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쿠바인은 역사를 잊지 않는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쿠바인은 역사를 잊지 않는다"

손문상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ㆍ<26> 쿠바 시에라 마에스뜨라 - 下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산은 높지 않았지만 험난했다. 길은 좁고 빽빽한 나무들 틈바구니로 안개가 뱀처럼 기어다닌다. 병원을 들른 후 라디오 레벨데를 목적지로 삼았다. 약 1080미터 정상에 위치한 라디오 레벨데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고 또 미끄러웠다. 중간에 관리인 한 분과 농부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 신기한 이방인을 향해 기꺼이 웃음을 날려준다.

라디오 레벨데로 가는 산 중턱의 공터에는 작은 박물관이 있다. 날이 흐려서 그렇지 맑은 날엔 맑은 카리브해를 볼 수 있다고 한다. 이 공터에 있는 작은 박물관에는 산채 생활 당시의 군수용품과 타자기, 그리고 총과 각종 사진들이 걸려 있었다. 산따 끌라라의 체 게바라 기념관에서 본 사진들도 있었고, 처음 본 사진들도 있었다.

라디오 레벨데 송신소까지 오르는 길은 여러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주로 피델의 집무실과 기자실, 그리고 방문자 숙소 등이 가파른 경사를 두고 위치해 있었는데, 마치 비디오 게임의 스테이지같은 느낌도 들었다.
▲ 라디오레벨데로 오르는 산 중턱에 있던 작은 박물관 ⓒ손문상

▲ 박물관 내부. 당시 사진과 타자기, 군복, 무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혁명 유물은 대개 낡고 평범한 것들이고, 그런 평범한 것들은 혁명 당시 어떤 것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손문상

▲ 당시 사용했던 무기, 그리고 타자기. 이제는 녹이 슬었다 ⓒ손문상

▲ 혁명의 새로운 무기이자 목소리, 라디오 레벨데 마이크 앞에 선 체 게바라ⓒ손문상

언론은 혁명의 중추였다.

1957년, 2월 17일 이 곳에서 뉴욕 타임즈 기자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hews)는 피델과 인터뷰를 하기 위해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바띠스따 정부군은 피델은 죽었으며 쿠바에 게릴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허버트 매튜스의 기사는 바띠스따에게 국제적인 망신을 안겨주고, 피델의 건재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좁은 산채에 기자 대기실과 숙소까지 마련할 정도로 피델은 언론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이유로 체 게바라는 라디오 방송국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낸다. 혁명이 목소리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체 게바라의 아이디어로 시작한 라디오 레벨데는 피델이 미국에 건너가 방송 장비를 극비리에 마련해 오며 실현되었다. 해발 1080미터에 위치한 방송국으로 오르기 위해 미끈한 진흙과 날카로운 엉겅퀴 줄기에 시달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평범한 오두막 안으로 들어가니 기원전에나 존재했을만한 방송 설비가 눈앞에 나타났다. 정면에 있는 벽에는 체 게바라의 친구이며 아나운서였던 비올레따 까살스(Violeta Casals)가 제복을 입고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방송국 밑에는 작은 발전시설이 있던 창고가 있는데, 전력은 오로지 이 방송국을 위해서만 공급되었다고 한다. 이 곳에서 역시 호르헤 씨는 '오리지날'을 강조한다. 하지만 방송기기 몇 대에는 새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이거, 국가 유적 관리의 기본이 안 되어 있는 거 아냐?

밖에는 추적추적 는개가 내리고, 우리 발바닥은 진흙투성이다. 이 최악의 상황에서 습기 차단이나, 녹 방지에 힘써도 될까 말까 할 판에 페인트칠까지 한다고? 호르헤 씨는 박물관으로 보내는 걸 고려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다만 박물관으로 가면 그것은 곧 혁명의 박제화를 뜻하는 것이고, 피델은 역사속의 '우상'이 되고 말 것이라 했다. 혁명의 '성지'를 허름하게 보존하는 것이 바로 '성지'를 '성지'답지 않게 하는 것이란다. 그렇다면야 페인트칠은 왜 하나?

우린 호르헤 씨가 알아들을 수 없는 한국말로 이런 이야기들을 하며 산 정상에 안테나가 세워졌던 곳으로 올라갔다. 군대에 있을 때 통신병이 사용하는 커다란 중계 안테나를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게 들어가기 보다는 조금 더 큼지막한 구덩이가 있었다. 낮엔 안테나를 묻어두고 밤에 꺼내어 방송을 했다고 한다. 호르헤씨는 당시 시그널 멘트를 즉석에서 재현해 주기도 했다. 스페인 식민시절 독립전쟁 당시 불려졌으며 현재 쿠바 국가인 '라 바야메사(La Bayamesa)'로 시작했다. 국가지만 가사는 매우 전투적이다.

