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쉼표 뒤에 이어지는 문장이 늘 새롭기만 한 것은 아니다. 대개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그저 일상의 예외일 뿐이다. 여행에서 겪은 일들이 이제까지와 다른, 새로운 일상을 메워가는 재료로 쓰이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그저 예외일 뿐이니까.
주민의 삶이 무너지면, 아름다운 경치도 없다
이들이 일상의 예외로 돌리는 곳에서 여행지 주민들은 일상을 보낸다. 여행객들이 '어차피 일탈이니까'라며 배설하는 일상의 찌꺼기 속에서 지내는 여행지 주민들의 삶은 어떤 것일까. 어떤 이들에게 이런 질문은 그저 유치하기만하다. "여행지 주민들은 여행객들을 향해 억지웃음을 짓는 대가로 돈을 받지 않느냐. 여행객들도 평소에는 그렇게 돈을 번다"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 유명 여행지 주민들은 대개 관광산업 종사자다. 그들은 여행객들의 일탈을 낭만적으로 치장해주는 대가로 돈을 번다. '경제활동'의 일부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보면, 이상할 것도 안타까울 것도 없다.
하지만, 종종 놓치는 대목이 있다. 돈이 오가는 행위, 그러니까 거래는 늘 '공정하게'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한쪽에게 일방적으로 손해를 뒤집어씌우는 거래에 대해 '경제활동' 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불공정한 거래가 지속되면, 결국 관광산업도 망한다. 여행지의 풍경과 문화를 지키고 가꿔온 주민들의 삶이 망가지면, 아름다운 경치도 제 모습을 유지할 수 없다.
거대 산업이 된 해외여행…"바다와 땅을 잃은 이들은 일용직이 됐다"
최근 출간된 공정여행 안내서 <희망을 여행하라>에 따르면, 지난 50년 동안 세계 인구가 두 배로 늘어나는 사이 해외여행 인구는 무려 36배로 늘었다. 2007년 한 해 동안 9억 300만 명이 자신이 속한 나라 밖으로 여행을 했고, 관광산업은 세계 GDP의 10.3%를 차지하는 거대한 산업이 됐다. 1989년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해외여행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한 한국 역시 이런 흐름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2007년 한 해 동안 한국 인구의 25%에 이르는 1300만 명이 해외로 나갔고, 한국 관광객의 지출 규모는 세계 10위를 기록했다.
이처럼 거대 산업으로 성장한 여행이 '불공정 거래'로 점철돼 있다면 끔찍한 일이다. 실제로 그렇다. <희망을 여행하라>저자들은 "우리가 해외여행에 쓰는 돈이 100만 원이라면, 그중 40만 원은 비행기에, 그 중 20만 원은 여행사에, 20만 원은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쓸 물건을 수입해 오는 데 지불 된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현지에 남는 돈이 20만 원인데, 이 중 현지 주민에게 실제로 돌아가는 돈은 1~2만 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대자본이 소유하고 있는 숙박업소와 관광시설, 그리고 여행사와 결탁한 업자들의 몫이다. 저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관광개발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했지만 주민들은 여전히 가난하다. 숲은 파괴되었고, 바다와 땅을 잃은 이들은 호텔의 일용직 청소부, 짐꾼, 웨이터가 됐다."
그나마 반가운 일은 이런 상황을 안타까워하는 이들이 늘어간다는 점이다. 현지 주민들에게 정당한 몫이 돌아가도록 하는 '공정여행'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유럽에서 시작된 이런 흐름은 이제 국내에서도 낯설지 않다. 많은 이들이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고 있는 올 여름에 맞춰 공정여행 프로그램을 마련한 여행 작가 최정규 씨를 만났다. 7일 오후 서울 종로구 필운동에 있는 국제민주연대 사무실에서 최 씨와 나눈 이야기를 정리했다. (☞관련 기사: "상처주지 않는 만남, '공정여행'을 떠나요")
천편일률적인 패키지여행에서 공정여행으로
프레시안 : 아직 공정여행이 낯설다는 이들이 제법 있다. 공정여행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최정규 : 2001년부터 2006년까지 여행사 직원과 경영자로 일했다. 어린이들을 위한 여행 프로그램을 주로 개발하는 회사였다. 당시 기존 여행사 프로그램에 불만이 많았다. 대형 여행사가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군소여행사들이 베끼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여행사가 아무리 많아도 여행 프로그램은 천편일률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물론, 대형 여행사가 좋은 프로그램을 다양하게 개발한다면 별 문제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현지 문화를 제대로 느끼도록 하는 프로그램은 찾을 수 없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구경하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밥을 먹고 저녁 일정은 쇼핑으로 채우는 프로그램이 거의 전부였다.
