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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시작, 섹스 피스톨즈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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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시작, 섹스 피스톨즈의 흔적

[김작가의 음담악담]<런던 순례기②> 영국 신사와 섹스 피스톨즈

지리 시간에 배우기로는 분명히, 영국의 여름은 한국보다 안 덥다고 했다. 그 내용을 집필한 사람에게 장기하와 얼굴들의 '멱살 한 번 잡히십시다'를 들려주고 싶었다. 더웠다. 너무도 더웠다. 더운 것도 짜증이 나는데 지하철이건 버스건 에어컨이 아예 없으니 불쾌지수는 한 명의 속된 인간을 체념과 득도의 경지에 이르게 만들 정도로 치솟았다. 런던의 무료 신문은 "런던이 방콕만큼 덥다"라고 헤드라인을 커다랗게 뽑았다. 그 더위 속에서 나는 소호의 토튼햄 코트 로드역 근처를 계속 해매고 있었다. 서점이 보일 때 마다 문을 열고 들어가 점원에게 핸드폰을 들이댔다.

친구에게 들었던 '레전더리 플레이스 오브 로큰롤'이라는 제목이 미심찍은 나머지, 친구에게 다시 문자를 보내 책 제목을 물었다. 녀석에게 답장이 왔다. <London's 50 outstanding rock landmark>. 의역하자면 '런던 로큰롤 랜드마크 필수방문 50' 정도가 될까. 해석이야 어쨌든, '로큰롤의 전설적 장소'와 '랜드마크 필수 50선'은 아무리 생각해도 헛갈릴래야 헛갈릴 수가 없을만큼 공통점이 없었다. 허탈해졌다. 그러나 정확한 제목을 알았으니 의욕이 샘솟는 건 당연한 일. 하여, 다시 바이블을 구하고자 서점을 돌며 점원에게 친구로부터의 문자를 들이댔던 것이다. 이번에는 성과가 좀 있었다. 아, 그 책. 알지. 그런데 여기는 없어. 더이상 입고계획도 없어. 그러니 다른 서점을 가봐. 왼쪽으로 조금만 더 가면 더 큰 책방이 있어. 그런 식이었다. 그 답변이 계속 꼬리를 문 결과, 결국 마지막에 간 서점 직원이 처음에 간 서점을 알려주는 상황에 이르렀다.

정확한 제목을 알았어도 바이블 획득 미션은 실패한 셈이었다. 런던은 넓고 시간은 없는데, 고작 책 한권을 구하기 위해서 이토록 시간을 허비하고 있는 처지가 다만 한심스러웠다. 어디로 가야하나, 담배를 한 대 피워물었다. 런던이 워낙 메트로폴리스인데다가 슬슬 바캉스 시즌이 시작되다보니 거리 어디에나 카메라를 든 사람들로 넘쳐난다. 토박이라면 절대 찍지 않을 장소들이 기념 촬영의 공간이 되곤 한다. 어떤 낡은 건물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동양인들이 보였다. 저긴 또 뭔데, 간판을 슬며시 봤다. 오옷,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St. Martin Collage Of Art)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 디자이너들의 성지인줄로만 알았지 펑크(Punk)족의 신전인지는 몰랐다. ⓒ김작가

1854년 설립된 세인트 마틴 아트 스쿨은 전세계 디자이너들에게는 동경의 대상 그 자체인 곳이다. 존 갈리아노, 스텔라 매카트니 등 정상의 디자이너들이 이 학교를 나왔으며 매년 재학생들의 졸업전시회만으로도 패션계의 관심이 되는 명문학교다. 패션 디자인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알고 있을 정도니 말 다했다고 보면 된다. 유럽의 대학들이 시내 한복판에 건물 하나 있는 게 전부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이렇게도 도심 한 복판에 있을 줄이야.

열심히 셔터를 눌러댔다. 그 때였다. 마치 <반지의 제왕> 간달프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도 힘차며 기품이 있으면서도 나긋나긋한 그런 목소리가. 게다가 액센트도 간달프처럼 정확하고 또렷했다. "헬로?" 시선이 향한 곳에는 잘 정돈된 백발의 신사가 미소짓고 있었다. "패션디자이너이신가요?" 그는 물었다. 그렇잖아도 딸리는 영어 실력에, 알아듣기 힘든 액센트의 홍수에 고생하고 있던 나에게 그의 억양은 홀안으로 빨려들어가는 골프공처럼 귀에 쏙쏙 박혔다. 듣기평가에서 만점을 받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언 맥캘런 같은 정통 영국 배우들에게서나 듣던 퀸즈 잉글리시, 그 우아함에 웃으면서 대답했다. "아니요. 저는 한국에서 온 음악 저널리스튼데 영국 음악사의 명소를 찾아 다니고 있던 중, 여기를 보고 사진을 찍는 중이에요."