어서 전투에 임하라, 바야모의 사내들아
조국은 너희를 자랑스레 여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사는 길이기에
너희는 영예로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사슬에 묶여 사는 것은
불명예와 굴욕에 사는 것.
나팔 소리를 들으며,
어서, 용감한 자들이여, 전투에 임하라


"바로 여기! '라디오 레벨데'입니다. 시에라 마에스뜨라의 목소리, 20미터 밴드로 매일 저녁 5시에서 9시까지 방송합니다. 저는 방송 감독 캡틴 루이스 오를란도 로드리게스(Capt. Luis Orlando Rodríguez)입니다!!!"
▲ 오직, 라디오 레벨데만이 전기를 쓸 수 있는 자격이 되었다. 산채의 유일한 발전기 ⓒ손문상

▲ 라디오 레벨데 방송국ⓒ손문상

▲ 방송국 안 풍경. 모두 '오리지널'이지만 일부에는 새로 페인트칠이 되어 있었다 ⓒ손문상

▲ 날이 어두워지면 이 곳에서 안테나가 솟았고 사람들은 라디오에 귀를 이울였다 ⓒ손문상

21세기의 라디오 레벨데는 가능한가?

라디오 레벨데는 혁명 이후에도 효과적인 홍보 수단이었다. 그리고 현재 44개의 송신탑을 두고 쿠바 전역의 98% 이상을 커버한다. 뉴스, 토크쇼, 음악 방송 등을 내보내고 있다. 우린 시에라 마에스뜨라를 나와 다시 아바나로 향하면서 라디오 레벨데를 켠 적이 있었는데, 채널마다 다르지만, 어떤 채널은 서던 록의 대부 리너드 스키너드(Lynyrd Skynyrd)에서부터 개념 없는 아이돌 브리트니 스피어스(Britney Spears)까지 거리낌 없이 나온다. 미국 음악은 쿠바인들도 즐겨듣는다. 라디오 레벨데에서 흘러나오는 Sweet home Alabama를 들으며 쿠바의 아우또삐스따를 타는 기분도 나쁘지는 않다.

라디오 레벨데는 1958년 12월 31일 아바나 탈환을 앞 두고 산따 끌라라에서 작성된 체 게바라의 연설문을 방송하기도 했다. 그리고 1월 1일 아바나로 입성하기에 앞서 피델 카스뜨로는 바띠스따 세력과 어떤 협상도 없을 것임을 라디오 레벨데를 통해 알렸다. 그 연설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다. "¡Revolución Sí, Golpe Militar No!"(이 것은 혁명이다. 쿠데타가 아니다.)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뜨로는 미디어의 파워를 잘 알고 있었다. 불과 수 백명에 불과한 혁명군이 쿠바 민중의 대변인을 자처하며 수만의 병력과 첨단 무기로 무장한 바띠스따 정부군에 대항한다는 것은 '공포' 그 자체였을 것이지만, 그들은 물리적 군사력의 우위가 승패를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일찍이 알고 있었다. 수의 열등함을 극복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바로 미디어의 효과적 이용을 통한 혁명의 전파였던 것이다.

21세기 형 게릴라로 평가되는 멕시코 사빠띠스따(Zapatista, 1910년대 멕시코의 농민 혁명 영웅의 이름을 따서 1994년에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대항하기 위해 봉기한 멕시코 농민 무장 단체) 혁명군의 1994년 치아빠스(Chiapas) 봉기는 인터넷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농민 봉기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이들은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진보적 지식인들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자신이 만든 공동 자치 체제를 만천하에 선전했다. 유럽은 이들의 움직임에 주목했고, 진보적 미국인들은 사빠띠스따 민족해방군(EZLN)과의 연대를 선언했다. 사빠띠스따의 부사령관 마르꼬스(Marcos)는 오징어마스크를 쓰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을 선보여 새로운 반세계화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의 달변과 지적 글쓰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열광했다. 이처럼, 혁명가는 스타여야 한다,는 것은 일찍이 체 게바라가 보여준 바 있다.

