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국가개정의 건전성을 중요시해 왔다. IMF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곤 GDP ±1% 대를 유지해 왔다. 그런데 올해 재정수지 적자가 51조원, GDP -5.0%에 달하고, 정부 추계로 국가부채가 작년 GDP 30.1%에서 올해 35.6%로 증가한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정건전성이 논란거리로 등장했다. 이 주제는 보수와 진보 모두에게 양날의 칼이다. 국가권력을 쥔 보수세력은 국가관리 능력을 의심받을 수 있고, 진보운동 역시 작은정부론의 포화를 맞을 수 있다.
그래서 내년 예산안의 향배가 중요하다. 이번에 발표된 예산요구안은 재정건전성을 빌미로 재정긴축을 구현하려는 보수세력의 공세가 담겨 있다. 그만큼 진보에겐 도전이다.
양날의 칼이 된 재정건전성
최근 재정건전성 문제가 떠오르자 재정지출을 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져 왔다. 지난달 기획재정부와 KDI가 주축이 된 '2009-2013년 중기재정운용계획' 총량분야 작업반은 향후 3년간 재정지출을 동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예고대로 재정긴축안이 등장했다.
재정긴축안은 불황기 국가재정의 고유한 역할과 우리나라 재정규모를 감안할 때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다. 일반 가계와 달리 국가재정은 시장경제의 경기 순환과 동행하기 보다는 반대의 방향에서 경기를 조정해야 한다. 즉 경기가 불황일 때 이에 따라 지출을 줄이기보다는 실업급여, 재정사업 등 지출을 늘려 서민경제 육성에 나서는 '자동안정화'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게다가 우리나라 국가재정 규모를 감안하면 규모를 줄여나가는 것은 더욱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나라 국가재정 규모는 점진적으로 늘어나고는 있으나 OECD 회원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작다. 올해 우리나라 재정규모 GDP 33.8%는 OECD 평균 44.8%에 비해 11% 포인트가 부족하다. 한해 GDP가 1000조 원이라면 110조 원을 늘려야 OECD수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세입과 지출을 함께 늘려나가는 재정확장정책이 필요하다.
내년 복지지출 대폭 축소 예고
▲ 이명박 정부는 내년 복지예산 증가율이 10.1%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복지지출액은 2.1%증가했다. 물가상승율(3.0%)을 감안하면 0.9%가 감액된다. ⓒ청와대 |
내년에 재정확장정책을 추진하되 준수해야할 조건이 있다. 4대강사업과 같은 토건 지출이 아니라 서민의 구매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복지지출이 늘어야 한다.
올해 정부의 복지지출액은 80.4조 원이다. 대략 GDP 8% 수준이다. OECD 국가의 평균 복지지출은 GDP 21%로 한국보다 2.5배나 많다. 금액으로 따지면 우리나라는 지금보다 GDP 13%, 즉 130조 원을 더 복지에 사용해야 OECD 회원국 값을 할 수 있다.
그런데 내년 예산요구안에 담긴 복지지출액은 82.1조 원으로 고작 1.7조 원 증가한다. 증가율로는 2.1%이다. 이는 내년 물가상승율 3.0%을 감안하면 실질적으로 0.9%가 감액되는 것이다. 외국과 비교해 턱없이 낮고, 경제위기를 맞아 복지지출이 강조되어야 될 상황에서, 이명박정부는 거꾸로 복지를 줄이고자 한다. (그런데 <한겨레>, <경향>마저 내년 복지증가율이 10.1%라고 보도했다. 이 수치는 올해 추경이 포함된 실제 복지지출액이 아니라 작년 국회에서 의결된 본예산을 기준으로 계산된 것이다. 정부는 복지 증가율 부풀리기로 국민을 현혹하고자 했고, 언론을 그것을 그대로 옮겨 적었다)
복지는 매년 제도 성숙에 따른 자연증가분이 가장 큰 분야이다. 예를 들어, 국민연금의 법정 급여지출액은 올해 7.7조 원에서 내년 9.2조 원으로 1.5조 원 증가한다. 내년 복지예산 증가분 1.7조 원은 국민연금 지출증가분 몫에 불과하다.
그런데 국민연금 이외에도 기초노령연금, 기초생활보장급여, 건강보험, 장기요양보험 등 자연증가할 복지지출은 더 많다. 도대체 이 재원은 어디 있는가? 결국 내년 복지지출 한도 내에서 제도적 자연증가분을 충당하기 위해 다른 복지지출이 대폭 삭감되는 사태가 불보듯 뻔하다. 정말 '용감한' 정부다.
