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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의회가 재판정이 돼야 한다"

[박동천의 집중탐구]<64>정치적 경쟁을 위한 공정한 절차

제6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제3장 정치적 경쟁을 위한 공정한 절차


인간사회에 불만이 없을 수 없다. 좋은 정책에는 불만이 있을 리 없다고 보는 사회는 불만이 없는 사회가 아니라 불만을 표출하지 못하게 억압하는 사회다. 주어진 정책에 만족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보는 판단을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 무력과 협박으로 강요하는 사회인 것이다. 이런 체제들은 인류의 역사에서 오랜 기간 동안 굉장히 많이 나타났지만, 결국은 불만을 억압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억압은 항상 더 큰 불만을 낳기 때문에 압력이 커지다가는 결국 체제가 버틸 수 있는 임계점을 지나 폭발하기 때문이다.

누차 말하지만 불만이 폭발하게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시차가 있기 때문에, 폭발하기 직전까지 버티면서 남들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아먹을 수 있는 여지는 항상 존재한다. 동료에게 십만 원이나 백만 원이나 천만 원 정도를 빌렸다가 안 갚아도 법에 호소하는 경우는 잘 없다는 점을 악용해서 그런 짓을 계속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종종 있다. 한 곳에서 그러다 평판이 나빠져서 더 이상 빌릴 상대가 없어지면 다른 곳으로 이주해서 또 그 짓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경우 그런 짓은 설사 통하더라도 당사자의 인간성을 추락시킬 뿐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짓이라도 액수가 수천만 원에서 억대 이상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면 상대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되는데, 하물며 인민에게서 위임받은 정치권력을 악용해서 인민을 상대로 그런 짓을 하게 되면 피해당사자뿐만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권력이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위험은 언제나 상존한다. 주권의 주체인 인민은 추상적인 집단이라서 어떤 개별적인 개인 또는 개인들의 행동이 주권의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는지 여부가 항상 논란이 될 수 있는데, 그때 그에 관한 판단의 일차적인 주체 역할을 위임받은 정부권력이 맡기 때문이다. 다수 인민은 대체로 일단 정부에게 권력을 위임한 다음에 관습적인 신뢰를 어지간하면 거둬들이기를 원치 않기 때문에, 이 사이에 해당 당국이 악의적으로 권력을 사유화해서 착취할 여지는 언제나 폭넓게 존재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별적인 개인들이 특정한 정부 담당자들 또는 체제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항의하는 것은 오히려 해당 정부나 체제의 건강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경보장치에 해당한다. 폭력에 의존하는 방식만이 아니라면, 평화적인 집회나 시위나 출판이나 결사의 자유를 문명사회는 모두 한결같이 신성하게 보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현재 유지되는 질서가 내용에서 혹시 특정 세력에게 유리하게 짜여져 있더라도, 불리한 입장에 처한 사람들이 평화적인 방법, 즉 공론에 대한 호소를 통해서 변화를 추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를 가진다고 일컬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다시 어디가 평화적인 호소고 어디부터가 폭력적인 호소인지가 불분명하다. 일례로 우리 대법원은 2009년 5월 29일에 내린 판결에서, 경찰관의 불법한 직무집행일지라도 거기 대항해서 몸싸움을 하고 때리는 것은 유죄라고 선고했다.(☞ 바로가기) 서울에서 열리게 되어있었던 한미 FTA 반대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2007년 11월에 광주에서 버스로 출발하려던 800여 명을 경찰이 원천봉쇄한 것은 적법한 직무집행으로 보지 않으면서도, 경찰의 처사 때문에 집회의 자유는 물론이고 신체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침해당한 사람들이 항의하느라 PVC 파이프와 돌멩이를 던지고 경찰차 유리창을 깨뜨린 것은 폭력이라고 본 것이다.