이런 프로그램에 대해 답답해하던 중, 공정무역 관련 활동을 하는 이들을 만나게 됐다. 생산지 주민들에게 정당한 보상이 돌아가고, 자연환경과 인권을 훼손하지 않는 무역에 대해 고민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불공정 무역으로 피해를 입은 생산지를 방문하는 여행을 준비한다며 내게 도움을 청해 왔다. 당시 여행을 준비하면서 '공정여행'이라는 개념에 눈을 떴다.
패키지여행에서 저녁 일정을 비워두는 이유
▲ 공정여행을 준비하는 여행작가 최정규 씨. ⓒ프레시안 |
최정규 : 만나고 사귀는 게 여행이다. 기존 여행사 프로그램으로는 현지 주민들과 제대로 만나서 속내를 나누는 게 불가능했다. 기존 여행사 프로그램이 소비적인 내용으로만 채워진 데는 이유가 있다.
하나는 실력 부족이다. 여행을 준비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현지 문화를 깊이 이해하고 있어야만 좋은 프로그램을 마련할 수 있다.
다른 이유는 비용이다. 현지 문화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여행을 준비하려면, 미리 현지를 여러 번 답사해야 한다. 공부도 많이 해야 한다. 이게 다 비용이 드는 일이다.
이처럼 부실한 여행 상품을 놓고, 여행사들이 가격 경쟁을 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대형 여행사 상품을 보면, 여행에 필요한 최소 경비보다 가격이 낮은 경우가 종종 있다. 여행사들이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옵션'과 '쇼핑'을 통해 나머지 비용과 이윤을 메우는 구조다. 그러니까 모든 일정이 오후 5~6시면 끝난다. 저녁 시간은 '옵션'과 '쇼핑'을 위해 비워둬야 하기 때문이다. 발마사지 등 각종 '옵션' 상품에는 여행사 몫의 수수료가 붙어 있다. '쇼핑' 역시 마찬가지다. 업소에 손님을 몰고 가는 조건으로 수수료 계약이 돼 있다. 이러니 여행지 문화를 충분히 느낄 시간이 없을 수밖에.
기존 여행사 패키지여행에서 예약돼 있는 식당이나 상점 가운데 상당수는 한국인 소유다. 전직 여행사 직원들이 소유한 경우가 많다. 이런 식당과 상점에서 소비한 돈이 현지 주민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제대로 된 여행이라면, 현지 주민들이 찾는 시장에서 상품을 고르고 현지 주민들이 자주 가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야 한다. 그래야 현지 문화를 깊이 느낄 수 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과 가게만 전전하다 돌아오는 여행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의 진솔한 만남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옵션'과 '쇼핑'으로 손해 메우는 헐값 여행 상품
프레시안 : '옵션'을 강요하는 패키지여행 상품에 대한 불만은 오래 전부터 나왔었다.
최정규 : 그렇다. 예전에는 싫다는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옵션'을 강요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많았다. 다행히 최근에는 이런 관행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하지만, '옵션'과 '쇼핑' 수수료로 여행사가 비용을 메우고 이윤을 챙기는 구조는 여전하다.
얼마 전, 한 대형 여행사 프로그램을 들여다 본 적이 있다. 도저히 비용을 맞출 수 없는 가격을 내걸고 있었다. 알아보니, '옵션'으로 제시된 프로그램의 가격이 현지 시가보다 턱없이 높았다. 여행객들이 무조건 싼 패키지 프로그램을 찾는 것도 문제다. 의미 있는 여행을 위한 적절한 비용을 스스로 판단해야 한다. 여행사 역시 "유명한 곳을 들렀다"는 공허한 만족감 대신 깊이 있는 체험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물론, 여기에는 비용이 든다. 하지만, 여행 산업이 지금처럼 가격경쟁에 머무르는 수준을 벗어나려면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이라고 본다.
여전한 프로그램 베끼기 관행…"여행도 지식산업인데…"
프레시안 :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여행 산업도 일종의 콘텐츠 산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회가 이런 측면을 오랫동안 간과해 왔다는 생각도 든다.
최정규 : 물론이다.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유럽에서 공정여행을 준비하는 모임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일 년 동안 함께 공부하는 게 보통이라고 한다. 현지 문화, 역사…등 공부할 게 얼마나 많겠는가. 충분히 공부하고 준비하는 여행 문화가 뿌리내리면 여행 산업 역시 변할 수밖에 없다. 지식, 콘텐츠 산업이 될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걸림돌이 많다. 여행객들이 너무 짧은 일정을 선호하는 게 대표적이다. 여행사들이 '비행기로 유명한 곳을 찍고 다니는' 프로그램을 주로 개발하는 이유다. 물론 우리 현실에서 충분히 긴 휴가를 내기 어렵다는 점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을 충분히 들이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여행을 할 수 없다.
