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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의 체험…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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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의 체험…한국과 일본은 왜 운명이 갈렸을까?

[철학자의 서재] <번역과 일본의 근대>

<번역과 일본의 근대>는 마루야마 마사오와 가토 슈이치가 공동으로 쓴 책이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병상에 있던 마루야마를 가토가 찾아갔고, 그 둘이 번역의 문제를 놓고 대화한 내용을 가토가 정리해서 나온 책이다. 이 대화가 일본근대사상대계(1988~1992, 이와나미쇼텐 펴냄) 중 <번역의 사상>(1991)을 편집하던 과정에 있었다고 하니 1990년께쯤 될 것 같았다(번역서에는 대화의 시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누고 이것을 글로 정리한 가토가 1919년생이라니 당시 70살이 다 되었을 듯하다. 나이도 나이지만 약력을 보니 <일본문학사서설>이라는 대작을 남기기도 한 유명한 전방위 비평가이자 작가란다. 그런 사람이 일일이 찾아가서 질문을 하고 그 대화의 내용을 글로 정리했던 상대방 마루야마는 어떤 사람일까?

평소 일본 문화에 밝은 편이 못 되는 나는 그의 약력을 보고서야 내 처의 장서 중에 마루야마 마사오의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무식한 생각은 계속 이어진다. 일본 정치학계뿐만 아니라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일본의 대표적인 학자가(그는 1996년에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출간을 못보고 타계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논문 실적보다도 못하게 쳐주는 번역이라는 주제에 자신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공을 들였을까? 몇 년 전에 읽었던 이 책을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으면서 나는 이런 궁금증들을 품었고, 책장을 덮으면서 어렴풋한 짐작이 또렷한 확신으로 바뀌었음을 알았다. 적어도 일본의 근대는 번역이 곧 학문이구나! 그래서 그랬구나!

메이지 시대와 일본의 번역주의

▲ <번역과 일본의 근대>(마루야마 마사오·가토 슈이치 지음, 임성모 옮김, 이산 펴냄). ⓒ프레시안
이 책에서 문제 삼는 일본 역사의 시기는 주로 메이지(明治) 시대(1868~1912)이다. 지은이들은 메이지 정부의 정책을 번역주의라고 요약한다. 이 번역주의의 성립과 내용, 그 공과를 따져보는 것이 두 노학자들이 무릎을 맞대고 나눈 이야기의 핵심이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번역주의는 19세기 초에 일본 해안에 서양의 배들이 출몰하지만 서양에 대한 정보는 없던 상황에서 아편전쟁(1840~1842, 1856~1860)의 발발과 중국의 패전으로 충격을 받은 일본이 서양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립했다고 한다.

세계의 중심인 중화의 몰락과 이에 연이어지는 서양의 쇄도, 아시아의 몰락, 그리고 그에 따른 서양에 대한 추종. 여기까지는 많이 듣던 이야긴데, 다른 아시아와 일본이 사정이 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이들은 두 가지로 요약한다. 공교롭게도 서양이 일본을 침략할 시점에서 서양 쪽에 보불전쟁, 남북전쟁, 크림전쟁 등이 벌어져 아시아 침략이 지체되었다는 점, 그리고 일본의 대응이 굉장히 재빨랐다는 점이다.

중국은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하고서도 여전히 중화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해 대응이 느렸으나 일본은 몇 차례 서양과 벌인 전투와 중국의 패전을 통해 초반의 쇄국 정책(존왕양이론)에서 재빨리 개국으로 돌아섰고, 그 시기가 서양의 여러 전쟁 시기와 맞물려 운 좋게 근대화를 위한 시간도 확보하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위기도 벗어났다는 말이다.

이 상황에서 일본은 막부 시절부터 각 번(藩)에서 앞다퉈 유학생을 서양으로 보내 서양의 정보를 흡수하였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런 일본의 발 빠른 대응에는 전사인 무사가 지배 계급이었던 점이 중요하게 작동했다고 본다. 전쟁터에서 전쟁을 수행하듯이 일본의 지배 계급은 서양과 관련해서 벌어지는 당시의 상황을 대부분 군사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였고, 군사작전 하듯이 서구화를 진행시켰다는 말이다.

그렇지만 이렇게 메이지 시대의 세계 정세와 일본 정부의 계급 구조로만 번역주의가 내 놓은 성과를 설명할 수는 없다고 한다. 짧은 시간 내에 상당한 수준의 번역의 질과 양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메이지 이전 시대인 에도 시대(1603~1867)의 학문적 성숙이 번역과 맞물렸기 때문이라는 것이 두 사람의 평가다.