만약 경찰의 저런 불법한 직무집행이 사후에 조사를 받아 책임추궁이 이뤄져서 경찰관들에게 적법한 직무집행의 한계가 숙지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시위대의 행동은 지나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한국사회는 전혀 그런 근처에도 가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시위대로서는 차후에 적법한 절차를 밟아서 경찰관들의 부당한 행위를 응징하고 교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고 생각하리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에 해당하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와 같은 경우 경찰관들의 불법한 방해 때문에 시위대의 폭행이 도발되었다고 봐야 맞는다. 항소심을 담당한 광주지법 제1형사부에서는 그래서 시위대의 행동을 "정당방위"로 판시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내 의견이고 대법원은 다르게 생각한다. 대법원에게는 광주지법 제1형사부의 판단도 뒤집을 권한이 있고, 나와 같은 개인의 의견도 무시할 권한이 있다. 그러나 나는 대법원의 이 판결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특정한 판결보다도 위에 내가 적시한 사정을 애써 외면하는 대법관들의 사고방식이 더 큰 문제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저렇게 판결한 대법관들은 반대와 항의의 자유가 기존 사법질서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 그만큼 그들과 나 사이에는 공정성에 관해서 대단히 깊은 견해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차이는 다른 문제들과 연관된다. 용산참사에 관한 재판에서 법원의 명령을 거부하고 수사기록 일부의 열람을 변호인들에게 허용하지 않는 검찰, 법원의 명령을 검찰이 거부해도 재판의 진행이 가능하다고 보는 판사들, 그런 판사들에게 핑계거리를 제공하도록 정해져 있는 형사소송법, 삼성의 편법증여사건에 대한 법원의 무책임한 판결, <피디수첩>의 광우병 보도를 기소하면서 작가의 개인적 이메일에서 "반정부성향"을 찾아내 증거랍시고 제출하면서도 김용철 변호사가 직접 증언을 통해 폭로한 검찰과 삼성그룹의 조직적인 유착관계는 유야무야 덮는 등, 현재 대한민국의 사법제도가 거의 매일 보여주고 있는 황당한 작태들이 모두 내가 생각할 때에는 우리사회의 법조계가 공정성에 관해 얼마나 왜곡된 관념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본다.

그런데 이것은 사법제도나 법조계의 풍토에만 책임을 돌릴 일이 아니고, 주권자인 인민이 적어도 반쯤은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인민이 고칠 수 있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고칠 필요를 못 느끼고 있든지, 아니면 생각은 있어도 어떻게 고칠 수 있을지를 몰라서 못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사법제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고칠 것인지는 수많은 법령들을 개정해야 하는 아주 복잡한 작업으로서 대단히 치밀하면서도 끈질긴 노력이 필요하다. 한국정치의식의 낡은 프레임을 고발하고 비판하는 연재를 마무리하는 자리에서 그런 내용을 서술할 공간은 없다. 하지만 개혁을 위한 구체적인 항목들을 열거하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정치의식의 차원에서 어떤 방향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할지를 대략적으로 제시할 수는 있다.

다음 두 개의 장에 걸쳐서 내가 바람직하다고 보는 의회제도와 사법제도의 개혁 방향을 제시할 것이다. 그에 앞서서 여기서는 어떤 쟁점과 관련해서든지 무엇이 사실인지에 관해 공동체가 공유하는 방식으로 조각들을 재구성해서 확립하는 절차가 민주주의 정치의 개선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그리고 그런 목적을 위한 절차로서 의회와 사법부가 얼마나 중요한 본보기가 되어야 하는지를 논하고자 한다.

용산에서 2009년 벽두 1월 20일에 일어난 참사를 예로 들어서 살펴보자. 경찰은 ① 도심 화염병 시위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현존하는 위험이었기 때문에 경찰의 무력진압에는 잘못이 없고, ② 구체적인 화인은 못 찾았지만 농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시너가 농성자들이 던진 화염병으로 말미암아 폭발한 것이고, ③ 농성은 생존권 때문이 아니라 전국철거민연합회의 조직적인 개입에 의한 반사회적 범죄라는 취지의 결과를 발표했다. 이에 대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협회의 진상조사단은 ① 진압 직전인 19일에 특별히 위험하다고 할 정황이 없었고, ② 구체적인 화인을 특정하지 못했다면서 다섯 명을 골라서 "과실치사죄"를 묻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③ 전철련은 개입이 아니라 연대라는 입장에서 검찰의 수사 결과를 반박했다.

