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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진보여, 폐쇄성에서 벗어나라"

[박동천의 집중탐구]<62>아량 있는 사회

제6부 절차적 민주주의와 사회적 자유주의
제1장 아량 있는 사회


이제 상당히 길었던 이 연재의 종결을 준비하기 시작할 때가 되었다. 나로 하여금 이 연재를 시작하게 만든 동기는 우리사회에서 정치담론이 무성하지만 그것이 실제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해방 직후 아름답고 건강한 나라를 건설해보려는 열망이 있었지만, 결과는 전쟁과 독재와 부패였다. 4월 혁명이 일어나 다시 희망과 기대가 불타올랐지만 결과는 군부독재였다. 6월 항쟁의 귀결은 노태우의 집권과 3당 합당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김대중과 노무현의 간판을 빌려서 민주세력이 집권했지만, 이명박에게 "사상 최다표차 당선"이라는 선물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명박의 당선이 완강한 반동정치의 시발일 위험이 높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먼저 일본정치와 같은 모델이 한국에도 정착되지 않을까 우려가 떠올랐다. 민족주의를 바탕에 깔고 정치적으로 별로 역동적이지 않은 다수 대중의 보수성 위에 지배 엘리트가 순환하면서 집권하는 체제가 내가 보는 일본 정치다. 비판적 지식인이 없지는 않은데 정치적으로 별 영향력은 없다. 최소한의 법치와 기술개발 능력으로 이끌어가는 국민경제에 대해 대다수가 만족하면서, 세상이라는 것이 기를 써봤자 더 이상 크게 나아질 것도 없다는 체념 아래 살아가기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런 유형의 정치체제가 한국으로도 전염되기가 쉽다고 본다.

다시 한 번 노무현 시기를 되돌아보자. 그가 정치적으로 교활하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제1부 제7장) 지적했으므로, 여기서는 그 대목은 제쳐놓는다. 그가 집권한 다음 시도했던 개혁정책들은 골수우익 언론의 노회한 간접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좌초했는데, 선거 때 그를 지지했던 진보진영은 무엇을 먼저 해야 할 것인지를 합의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폐습 때문에 지리멸렬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 결과만 두고 볼 때, 노무현의 집권은 보수와의 담론투쟁에서 패배한 동시에 진보개혁세력의 악성 분열을 초래한 것으로 보인다. 이 연재를 시작한 후로 줄곧 강화되고 있는 이명박의 막무가내 공안통치로 말미암아 반MB정서가 형성되고 있고, 게다가 노무현의 안타까운 투신 때문에 뭔가 해야 한다는 정서적 공감까지 있지만, 여전히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진보개혁세력의 지리멸렬 상태는 2007년 이전에 비해 별로 나아진 것이 없다. 이명박에 대한 혐오 때문에 침묵 속의 박근혜가 대안으로 부각되는 현실이 한국정치의 특징적인 현주소다.

나는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오직 개인들이 보다 분명하게 자신에게 무엇이 이익인지를 인식하고 자신의 이익을 정치적 선택으로 연결하는 데에만 있다고 본다. 물론 이때 이익이란 눈앞의 생존을 위한 이익도 들어가지만, 자기가 살고 싶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익, 평화와 아량이 행복에 도움이 된다는 이익 등, 개명된 부류의 이익도 포함한다. 그리고 나는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한 희망은 진보개혁세력에게 있다고 믿는다. 진보진영이 항상 한 마음으로 뭉치지 못하고 안에서 와글와글 시끄럽다는 사실이 바로 상대적으로 볼 때 패거리 현상이 덜하고 개인적인 의견과 소신들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냉전적 공포와 물신숭배에 빠져있는 보수우익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절대적인 평가를 한다면 진보개혁진영의 패거리 현상도 한국에서 내가 실현되기를 바라는 민주주의가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한참 초과한다.