예컨대 에도 시대의 오규 소라이(1666~1728) 같은 학자는 "우리가 읽고 있는 <논어>, <맹자>라는 것은 외국어로 쓰여 있다. 우리는 옛날부터 번역해서 읽고 있을 뿐이다"라고 말해서 일본의 학문적 근간을 이루던 중국의 유학에 대해서 비판적 거리를 취했다고 한다. 중국식 발음을 가급적 원음대로 읽고 그것을 체화시키려 했던 조선과는 달리 음으로도 읽고 뜻으로도 읽는 일본식 한문 독법을 사용했던 것을 두고 한 말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는 현대 일본의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도 했던 것으로 들었는데, 그 원조가 오규 소라이였던 모양이다. 여기서 '낯섦'의 체험으로서 번역의 문제가 발생한다.

추상어를 수입하는 번역

나도 서양 고전 번역을 업으로 알고 공부를 하는 사람이지만 번역은, 특히 고전 번역은 번역을 하는 매순간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그 유명한 '이데아'가 있다. 이 말은 보통 '형상'으로 번역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문제는 이 '이데아'가 플라톤 시대 일반인들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던 일반 용어이기도 했다는 데 있다. 일반 용어로 '이데아'는 '얼굴', '용모', '보임새' 등의 뜻이 있다.

플라톤은 이 일상어로부터 자신의 철학의 핵심을 표현하는 의미를 길어낸다. 개별적인 사물들이 하나로 묶이는 그 사물 자체, 예컨대 얼굴색과 성별과 나이가 다 다른 사람들을 묶는 사람 그 자체를 '이데아'라고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플라톤의 철학은 대화편이라고 하는 일상적인 대화의 형식을 취한 글에 담겨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에는 철학 용어와 철학적인 사고 내용만 들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대화, 울고 웃기고 분노하는 일상의 희로애락이 담기는 일상의 일과 언어가 들어 있다. 그래서 때로는 이데아가 누군가의 얼굴이 되고, 때로는 사람 자체를 표현하고 좋은 것 자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다.

그러면 여기서 갈등하게 된다. 다 형상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문맥에 따라서 달리 번역해야 하나? 물론 현재의 선택은 문맥에 맞는 번역이다. 그리고 주석을 달게 된다. '이 말이 여기서는 얼굴이라고 번역되었지만 희랍어로는 형상이라고 번역되는 말과 같은 말이다. 플라톤은 이런 일상어를 통해서….' 이렇게 해 놓으면 이해는 되겠지만, 플라톤이 희랍어를 사용하는 언어 대중에게 희랍어를 가지고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그들이 느꼈을 짜릿함, 일상적인 감각이 추상적인 세계로 비약하는 상승의 느낌은 강 건너 불구경이 되고 만다.

독일 철학자 피히테는 <독일 국민에게 고함>에서 바로 이 이데아를 예로 들면서 언어에 대한 감각적 이해의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추상적인 의미로 도입된 번역어들이 개념의 이해를 어렵게 한다는 말을 한다. 이후 피히테는 이런 논의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찬탄하는 쪽으로 끌고 가지만 거기까지는 안 가더라도, 피히테의 말을 통해서 현재 우리말이 갖는 처지를 살펴볼 수는 있다.

예컨대 우리말에 '좋다'라는 말은 일상적이고 감각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다. 반면에 같은 맥락에서 사용되는 영어의 'good'을 보면 '도덕적 선'이나 '상품'의 뜻으로 추상화되어 사용된다. 희랍어도 마찬가지여서 희랍어의 'agathos'는 일상적인 '좋다'라는 말에서 '도덕적 좋음' 즉 '선(善)'의 뜻으로 발전하여, 심지어 '좋음의 형상(또는 '선의 이데아')'이라는 표현에도 등장한다.

우리말은 감각적이고 일상적인 수준에서 추상적 수준으로 발전해야 할 때, 한문에 치이고 영어에 밀리고 각종 외래어에 자리를 내줘 여전히 일상어의 수준에서만 통용된다. 아직도 우리는 몸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을 '컨디션'이라는 말로 간편하게 사용함으로써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할 우리말을 골라 쓰지 못하고 있다. 말이 그저 우리 생각을 나타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은 우리 생각을 드러내기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생각 자체가 되고, 생각을 길러내는 창고가 된다는 점에서 고민은 깊어진다.

