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7기갑부대 안에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대위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대위 그리고 일본인과 중국인, 흑인과 남미인, 체로키 인디언, 유태교도와 이교도가 있다. 지금, 이곳 미국 땅 안에선 우리 부대에 소속된 여러분 중에 누군가는 인종과 종교 때문에 차별을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귀관들과 나를 위하여 이제 차별은 버려라 전우가 어떤 피부색을 가졌든, 어떤 종교를 가졌든 이제는 잊어라…(중략)…우리는 곧 적진에 들어간다 귀관들을 무사히 데려오겠다는 약속은 해줄 수가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맹세하겠다. 우리가 전투에 투입되면 내가 제일 먼저 적진을 밟을 것이며 그곳을 떠날 때는 맨 마지막이 될 것이다. 여러분들 중 단 한 명도 내 뒤에 남겨두지 않겠다. 우리는 죽어서든 살아서든 함께 고향에 돌아온다.』
▲ 위 워 솔저스 |
랜달 월레스 감독의 <위 워 솔저스>에 나오는 할 무어 중령의 이 연설은, 약간 오버하면,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스미스씨, 워싱톤에 가다>에서 스미스씨가 의회에서 하는 필리버스터 연설 다음으로 가장 감동스러운 것이다. 랜달 월레스는 멜 깁슨과 <브레이브 하트> 등을 함께 작업했던 시나리오 작가답게 자신의 영화에 명문(名文)을 새겨 놓았다.
좌파적 생각을 가졌든 우파적 생각을 가졌든 할 무어 중령의 연설은 가슴을 칠 것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건 진심이다. 진정성이다. 좌나 우가 아닌 그때그때의 '정치적 올바름'이다. 그것이야말로 시대가 요구하는 균형의식이며 진정한 실용적 사고다. 그러니 지도자의 연설은 이쯤 돼야 할 것이다. 죽어서든 살아서든 함께 돌아오겠다는 마음이 담겨져 있어야 한다.
부시시대가 시작되고, 이미 9.11 테러도 겪은 후에 나온 이 영화는 전투상황을 그린 밀리터리 액션영화인 척, 역설적으로 反부시주의적 사고의 행간을 읽을 수 있는 정치적 작품이다. 랜달 월레스는 당시 시대를 할 무어 중령 같은 이미지의 지도자가 없는 시대, 궁극적으로 그런 아버지의 부재를 보여주는 시대라고 갈파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 (부시가 아니라) 할 무어 같은 대통령을 원하고 있음을 얘기하려 애쓴다.
사람들은 영화가 세상을 바꾸거나, 혹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방진 생각들을 버린지 이미 오래다. 얼마 전 뉴스 인터뷰에 나온 봉준호 감독의 얘기처럼 '극장 안에 있는 두시간 정도의 시간동안 만큼은 영화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고, 그것이야말로 영화의 위대한 사회적 기능인 것'이다. <위 워 솔저스>같은 영화는 다른 모든 장면은 다 빼더라도(사실 영화는 올드한 신파 분위기를 곳곳에 풍긴다.) 연설 장면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기억에 남을 작품이다.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 상영 전 예전의 '대한뉴스'마냥 국정홍보를 위한 영상물을 튼다고 한다. 대통령의 직접지시로 약 2억원의 비용을 들여 만들었고 주무부처는 이를 일부 멀티플렉스에 광고비를 주고 상영케 하는 모양이다. 따라서 엄연히 일반광고의 하나일 뿐이라는 것이다. 국정홍보 차원이 아니고.
극장 입장에서는 가뜩이나 없는 살림, 광고매출을 올릴 수 있어 덥석 잡은 것 같은데 이게 영, 사람들에게 날선 반응들을 얻고 있다. 다른 건 다 몰라도 무엇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이다. 2008년 이후 새정부 들어서서는 왜 이렇게 시대에 대해 착오를 일으키는 일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열심히 하시는 것 같긴 한데, 라디오를 통한 '노변담화'라는 것도 사실은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때 얘기다. 전혀 신선하지 않은데다, 할 무어 중령과 달리 때론 진정성이 의심될 때가 많다.
이런저런 일로 짜증이 나시면 모두들 극장 안에서 2시간만이라도 위로받으시길. 가뜩이나 푹푹찌는 여름이다. 극장만큼 피서지 대신 제격인 곳도 없다.
(* 이 글은 영화주간지 '무비위크' 385호에 실린 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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