이 모든 쟁점에서 "위험", "과실치사", "개입" 등의 단어는 사실을 가리키는 단어가 아니고 주어진 사실을 평가하는 단어들이다. 같은 상태를 두고도 사람에 따라서는 "위험하다"고 볼 수 있고 그렇게 보지 않을 수도 있으며, 농성자들의 화염병에서 시너통으로 불이 붙게 된 경위에 대해서도 사람에 따라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다른 가능성들에 주목할 수도 있으며, 전철련의 활동이 "배후개입"이었는지 생존권 수호 차원의 "연대"였는지 역시 보기에 따라서 달라질 수밖에 없는 문제다. 전형적으로 두 갈래 서로 다른 가치가 충돌하는 지점으로 보이며, 따라서 이치에 의한 해결이 불가능하고 오직 힘으로만 결판이 날 수 있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우리사회에서 대부분의 시민들이 이런 종류의 쟁점에서 어떤 객관적인 사실이 밝혀져서 그에 따라 공정한 재판이 내려질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제1부 제6장) 지적했듯이, 지식인들조차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이치가 작동할 수 없다고 지레 자포자기에 빠지는 경향이 짙다. 그 사이에 검찰과 법원이 "법"이라는 잣대를 이용해서 전횡을 저지를 수 있는 영역이 갈수록 늘어난다. 그런데 가령 이 사건에 관한 재판이 국회에서 청문회의 형식으로 열리고, 국회에서 벌어지는 청문회가 TV를 통해서 빠짐없이 방송되며, 중요한 쟁점들에 관한 사실관계가 확인될 때까지 청문회의 시한이 정해지지 않았다고 해도 우리사회가 이 정도 사건을 이치와 사실에 입각해서 공정하게 재판할 수 있는 능력이 없을까?
▲ 청문회에 출석해 의원들의 질의를 받고 있는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프레시안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국 정치사에서 오점인 것이 틀림없지만, 적어도 미국 사회가 진실을 파헤쳐서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용기와 역량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았다는 증거로 충분하다. 바로 그 사건에서 진실을 발굴하는 과정은 TV와 신문을 통해 샅샅이 중계된 의회의 청문회에 의해서 가능할 수가 있었다. 나는 2009년 용산 참사의 진상이 한국사회의 건강한 사법적 분별력을 위해서 차지하는 비중이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의 진상이 미국 사회의 건강한 사법적 분별력을 위해서 차지했던 비중에 비해 결코 덜하지 않다고 본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지난 수십 년 동안 재개발 철거 과정에서 자행되었다고 이야기되는 용역의 폭력이라는 것이 실제로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입자들이 거짓말을 하는 것인지까지를 포함해서 국회가 시한을 정하지 않고 TV로 생중계되는 청문회를 벌여서 진상을 명백하게 찾아낸다고 가정하면, 한국사회의 미래에 대해 가질 의의는 워터게이트의 경우가 미국사회의 미래에 대해 가진 의의보다 훨씬 클 것이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런 종류의 사회적 쟁점이 되는 사건에 관해서 단 한번도 명쾌한 진상을 파헤친 다음에 판정을 내린 적이 없고, 대충 파고드는 척하다가는 중도에 덮고 흐지부지 끝내버렸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한나라당이 맘속에 아무런 예단을 가지지 않고 이 청문회의 추이에 관해 이 나라의 상식인들이 판단하는 바에 따라 판결을 받아들여서 조치를 취하도록 한다면, 대한민국의 의회제도와 사법제도와 민주주의가 몇 단계 더 고양되는 획기적인 계기가 될 것이다. 물론 청문회의 진행을 통해 어떤 사실의 조각을 어떤 명제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일지, 회의 진행에서 어떤 행위들이 진실을 발굴하는 데 방해가 되므로 제거되어야 할지, 더 이상 조사할 필요가 없거나 가능성이 없어서 그때까지 발굴된 사실에 기초해서 판결을 내려야 할 시점은 언제인지, 주어진 사실들을 기초로 판결을 내릴 때 그 절차는 어때야 할지, 등등에 관한 절차적 질문들이 당연히 대두할 것이다. 따라서 그와 같은 절차적 질문들에 관해서도 사회적 공론을 통해 합의한 하나의 선례를 빚어낼 수 있게 될 것이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중세까지는 공히 중요한 재판이 궁정회의에서 이뤄졌다. 일반적인 범죄자들을 다루는 재판소들은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중요한 재판은 궁정에서 왕과 대신이 직접 처결했다. 누구를 벌줄 것인지 말지를 다루든, 세금을 어떻게 거둘 것인지를 다루든, 외국과 전쟁을 할지 화평을 할지를 다루든, 모두 일정한 사실을 바탕으로 내리는 판단과 선택의 문제였기 때문에 정책결정이라는 점에서 동일했던 것이다. 이 기능이 서양에서는 근대 이후에 의회로 이양되었는데, 동양에서는 그런 발전이 자생적으로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리고는 삼권분립이라는 피상적인 문구만이 전해져서 마치 모든 재판은 반드시 재판소에서만 해야 하는 것처럼 깊은 오해에 빠져서, 1649년 영국왕 찰스 1세에 대한 재판도 1793년 프랑스왕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도 의회에서 이뤄졌다는 사실의 의미를 음미하지 못한다.