나는 이런 패거리 현상의 뿌리에 언어적 구호에만 반응하고 내용을 파고들지 못하는 피상성이 있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지역주의 담론, 합리주의의 우상, 선험주의적 교조, 그리고 민족주의라고 하는 피해의식 등을 그 피상성의 원인으로 고발하고 비판했다. 이런 증상들은 종합해보면 새로운 대상이나 관념에 대한 두려움, 즉 제노포비아라는 성격과 아울러 무슨 일에든 자신의 위신을 결부시키는 미숙한 심리로 요약된다.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을 때 거부하거나 회피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부나 회피만으로 될 일이 아님을 깨닫고 적극적인 대처 방법을 탐색하는 제2층위의 사고가 대단히 부족한 것이다. 제2층위의 사고, 다시 말해 정면 돌파만이 아닌 우회나 절충 및 타협과 같은 방식들을 모종의 비겁이나 나약이나 배신으로 간주하는 경직성이 우리 사회의 정치의식에는 매우 두껍게 분포한다.

그런데 제노포비아나 위신을 중시하는 태도는 공히 보수적인 성향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한국사회에서 진보진영에서도 생소함에 대한 무조건적 거부반응이나 위신에 목말라 하는 성향은 매우 자주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나의 관찰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민주/독재 구도 이후 한국에서 진보정치의 성공가능성은 무척 비관적이라는 결론이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새로운 것을 두려워하고 위신을 중요시하는 사람들을 한데 묶을 수 있는 접착제란 권력과 돈이라고 하는 이권밖에는 없고, 그것도 카리스마를 갖춘 두목형 인물이 있을 때나 가능한 얘기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정치구조의 진보를 지향한다는 명색을 달고서 오직 권력이나 돈을 맹목적으로 추구할 수도 없고, 카리스마적인 보스 밑에 조아리는 졸개의 모습을 보일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것은 곧 진보의 정치적 생명이 다했음을 의미한다.
▲ ⓒ프레시안

그러므로 한국에서 진보정치의 희망을 모색하려면 뭔가 발본적인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현재처럼 뒤죽박죽으로 사용되고 있는 진보-보수의 언설을 넘어 보다 한국의 정치현실을 적확하게 이해하고 미래를 향한 출구를 탐색하는 데 도움이 되는 시야가 필요하다. <그림6>은 흔히 생각하는 일차원적인 수준의 진보-보수 스펙트럼을 표시한다. 진보니 보수니 좌니 우니 하는 소리들이 모두 단지 상대적인 위상을 나타낼 뿐임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진보(좌파)를 그림의 오른쪽에 보수(우파)를 왼쪽에 배치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차원 스펙트럼은 언제든 명목척도로 변질될 수 있다. 그리하여 극우파는 극소수 자기 주변 사람들만을 "진정한" 보수로 여기고 나머지는 모두 빨갱이로 치부한다. 그리고 극좌파는 자기 주변 사람들만을 "진정한" 진보로 여기면서 나머지는 모두 수구꼴통으로 치부한다.
▲ ⓒ프레시안

그런데 정치적 성향으로서 보수와 진보를 나눌 때에는 기득권을 수호하느냐 아니면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추구하느냐는 차이가 핵심적이지만, 지성적 심리적 문화적인 차원에서 보수적인 태도와 진보적인 태도를 나눈다면 폐쇄적인지 아니면 개방적인지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지성적 문화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경직적으로 전투적인 태도는 보수적이고, 유연하고 타협적인 태도는 진보라고 말할 수 있다. 유연하고 타협적인 태도를 "진보"라고 부를 수 있다는 말은 일례로 영어 단어 리버럴(liberal)의 의미에서 하나의 전거를 구할 수도 있지만, 영어 단어의 의미에 기대려는 것은 아니다. 나는 전쟁보다는 평화가 분명히 진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전쟁이든 뭐든 필요하다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가능하면 전쟁이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걸핏하면 전쟁이 벌어지는 세상보다는 분명히 진보한 세상이라고 나는 생각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경직적인 패거리 추종으로써 전쟁을 불사하는 태도보다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를 중시하면서 여러 갈래의 문제들을 섞이지 않게 분별하는 태도를 대부분의 개인들이 내면화해서 생활한다면 전쟁은 불필요해질 확률이 높다.