현대 사회는 군사력만으로 지배할 수 없는 복잡한 시스템으로 돌아간다. 바로 이런 곳에서 네트워크와 미디어는 핵폭탄보다 강한 위력을 갖는다. '충격과 공포'의 이라크 전이 실패로 귀결되고 있는 처량한 사례에 관해서, 우리 모두는 알고 있지 않은가? 사빠띠스따의 롤 모델이 있었다면 아마도 '라디오 레벨데'였을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은 21세기의 '라디오 레벨데'가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쿠바에서는? 쿠바의 실질적 인터넷 인프라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인 현 상황에서 인터넷이 새로운 '라디오 레벨데'가 될 수 있을까? 그리고 새로운 '라디오 레벨데'가 나타난다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할 수 있을까? 전 세계 블로거들을 사로잡고 있는 쿠바의 한 여성 블로거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요아니 산체스(Yoani Sanchez)라는 이름의 그녀는 독일에 서버를 두고 쿠바의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을 포스팅해 주목받고 있다. 그녀를 비롯한 쿠바의 양심적 블로거들이 쿠바의 체제를 보다 나은 방향으로 돌릴 수 있을까? 모르긴 몰라도 인터넷의 발달은 쿠바 사회의 변화를, 그것이 어떠한 방식이 돼든 간에,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 피델의 집 안 풍경. 그는 유일하게 냉장고를 가진 게릴라였다. 냉장고에는 주로 약품을 보관했다고 한다 ⓒ손문상

▲ 피델의 집. 그리고 게릴라 사령부 ⓒ손문상

다시 산중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감, 혹은 혁명의 의지

벌써 3시간 여를 헤매고 다녔다. 한 시간 쯤 전부터 우리는 "피델의 집은 어디냐"고 계속해서 호르헤 씨에게 묻고 있었는데, 그는 우리의 조급한 목소리와 기대에 찬 질문을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호르헤 씨는 마치 자신이 마련한 정교한 세트 위에서 가장 극적인 순간에, 피델의 집을 공개, 우리의 감동을 극한까지 올려주려는 연극 연출가처럼 행동했다. 헌데, 그 전략은 이미 실패. 우리 목소리가 조급한 것은 지쳤기 때문이고, 이미 '극적으로' 피로를 느끼고 있었던 데다가, 비슷비슷한 오두막을 계속 봐온 덕분에 피델의 집이 아니라 눈앞에 피델이 나타난다고 해도 별로 놀랍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 때 호르헤 씨가 큰 소리로 오늘 코스의 하이라이트를 외친다. "자, 이제 모두 돌아 봤으니 피델의 집으로 가 볼까요?" 피델의 집은 1975년에야 공개되었다. 언제 다시 이 곳으로 들어와야 할지 모른다는 '전투적'인 마음가짐 때문이라고 한다. 피델은 1984년 마지막으로 이 곳을 방문했다. 피델의 집은 벽이 열리게 되어 있고, 침실과 집무실이 전부였다. 낡은 스웨덴제 냉장고도 있는데, 약품을 보관하는 용도로 쓰였다고 한다. 집 앞에 커다란 나무에는 총알 자국이 나 있다. 입수된 모든 총을 먼저 쏴 보고 나서야 사람들에게 배분했다고 한다. 그는 분명 철저한 데가 있다.

산채를 헤집고 다니는 동안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관리인도 있지만, 바나나나 커피를 재배하는 농부들도 있었다. 주로 말을 타고 다니며 농산물을 운반하거나 순찰을 돈다. 산중에서 말을 타고 포즈를 잡고 있는 체 게바라의 사진을 본 적이 있지만 이 험악한 길에 어떻게 말이 넘어지지 않고 다닐 수 있을까,라는 쓸데없이 생각도 해 봤는데, 말은 다리가 네 개나 되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셋은 깔깔 웃다가 미끄러져 넘어졌다. 우린 다리가 두개뿐이다.
▲ 산 위에 올라가던 도중 잠깐 날이 갰다. 멀리 카리브해가 보인다 ⓒ손문상