고위 공직자에 대한 의회의 탄핵이라는 제도를 헌법에 채택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의회가 인민주권의 수임기관으로서 고유하게 지니는 재판권임을 이해하지 못한 탓에, 이를테면 2008년 수능시험 정치 ⑨번 문제처럼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잘못된 문제가 출제되기도 하는 실정이다. 이에 관해서는 『프레시안』 기고를 (이에 관해서는 「고등학생들은 대충 가르쳐도 되는가」, 『프레시안』, 2008. 11. 27 을 보라.) 통해 한번 언급했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요지를 설명한다. 아래 <그림8>을 보자. 출제자의 의도는 A는 대통령제고 B는 의원내각제라는 것이다. 그리고 각료 임명에 대한 의회의 동의는 대통령제의 일이므로 ②가 정답이고, 내각제의 의회는 수상을 탄핵할 수 없으므로 ③은 정답이 될 수 없다고 봤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질문에서부터 보기에 이르기까지 영국 의회에 관해 여러 가지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둘만 간략하게 언급한다. 우선 영국 수상은 의회에서 선출되지 않는다. 수상은 선거일 밤 개표결과가 나오면 다수당의 당수를 국왕이 불러서 조각(組閣)을 의뢰하는 형식을 빌려서 임명한다. 물론 "사실상" 의회가 선출한다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무방하다. 하지만 "사실상"으로 말하자면 의원내각제의 수상은 인민이 선출한다고 해도 완전히 무방하다. 의회 다수당이라는 것이 인민의 선거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문제가 전제로 삼고 있는 식으로 억지 구분을 고수하기로 하면, 미국 대통령도 국민이 아니라 선거인단이 선출한다고 말해야 맞는 것이다. 여기서 동원되고 있는 "국민이 선출한다"와 "의회가 선출한다"의 구분은 조잡한 정도를 한참 지나서 잘못이라고 말해야 할 지경으로 깊게 들어가 있다.

다음으로 영국의회는 수상을 탄핵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국왕을 재판해서 처형할 수도 있다. 이것이 19세기 초나 17세기에 마지막으로 실행되었다고 해서 지금은 불신임권으로 대체되었다고 본다는 것은 단지 무지한 자의 껍데기 변명에 불과하다. 그런 식으로 말한다면 불신임투표(vote of no confidence)도 실제로는 거의 실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각이 중점을 두고 추진하는 법안이 의회에서 부결되면 그것을 불신임으로 간주하는 것이지, 실제로 야당이 불신임안을 내서 통과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내각이 추진하는 정책이 마땅히 의회를 통과해야 하는데, 부결된다는 것은 곧 지난번 선거로 확인된 다수파 동맹이 사실상 무너졌다는 뜻이기 때문에 선거를 다시해서 다수파 동맹의 소재를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수상이 탄핵받을 짓을 저질렀다면 실제 탄핵까지 가기 전에 물러나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애당초 공직자들이 탄핵받을 만한 짓을 스스로 알아서 조심할 뿐이다. 이것을 가지고 탄핵권이 없다고 말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의회가 주권을 수임한 기관임을 전혀 간파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착오인 것이다. 더구나 실례를 가지고 말해야 한다면, 미국의 경우 하원에서 탄핵소추를 당한 사례는 몇 있지만 상원에서 탄핵결정을 받은 대통령은 한 명도 없다. 닉슨도 탄핵결정이 날 것으로 보이자 그 전에 미리 사임했던 것이다.

대한민국은 미국식 대통령제를 깊은 숙고도 없이 이승만의 고집에 밀려서 하루아침에 채택해버린 제헌의회의 허망한 실수 때문에, 의회라는 기관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다지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지 못하고 있다. 그리하여 국회의원들은 인민주권의 대표라는 의식은 희미하고, 단지 해당지역의 로비스트이거나 아니면 소속정당 보스의 똘마니, 그리고 물론 죽어서 비석에 새길 만한 개인적인 관직을 차지했다는 의식이 두드러져 보인다. 그러다보니 의회가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사건에 관해 재판정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는 의식도 없고, 재판이 공정하게 이뤄지려면 무엇보다도 해당 사건의 진상에 관해 철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는 자각도 별로 뚜렷해 보이지 않는다. 자기들이 관직을 둘러싼 당파싸움에만 흠뻑 젖어 있다보니, 애당초 당파의 관념을 초월한 진상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을 능력도 없고, 의회의 진상조사 능력이야말로 정치적 이익 때문에 갈라질 수밖에 없는 사회구성원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을 수 있는 유일한 접착제라는 점에 시선을 집중하지도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정치의 질적 개선을 위해서 가장 먼저 논해야 할 주제는 정치적 쟁점 사항에 관해 서로 경쟁하는 세력들 사이에 경계를 관통해서 공유될 수 있는 사실, 진실, 진상 등을 찾아내는 메커니즘이다. 그리고 그런 메커니즘으로는 의회와 법원이 대표적이므로, 의회와 법원이 진실에 기초한 판단의 모범을 보여야 인민의 맘속에 체제의 공정성에 관한 신뢰가 형성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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