사회복지세 도입해 세입 늘려야
우리나라에서 재정건전성이 논란이 되는 근본 원인은 '작은 세입'에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우리나라 국가재정은 OECD 회원국에 비해 무려 110조 원이 부족하다. 필자의 계산에 의하면 약 70조 원 이상, 즉 부족한 국가재정의 2/3가 낮은 직접세, 사회보험료 수입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명박정부는 작년 부자감세를 단행했다. 이 감세는 중단되어야 한다. 나아가 상위계층 증세가 요청된다. 아래<표>에서 보듯이, 영국, 독일, 헝가리, 그리스 등에선 경제위기에 적극 대응하고자 여러 방식으로 증세가 추진되고 있다.
<표> 유럽 주요국의 상위계층 증세 현황
▲ 출처: 한국조세연구원, "최근 주요국의 재정건전화 정책 및 우리나라의 정책과제" (조세재정 BRIEF 2009.6.22) 내용 재구성. |
우리나라에서 감세는 비판하지만 증세를 요구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조세 저항이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이에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회복지세이다. 이 세금은 소득세, 법인세, 상속증여세, 종합부동산세 등 직접세와 고가품에 부가되는 개별소비세(구 특별소비세)에 부가되는 목적세다. 우리나라처럼 조세 불신이 크고 복지체험이 약한 곳에선 '조세와 복지'를 연계한 세목이 필요하다. 사회복지목적세를 도입하고 이를 전적으로 복지재원으로 사용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의 재정전략회의에 주목하라
이번 예산요구안은 정부 부처가 제출한 금액의 합이지만, 사실상 9월에 확정될 정부 최종안과 거의 같다고 보아도 된다. 과거에는 각 부처가 구체적인 지출항목을 예산당국에 제출하면 예산당국이 이를 조정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에 부처들은 일단 예산을 최대한 요구하고 재정당국이 이를 삭감하는 관행이 자리잡았다. 2000년대 중반까지 부처 예산요구안은 총지출 범위보다 20% 이상 초과하곤 했다.
하지만 현행 국가재정체계에서는 이러한 일이 쉽게 벌어지지 않는다. 기존 예산편성 방식이 부처에서 예산당국으로 올라가는 부처중심 상향식 편성(Bottom-up)이었다면, 이제는 중앙에서 먼저 전략적 재정배분 몫을 정하고, 이 한도 내에서 부처가 지출항목을 자체조정하는 총액배분 자율편성방식(Top-down)이다.
2007년부터 법제화된 국가재정운용체계에 따르면 상반기에 이미 각 분야별(복지, SOC, 국방 등 16개 분야) 및 부처별 예산한도가 정해진다. 각 부처는 자신에게 주어진 범위 내에서 구체적 사업을 조정할 뿐이다. 따라서 이번에 발표된 예산요구안의 총지출 규모는 정부 내부에서 거의 정해진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작년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6월까지 부처가 제출한 요구안이 276.2조 원이고, 정부가 국회에 제출한 최종예산안은 273.8조 원으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면 정부의 예산안 편성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어디인가? 정부의 전략적 재정배분의 기본 골격은 5월에 이루어지는 '재정전략회의'에서 결정된다. 이 회의에서 각 분야별, 부처별 지출한도가 정해진다. 올해의 경우 재정전략회의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직후에 열리고 관련자료도 공개되지 않아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총지출 규모, 4대강 사업, R&D투자, 녹색성장계획 등 주요한 재정배분이 여기서 다루어졌을 것이다.
이제 국가재정체계가 크게 변화한 만큼 예산대응 활동방식도 바뀌어야 한다. 지금까지 국가재정 이슈는 정부가 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는 시점을 전후해서야 떠올랐었다. 재정전략회의에 주목해야 한다.
재정긴축에 적극 맞서야
경제위기를 맞아 국가재정의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 한국처럼 국가재정 규모가 작고, 복지지출이 취약한 곳에서 더더욱 그렇다.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로 재정 세입을 악화시켰고, 재정 건전성 논란을 빌미로 복지지출을 줄이는 역공세를 펴고 있다.
정부가 정기국회에 예산안을 제출하기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사회운동이 정부의 재정긴축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을 경우 국가재정은 앞으로 커나가기 어렵고 복지는 축소될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재정긴축에 맞서 재정확장을 이야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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