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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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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램덩크 세대

[신기주 칼럼]<31> 현주엽이 은퇴했다. 1990년대 <슬램덩크> 세대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슬램덩크>의 작가 이노우에 다케히코는 2005년 카나가와현의 한 고등학교에 그림을 남겼다. 스물 세 개의 칠판에 그가 남긴 그림은 <슬램덩크>의 못다한 뒷이야기였다. <슬램덩크>의 신자들한테 이노우에가 남긴 그림은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였고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이었다.

<슬램덩크>는 1990년부터 1996년까지 일본 만화 잡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됐다. 그 시절은 농구의 전성기였다. 미국엔 마이클 조던이 있었다. 일본엔 <슬램덩크>가 있었다. 그리고 한국엔 현주엽과 서장훈과 문경은과 우지원과 전희철 같은 농구대잔치 세대가 있었다. 분명 농구는 1990년대 세대를 지배했다. 고등학생들은 마이클 조던의 사진을 책상 앞에 붙여 놓았다. 대학생들은 공강 시간마다 농구장에서 공을 튀겼다. 딱히 농구일 이유는 없었다. 축구가 2000년대 세대를 지배한 것도 우연이었다. 2002년 월드컵이 열렸고 한국 대표팀이 4강에 들었다. 야구가 1980년대 세대를 지배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야구가 생겼고 선동렬 같은 초고교급 선수들이 등장했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엔 마이클 조던이 황제였고 <슬램덩크>가 있었을 뿐이었다. 장동건과 심은하를 배출한 드라마 <마지막 승부>까지 더해지면서 농구는 그 세대의 환상이 됐다. <슬램덩크> 세대는 모두가 덩크를 열망했다. 이승환은 아예 노래를 불렀다 "덩크슛, 한 번 할 수 있다면. 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농구는 우연이었지만 그렇게 1990년대 세대한텐 운명이 됐다.

▲ 이노우에 다케히코가 '주간 소년 점프'에 연재해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던 만화 <슬램덩크>는 사카모토 노부코를 총감독으로 TV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어 인기리에 방영되면서 한 시대의 아이콘이 됐다.

현주엽이 은퇴했다. 고등학생 시절 슈퍼루키라고 불렸다. 고딩 주제에 농구대잔치 덩크 대회에서 백덩크를 해버렸다. 그는 1990년대 농구의 전성기를 상징하는 선수였다. 엄청난 기대를 모았지만 절정에 이르지 못하고 좌절했다는 점까지도 닮았다. 현주엽은 고려대학교를 농구대잔치 4강으로 이끌었다. 대단했다. 하지만 바로 한 해 전에 연세대학교 농구팀은 우승을 했다. 그게 시작이었다. 프로에 데뷔해서도 현주엽은 뛰어난 재능을 가졌으나 우승과는 거리가 멀었다. 슛과 패스와 리바운드에 모두 능했지만 어느 포지션에서도 절대 강자가 되진 못했다. 그건 한국 농구가 걸어온 길이었다. 프로농구가 출범했지만 여전히 야구와 축구한테 밀렸다. A매치에선 명함조차 못 내밀었다. 야구는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축구가 월드컵에서 승승장구할 때 농구는 번번히 만리장성에 막혔다.

어쩌면 절정에 이르지 못한 현주협과 한국 농구의 모습은 1990년대 농구에 열광했던 <슬램덩크> 세대와도 닮았다. 뭔가 대단한 듯 X세대라고 불렸지만 1998년 IMF 외환 위기부터 2008년 금융 위기까지 정치적 경제적 격변에 휩쓸리기만 했다. 선배 세대가 깔아놓은 멍석 위에서 놀 줄만 알았지 제 가치를 세우는데도 소극적이었다. 그렇게 청춘을 보내고 30대 초중반을 넘어 하나 둘 아저씨로 전락하고 있다. 이노우에가 그린 칠판 그림 속 강백호는 20년이 지났지만 처음과 변함이 없다. 녀석은 부러진 허리를 붙잡고 쾌활하게 외친다. "나는 천재니까." 우린, 천재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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