의 다수 평결을 허용하기도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최소 여섯 시간 이상의 토론을 거쳐야 하도록 엄격한 요건이 있다.
보통법에서 형사재판은 경찰과 검찰이 어떤 피고에게 건 혐의가 사실인지를 법정에서 다투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검사가 기소한 내용을 피고가 인정한다면 재판은 배심원이 필요 없이 단순히 판사가 형을 선고하는 것으로 끝난다. 피고가 기소 내용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배심 공판이 열리고, 공판정에서는 검사의 주장에 맞서서 피고가 자신을 변호하는 방식의 논쟁이 벌어진다. 그 논쟁을 배심원들이 지켜본 다음 어느 편이 상식에 더 부합한지를 결정해서 평결(評決, verdict)이 내려진다. 이 과정에서 판사는 실체적 진실을 밝혀낸다는 목적에 비춰서 공정한 심판의 역할을 수행한다. 다시 말해 진실의 내용을 구성할 요소들은 양쪽 당사자들이 서로 자기에게 유리한 부분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상대의 허점을 공박하는 와중에 드러나도록 하고, 이런 잡다한 요소들을 절차적 공정성을 통해서 여과함으로써 인간적으로 상식의 한도 한에서 가능한 끝까지 진실을 찾아내는 데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이다.
절차적 공정성이란 공판정에서 공방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수사 과정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그러므로 영장 없는 체포, 수색, 압류는 모두 절차적 공정성을 위배했기 때문에 인정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수집된 자료들은 애당초 증거로서 인정되지 않는다. "해서는 안 된다"는 훈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증거능력을 아예 배제함으로써 수사관들로 하여금 절차적 공정성을 무시할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다. 용산 참사와 관련해서 우리 경찰 및 검찰뿐만 아니라 법원이 보여주는 행태를 보면 아주 좋은 대조가 나타난다.
용산 참사에 관한 쟁점의 핵심은 사람들이 왜 죽었는지, 불이 왜 났는지, 경찰이 그런 방식으로밖에는 진압할 방법이 없었는지, 등이다. 그런데 검찰은 화인을 특정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농성자 가운데 몇 명을 대충 지목해 과실치사 혐의로 기소했다. 일단 정황상으로 농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화염병에서 불이 시너로 옮겨 붙었을 개연성이 없지는 않기 때문에, 검찰로서 그렇게 주장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 2009년 1월 20일 새벽에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직접 보지 못한 검사나 판사, 그리고 공동체의 이웃들로서는 증언과 물증을 수집하고 여과한다고 하는 간접적인 방식으로 실체적 진실을 재구성할 도리밖에 없다. 따라서 어떤 경우 불확실성이 남더라도 그럴듯한 다른 시나리오가 없다면 엉성한 상태에서나마 사실을 확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야 판결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때 언제가 그때인지, 다시 말해 개인들을 범죄자로 판정할 때 어느 정도로 엉성한 불확실성을 용인하고 넘어갈 것인지를 누가 결정할 것인가? 직권주의에서는 그것을 판사가 일방적으로 결정하는데 반해, 당사자주의에서는 피고에게 "합당한 의혹"을 제기할 여지가 남아있지 않을 때까지 반론의 기회를 준다는 점이 핵심적인 차이다. 우리나라의 법률전문가들 가운데는 "일방적으로"라는 말에 기분이 나빠질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지만, 예컨대 석궁교수 사건에서 피해자가 증거로 제시한 옷에 묻은 피가 피해자의 것이 맞는지 검증하자는 변호인의 요구도 판사가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인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 「대한민국 사법부를 향해 석궁을 쏘다」).
잠깐 보통법 체계에서 대단히 중요한 절차적 원리를 담고 있는 용어 몇 가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고발, 고소, 공소 등, 혐의를 거는 데에는 "합당한 의혹"(reasonable doubt)이 있는 수준이면 족하다. 용산 참사에서 농성자들의 화염병 때문에 불이 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의 범위 안에서 합당한 의혹으로서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러나 의혹으로서 합당하다는 말은 그것이 그대로 사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상대의 범죄를 확정하기 위해서는 의혹만으로는 부족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합당한 의혹의 여지가 없는"(beyond reasonable doubt) 수준까지 기소한 측에서 자신의 입장을 증명해야 한다. 범죄사실에 관한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이 검사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때 변호인 측에서는 실제로 일어난 일에 관해 검사가 제시한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나름대로 증거를 갖춰서 제시해도 되지만, 그래야 할 필요는 없다. 변호인 측에서는 검사가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합당한 의혹을 제기하는 것만으로 무죄 평결을 받기에 충분한 것이 보통이다.