이런 두 개의 축으로 진보와 보수를 생각하면 <그림6>에서 직선으로 나타난 스펙트럼이 <그림7>에서는 동그랗게 휘어져서 나타나게 된다. 극우나 극좌나 사실은 기득권이나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려는 목적에 충실하기보다는 자신들의 내면에 숨어있는 불신과 증오를 표현한다는 점에서 매우 가깝게 접근하게 된다. 극우나 극좌는 나름대로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라본 위에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아니라, 이념적 구호의 노예가 되어 구호 위에 자아를 내팽개쳐버리는 소외된 영혼의 전형에 해당한다. 그러므로 정치의 진보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기득권 수호에서 사회적 약자 보호 쪽으로 이동하는 진행만이 아니라, 배타성에서 개방성으로 이동하는 진행도 진보의 중요한 의미에 포함시켜서 추구해야 한다. 그리하여 만약 <그림7>에서 수평으로 표시된 두꺼운 빨간 선 위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좌파든 우파든 사회의 스펙트럼에서 예외적 소수가 된다면, 그것은 분명히 지금과 같은 상태보다 정치가 진보한 상태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진보개혁진영은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를 추구하면서 동시에 진보정치 이념이 답답한 폐쇄성을 벗어나 개방적인 안목에서 넓은 지평을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 이래야 할 필요는 너무나 많다. 당장 현실의 정치공학으로서 노무현에서 이명박으로 이동한 최소 300만 명의 부동층이 대부분 중도성향의 유권자들이다. 또 중도좌파의 시각에서만, 만약 집권했을 때 불과 몇 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실제로 뭔가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는 정책의 개발이 가능하다. 진보정치세력에게는 정책을 통해 뭔가를 보여줘야 할 필요가 너무나 절실하다. 기득권을 해체하기 위해 급진적인 개혁은 저항에 맞서 싸우는 것만으로도 정권의 임기를 다 소모하기 십상이기 때문에 바로 선거 패배로 직결되더라도 놀랍지가 않다. 임기 내내 싸운 것 말고 뭘 했느냐는 비판에 대꾸할 말이 없을 테니까 말이다. 나아가 개방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은 진보 내부의 고질적인 분열증상을 극복하는 데도 필수적이다. 제일층위의 노선에서 차이가 있을 때, 즉각적으로 돌진해서 장렬히 산화하는 것이 아니라 한걸음 물러나 차이 속의 공존가능성을 찾아내야 모든 종류의 연합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이런 습성은 진보진영 내부에서만이 아니라 보수 세력을 상대하거나 나아가 다른 민족들을 상대할 때에도 훌륭한 소통의 능력으로 연결될 것이 틀림없다.

사회적 약자의 지위를 향상시키고 그들에게 더 나은 기회를 부여하는 일은 기득권층이 누리던 특권 중 일부를 덜어내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방향의 변화가 평화적으로 이루어지려면 기득권층이 아량을 보이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다. 다시 말해 기득권층 가운데 온화한 성품을 가진 부류가 보수 세력을 주도하도록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당연히 진보 쪽에서도 보수 세력에 대해 아량을 가진 사람들이 상황을 주도해야 한다. 그래야 진보진영에 대한 불신과 공포와 증오 때문에 보수가 경직된 태도를 보이게 되는 악순환을 피할 길이 아주 조금이라도 열릴 수가 있다. 제2부에서부터 제5부까지의 논의를 통해서 비판한 지역주의망국론, 환상적 합리주의, 교조적 선험주의, 감정적 민족주의 등은 모두 현실을 직시하면서 진짜문제를 찾아 접근하면 풀릴 수도 있는 일들을 뭔가 관념의 덫에 빠져서 가짜문제를 만들어낸 탓으로 문제가 얽혀버리는 증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우리사회의 구성원 개개인이 불필요한 피해의식이나 과장된 염려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현실감각을 회복한다면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증상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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