또 대형 여행사 프로그램을 군소 여행사가 그대로 베끼는 관행도 문제다. 베끼는 문화 속에서 의미 있는 콘텐츠가 나올 리는 없다. 다른 제품과 마찬가지로, 여행 상품 역시 독창적으로 연구·개발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절실하다.
전직 직원이 소유한 가게와 수수료 계약하는 여행사
프레시안 : 기존 여행사들은 한국인들이 소유한 업소와 주로 계약하여 여행 프로그램을 운용한다는 지적을 했다. 여행객들이 쓰는 돈이 현지 주민들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공정여행의 취지에 비춰보면, 안타까운 대목이다.
최정규 : 예전에는 외국에서 한국인이 소유한 가게를 찾기 힘들었다. 하지만, 이제 달라졌다. 어디를 가건, 한국인 소유 가게가 있다. 기존 여행사들은 이런 가게와 주로 계약한다. 자신들 입장에서 여러 가지로 편리하기 때문이다. 여행사와 계약하여 수수료를 챙길 계획에 따라 여행사 직원 출신이 현지에서 가게를 여는 경우도 많다.
서울 인사동에서 1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는 물건을 해외여행에서 7만 원에 샀다며 좋아하는 사람을 봤다. 그런데 그 물건, 현지 시가는 1만 원도 안 된다. 나머지 6만 원은 어디로 갔을까. 한국인이 소유한 현지 가게, 그리고 여행사가 나눠 가졌다고 보면 된다. 굳이 공정여행의 취지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현지 주민들이 이용하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게 여러모로 낫다.
"공정여행, 의미 있지만 재미가 없다고?…천만에, 더 즐겁다"
프레시안 : 올 여름 중국 윈난성 차마고도, 내몽고 등을 방문하는 공정여행 프로그램을 개발했다고 들었다.
최정규 : 공정여행 프로그램이 기존 여행사 프로그램과 다른 대목 가운데 하나가 현지 주민들과 일정을 상의한다는 점이다. 구경꾼이 아니라 손님으로 찾아간다는 게 공정여행의 취지다. 현지 주민들 역시 이런 취지를 잘 이해하고 있다. 현지 주민들과 함께 만나서 한국 손님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아이디어를 많이 냈다. '한국 손님들에게 이런 걸 보여주면 좋을 텐데'라면서 말이다.
올 여름에 방문하는 윈난성 일대는 '차마고도'를 다룬 방송 다큐멘터리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 혁명 당시 홍군이 이동한 경로이기도 하다. 유명한 '대장정(大長征)'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게다가 이들 지역은 중국에서 가장 다양한 소수 민족이 공존하는 곳이다. 이들 소수 민족의 문화가 잘 보존돼 있다. 자연 풍광 역시 상상을 넘어선다. 한 시기에 사계절을 경험할 수 있다. 어느 곳으로 가면 겨울 풍경이, 다시 이동하면 여름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광활한 내몽고 초원 풍경 역시 잊기 힘든 경험이 될 것이다. (☞여행 일정 보기)
▲ 내몽고 초원. ⓒ최정규 |
▲ 내몽고 초원. ⓒ프레시안 |
프레시안 : 공정여행은 생태 친화적인 여행을 지향한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왠지 불편한 여행, 의미는 있지만 재미는 없는 여행'이 아닐까 하면서 불안해하는 이들이 있다.
최정규 : 절대로 그렇지 않다. 윈난성 일대 공정여행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앞서 이들 지역 공정여행을 다녀온 이들의 반응을 보면, 찬사 일색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 다음에 '윈난-공정여행'이라는 커뮤니티(cafe.daum.net/yunnanfair)가 있는데, 앞서 이들 지역 공정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개설한 곳이다. 이곳에 들르면, 당시 공정여행 경험에 대해 접할 수 있다.
생태 친화적인 여행을 위해 감수하는 작은 불편 사례로 비행기 이용을 최소화한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항공 교통이 육로 교통에 비해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압도적으로 높다는 점을 고려한 것이다. 하지만,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타고 긴 거리를 이동한다고 해서 지루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여행 안내자가 미리 충분한 이야깃거리를 준비해 뒀다. 현지 문화와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창밖에 펼쳐진 자연 풍광을 감상하는 즐거움. 이런 기쁨을 보다 많은 이들이 누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 윈난성 매리설산. ⓒ최정규 |
▲ 윈난성 소금마을. ⓒ최정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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