용산 참사의 예에서 나는 경찰이 왜 시신을 서둘러 부검했는지에 관한 의문을 떨칠 수가 없다. 보도를 보니 대답이라는 것이 고작 "신원확인을 위해서"였다는데, 그 대답은 나를 더욱 더 큰 의심으로 이끌 뿐이다. 내가 아는 한, 신원확인을 위해서는 지문, 치아, 혈액형, 또는 DNA 등이 필요할 뿐이지 사체를 해부할 필요도 없고, 해부한다고 신원이 더 잘 확인될 까닭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원확인을 위해서 부검이 서둘러 이뤄졌다"는 해명이 불러일으키는 의혹은 합당한 정도를 넘어서 필연적인 의혹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의심을 할 수도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의심을 하지 않으면 이상한 정도라는 뜻이다. 이 의혹을 제기하기 위해서 내가 부검이 왜 이뤄졌는지에 관한 정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의혹은 단지 실체적 진실을 파헤치려면 어디를 파고 들어야 할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실마리일 뿐이다.
보통법 체계를 대표하는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재판에서 어떤 판결이 나올지는 사전에 단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용산 참사에 관한 재판이 영국이나 미국에서 벌어진다면 어떻게 될지 역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내가 이해하는 한도에서라면, 화인을 특정하지 못하면서 농성자 가운데 몇 사람에게 발화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자체로 어불성설이므로 공소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경찰의 진압이 무리했는지를 가리기 위해서는 당시 출동한 경찰관들과 경찰조직 내부사정에 대한 조사가 필수적이며, 이것은 변호인 측에게 유리할 수 있는 요소들이기 때문에, 이에 관한 수사기록은 당연히 변호인 측에게 공개하는 것이 공정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사망자들이 숨진 다음에 화재지점으로 옮겨졌을지도 모른다는 의혹 역시 현 단계에서는 합당한 의혹이기 때문이다. 담당 판사도 처음에는 그래서 수사기록 열람을 허용하라고 검찰에게 명령했다. 그런데 검찰은 법원의 명령을 거부했다. 보통법 체계에서라면 절차적 공정성을 정면으로 무시하는 행위이므로 공소가 즉시 기각될 일일 뿐만 아니라, 법원의 명령을 거부한다는 것은 바로 사법절차방해(obstruction of justice)에 해당하는 범죄행위다. 실체적 진실의 발견을 방해하는 짓이야말로 사법질서의 뿌리를 갉아먹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검찰은 그 문제의 수사기록들을 은폐하는 까닭이 피고인들에게 유리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재판과 상관없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보통법 체계에서라면 피고인들에게 유리한지 여부 및 재판과 상관있는지 여부는 검찰이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법정에서 배심원단이 최종적으로 판단할 사안이다. 따라서 그것을 은폐한다는 것은 결정권을 가진 배심원단에게 검사가 원하는 정보만을 편파적으로 보여주겠다는 사악한 심보가 되는 것이며, 나아가 법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힘으로써 사회적 갈등을 치유한다는 정의의 원리를 배신하는 셈이 되는 것이다. 닉슨에 대한 탄핵소추에서 첫 번째 혐의가 사법절차방해였을 정도로, 이것은 본안사건의 경중과 전혀 상관이 없이 공무원들에게는 중대하기 짝이 없는 배임행위가 된다. 사법을 통해 정의를 실현하라는 임무에 따라서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이 그 권력을 악용해서 도리어 정의의 실현을 방해한다는 것은 더 이상 악질적일 수가 없을 정도로 악질적인 범죄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소위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배심재판제도의 그림자가 조금은 도입되었다. 나름대로 뜻있는 사람들 중에 이 제도를 확대해야 하고 나아가 배심원단의 권고를 재판부가 받아들이는 비율을 높여야 한다고 역설하는 데에 나는 공감한다. 그러나 동시에 단순한 배심재판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재판을 통해 실체적 진실을 확인하는 작업에서 진실이라는 것을 보통법에서 어떻게 보는지, 그리고 그 사고방식이 현재 우리와 같은 직권주의 방식과 얼마나 발본적으로 다른지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 최근 이명박 치하에서 검찰이 권력의 사냥개 노릇으로 돌아가는 조짐 때문에 "검찰 중립성"에 관한 문제의식이 높아지고 있지만, 나는 이 문제는 중립성으로 해결될 수 있다고 볼 수가 없다.
국가의 권력 작용은 언제나 일부에게 편을 들고 일부를 배제할 수밖에 없다. 특히 형벌권이란 처벌을 받는 사람에게 절대로 중립적일 수가 없다. 이 주제는 제3절에서 이 장의 논의를 정리하면서 다시 논할 것이다. 다만 실체적 진실을 발견하는 과정만은, 이 역시 중립적일 수는 없지만 공정을 기할 수는 있다. 여기서도 공정성의 보편타당한 기준을 추상적으로 찾아내서 표준화하고자 하면 다시 이야기가 뱅뱅 돌다가 허공으로 증발해 버린다. 실체적 진실을 둘러싼 다툼에서 공정성을 실현할 수 있는 간단하고 핵심적인 요건은 혐의를 씌우는 편에 대해 피고더러 반박하도록 기회를 충분히 허용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사법제도 전반에 관해서, 그리고 특히 증거의 논리학에 관해 시민들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절을 바꿔서 증거의 논리학을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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