그의 미소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 그래요? 혹시 섹스피스톨즈를 알고 있나요?" 알다마다요. 섹스 피스톨즈를 몰랐다면 런던에서 버킹검 가서 한국 의장대보다 엉성한 '각'에 실망이나 하고 다녔을 겁니다. 그리 생각하면서 몇 번이나 외쳤다. "당연하죠!" 그의 미소가 한결 더 부드러워졌다. "그렇다면 혹시 알고 있나요? 섹스 피스톨즈가 여기서 첫 공연을 했지요" "저… 정말요?" 그는 또 한번 미소를 지었다. "자, 안으로 들어가봅시다." 나를 데리고 세인트 마틴 스쿨로 들어간 그는 경비원에게 뭐라 뭐라 말했다. 그리고 안내 데스크 뒤의 벽을 가리켰다. "봐요. 저기 써있죠?" 그곳에는 놀랍게도, 섹스피스톨즈가 1975년 11월 6일,이 곳에서 첫 공연을 했다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냥,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한 권의 책을 찾아 헤매다가 세인트 마틴 스쿨을 발견하고, 별 생각없이 사진을 찍다가 영국 신사를 발견하고, 프로도가 간달프에게 인도받듯 그에게 이끌려 내부로 들어왔는데 음악사의 중요한 현장과 마주하다니. 멍하니 현판을 바라보다가 허겁지겁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한 장을 제외하고는 모든 사진이 흔들려 있었다. 얼추 촬영을 마치고 경비에게 안에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학생및 관계자가 아니면 곤란하단다. 영어를 잘하면 졸라보기라도 할텐데, 그럴 깜냥은 안되는지라 단념하고 말았다.

신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밖으로 나갔더니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면서, 외국인들에게 'sir'라는 존칭을 붙여본 적이 없었다. 그저 땡큐와 쏘리, 만을 연발했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땡큐 베리 머치, 써'라고 인사하며 깊숙히, 고개를 숙였다. 진심으로 고마웠다. 그저 흘려 보내도 그만인 동양 청년에게 관심을 가져 준 것이. 나의 일에 관심을 보이고 소중한 정보를 전해준 것이. 그토록 온화한 미소와 그토록 세련된 말투를 가진 어른을 만나게 된 것이. 가벼운 목례로, 그는 답했다. 그리고 물었다. "어디서 왔나요?" "한국입니다. 남한이요." "아 그렇군요. 내가 아는 한국말이 있지요." 그는 우리말로 "좋은 여행되세요"라고 말했다. 억양은 어쩔 수 없이 어색했지만 목소리만은 여전히 품위가 있었다. 압도적인 품위였다. 셜록 홈즈의 배경이 된 베이커가로 가는 버스가 왔다. 그는 버스에 올라섰다. 끝까지 웃는 얼굴로 가볍게 손을 흔들고 버스와 함께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영국 영어를 정말로 배우고 싶어졌다. 영국을 왜 신사의 나라라고 하는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깨닫는 순간이었다.
▲ ⓒ김작가

그의 나이가 얼추 60전후, 섹스 피스톨즈가 영국을 뒤흔들었을 때는 30대 초반 즈음이었을 거다. 기성 세대라면 기성 세대인 나이. 섹스 피스톨즈가 생방송에서 미친듯한 욕설을 내뱉고 템즈강 위에서 여왕을 모독하는 노래를 부르는 둥, 온간 문제라는 문제는 다 일으키는 걸 보면서 그 때의 그는 무엇을 느꼈을까. 아마, 통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았으면 지금 섹스 피스톨즈를 이야기하고, 세인트 마틴 스쿨안의 현판을 알려주면서 짓던 그 미소는 조금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자신이 좋아하던 것에 대해서, 나이 들어서도 기꺼이 즐겁게 얘기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그 미소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에게 사진을 부탁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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