번역, 낯섦의 체험

그렇다고 번역을 하지 않고 문화 교류를 거부하며 순수한 우리말을 고집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런 고립된 문화관이 성립할 수도 없으려니와 문화라는 것이 그런 식으로 고립되어 형성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주체적인 문화는 낯섦의 체험으로부터 형성된다는 것이 <번역과 일본의 근대>의 두 저자가 하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설명이 더 붙어야 한다. 낯선 것을 낯선 줄 알아야 낯섦의 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중심과 주류에 동화되려고만 하고, 우리 안에 있는 비주류와 주변적인 것을 끌어안지 않고서는 낯섦의 체험은 불가능하다. 이 지점에 일본 근대를 준비한 오규 소라이의 탁월함이 있고, 소중화(小中華)를 자처했다고 하는 조선 유학의 정통성이 갖는 문제점이 드러난다. 오렌지를 오륀쥐라고 발음해야 직성이 풀리는 주류추종의 의식을 벗어나야 문화의 주체성이 드러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개화기에 우리의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갖지 못했다. 일본은 아편전쟁에 패한 중국에 대한 충격으로 개화를 서둘렀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번역국을 설치해가며 독자적인 번역 문화를 형성해나갔지만, 우리는 중국의 것을 편리하게 가져다 볼 수 있는 한문 식자층이 있었기 때문에 별도로 번역할 생각을 하지 못했던 듯하다.

일본은 중국보다 개화가 빨랐기 때문에든 또 어떤 이유에서든(거기에 대해서는 이 책에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중국과는 독자적으로, 또는 경쟁적으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고, 중국은 중국대로 뒤늦게나마 자신들의 문화유산의 토대 위에서 서양 문물을 번역해 나갔다.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번역은 하겠다고 맘먹으면 바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번역을 할 수 있는 문화적 토대와 여건이 있어야 한다. 이런 토대와 여건이 없고서는 낯섦의 체험도 체화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달리 말하면 번역이 해석이 되는 지점도 여기다.

재미있는 사례를 이 책이 제공한다. 이 책의 저자들에 따르면 중국은 형이상학이 발달한 나라고, 도리(道理)의 사상이 그 형이상학의 중심을 차지하는 나라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원리의 탐구가 중요하지 역사는 부차적인 것이라, 유교에서 독서의 순서도 경(經), 자(子), 사(史), 집(集)의 순서로 역사가 세 번째로 온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은 성현의 나라인 중국을 섬기는 처지라 경(經)도 물론 중시하지만 그런 경전이 성립한 중국의 역사를 아는 것이 대단히 중시되었다고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중국은 이(理)를 중시하고 일본은 기(氣)를 중시하여 중국은 변하지 않는 것을, 일본은 변화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이러한 두 나라의 문화적 차이가 19세기 서양 사상의 중심에 서있던 진화론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차이를 이루었다. 중국에서는 옌푸(嚴復)가 1898년에 진화론의 사상가 토마스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라는 책을 <천연론(天演論)>이란 이름으로 번역하여 진화론을 소개했다. 중국인들은 '하늘이 변한다('천연'의 뜻이 그런 듯하다)'란 사상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는 기(氣)를 중시했기 때문에 별다른 충격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일본의 사상가들은 자연을 유기적인 것이 아닌 무기적인 것으로 파악한 뉴턴 역학의 자연관에 더 혁명적인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의리와 도리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은 '적자생존'의 원리를 '살아남은 것이 반드시 선한 것은 아니다'란 뜻으로 받아들여 약자의 입장에 서서 해석했고, 일본인들은 강자가 적자가 되어야 한다는 제국주의적 입장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번역을 갖지 못했다. 조선에 진화론을 소개한 유길준은 1881년 일본에 사절단으로 가서 경응의숙(慶應義塾)을 다니며 독일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받았던 일본의 진화론을 나중에 한국에 수입하였다. 여러 이유가 더 있겠지만 개화 사상가의 선두에 있던 유길준은 이렇게 일본의 번역을 통해 일본이 해석한 강자가 살아남아야 하는 제국주의 논리의 진화 사상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번역은 반역이라는 말이 있지만, 때로 번역은 번역 주체를 다시 번역하기도 한다. 본래 철학은 희랍에서 성립하여 그 뜻이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이었다. 그 말을 일본 학자 니시 아마네가 어원을 잘 살려 '희철학(希哲學)', 즉 '지혜의 상태에 도달하기를 바란다'란 뜻으로 옮겼다. 이 말이 오늘날 줄어 철학이 되었는데, 본래 동양에는 '철학'이란 학문 분류는 없었다.

물론 서양에서도 고대에는 오늘날처럼 철학이 분명한 분과학문은 아니었지만, 서양의 근대를 거쳐 동양에 번역되어 수입된 철학은 동양의 학을 거꾸로 규정하였다. 그래서 오늘날 유학자도 도학자도 동양철학자란 이름을 얻게 되었으니 번역된 말이 서양의 문물을 등에 업고 번역하는 자를 규정하고 말았다. 개화한 지 100년이 넘었어도 아직도 우리의 것을 찾아야 살려야 하고,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외치고 있으나 딱히 우리 것이 무엇인지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하는 우리가 다시 또 번역을 고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낯선 것을 낯선 것으로 의식하지 못하면 그 낯선 것이 침투해 우리를 우리에게 낯설게 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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