▲ 관리사무소로 쓰이는 오스발도 메디나의 집. 태양열 발전 시설이 이채롭다 ⓒ손문상

▲ 시에라 마에스뜨라 산 속에 사는 농부, 그리고 그의 식솔들 ⓒ손문상

▲ 산에서 내려오는 길, 해가 조금씩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손문상

▲ 피델의 꼬만단시아까지 오르는 길은 '가파르다'는 말로 다 설명이 안된다 ⓒ손문상

▲ 폭우가 내렸던 흔적 ⓒ손문상

▲ 국립공원 관리 사무소 직원이 사는 집이며, 특이하게 국립공원 안에 있다. 60년대 한국의 시골 풍경이 이랬을까 ⓒ손문상

▲ 커피를 내리는 아주머니. 저런 것을 '오리지날' 이라고 하는 걸 게다 ⓒ손문상

소박한 쿠바의 민가

근처에는 마을까지는 아니어도 군데군데 농민들이 사는 집이 있고, 이들은 라 쁠라띠까(La Platica)라는 생태주의 커뮤니티를 이루며 살고 있다고 한다. 오지의 커뮤티티지만 정부는 이들의 생활을 지원해 준단다. 이 곳 시에라 마에스뜨라 산맥의 유명한 관광 상품인, 뚜르퀴노 봉(Pico Turquino, 해발 1972미터)을 포함한 13박 14일의 트래킹 코스에 이 곳 '라 쁠라띠까 생태 마을 체험' 코스가 있기 때문이다. 역시 관광에 특화된 마을인 셈이다.

잠깐의 휴식을 취한 다음 알또 델 나랑호 입구에 세워둔 차로 돌아왔다. 참, 기름이 없었지. 내려가는 길은 가속기를 밟을 필요가 없으니 일단 걱정은 없겠군. 그래도 주유소가 있다는 마소까지는 버텨야 하는데...하지만 이런 걱정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니 일단 '충분할거야' 라는 믿음으로 제압한다.

관리 사무소 근처에 식사 준비를 약속했던 국립공원 관리인의 집이 있었다. 소박한 집이었다. 한국의 시골 풍경과도 많이 다르지 않다. 뒤뜰에 작은 밭이 있고, 돼지, 닭, 염소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식사가 나왔는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싶더니 한국에서 즐겨 먹던 '닭 볶음탕'이다. 매콤한 맛은 덜했지만 바특한 국물에 심심치 않게 닭고기와 감자 덩어리가 떠 다녔다. 쌀 밥 위에 끼얹어 먹으니 한국 생각이 간절히 난다. 식사를 마치니 아주머니께서 커피를 내 왔다. 시에라 마에스뜨라에서 갓 재배되어 직접 볶은 진짜 커피다. '햇커피'라고 할까? '오리지날' 이라는 말은 이런 데서 써야 한다. 쿠바 사람들이 원래 많이 볶은 커피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새까만 커피는 맛도 향도 진했다. 내친김에 조금 사가기로 한다. 역시 '불법'.

쿠바인들은 언제나 부당한 폭력을 이길 준비가 되어 있다

우린 감사의 표시로 관리인 부부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비상약을 선물로 주었다. 이는 우리 여정이 거의 끝나간다는 상징적인 의식이기도 했다. 무려 6시간 가까이 너무 고생을 많이 해 준 호르헤 씨에게는 약속한 12쎄우쎄 보다 많은 20 쎄우쎄를 드렸다. 그러자 호르헤 씨 표정이 굳어진다.

"저는 분명 일인당 6 쎄우쎄 씩, 12 쎄우쎄를 말씀 드렸을텐데요. 이건 너무 많아요"

예상 밖의 반응에 당황한 우리는 "친절하고 고마운 당신에게 선물을 하고 싶지만 가지고 있는 특별한 물건이 없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돈을 꺼내게 된 것이다" 라고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설득해야 했다. 졸지에 '돈이면 다 되는 줄 아는' 동양인 관광객이 되어버릴 찰라였는데, 그는 대신 자기 아내가 직접 짠 옷을 선물로 주겠다고 우겼다.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어디선가 예쁜 원피스 하나를 가져왔다. 어차피 불법으로 가이드 피를 받는 것이지만 스스로 정한 규칙은 있다는 투였다.

그 규칙 이상을 넘게 되면 불안해지는 것일까? 아니면 마지막 자존심을 지켜내는 자기 방어인가? 알 수 없다. 아쉬운 작별을 하며 호르헤 씨는 쿠바 혁명의 이야기를 한국에 잘 전해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쿠바인들은 절대 역사를 잊지 않는다고. 쿠바인들은 언제나 부당한 폭력을 이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누가 봐도 작달막한 그의 키에서 뿜어져 나오는 단호한 '포스'는 쿠바의 현 상황에 관한 은유 같기도 하다.
▲ 시에라 마에스뜨라를 나오며 ⓒ손문상

('시에라 마에스뜨라' 대신 '시에라 마에스트라' 등으로 적는 게 바른 표기법이지만, 여행기라는 특성을 고려해 현지 발음에 최대한 가깝게 적었습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