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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생존', '실용'…보수이데올리기임을 깨달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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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민족의 생존', '실용'…보수이데올리기임을 깨달아야"

[박동천의 집중탐구]<61>집단생존의 우상

제5부 민족주의: 집단생존 프레임
제8장 다섯째 매듭 - 집단생존의 우상


동양 특히 한국의 문화에서 개인의 인권이란 지배계급의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매우 협소한 영역에서만 인정되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이익은 나쁜 것이고 공동의 명분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행위가 미덕으로 여겨지는 기풍이 현대에도 대단히 강하게 남아있다. 여기에 민족주의가 무비판적으로 섞이면서, 사람들의 사유 프레임은 일방적인 집단주의 성향을 보인다. 이때 집단은 여러 단계의 매개를 거친 넓고 높은 차원의 공공성이 아니라, 아주 좁고 즉각적으로 감각되는 조직에 불과하다. 낯선 사람에게 (적어도 겉으로는) 친절하다든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한다든지, 기부나 자선 등 남을 돕는 일에서 보람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다는 등을 보면 서양 사람들보다 한국 사람들이 훨씬 이기적인 의미도 적지 않다. 따라서 동양 사람들이 서양은 개인주의고 동양은 집단주의라는 흔히 운위되는 이분법을 잠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동양이 어떤 나라를 가리키는지도 사실은 따져봐야 할 문제지만, 그것은 넘어가고 일단 한국이나 일본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조직우선의 풍토가 동양적이라고 치자. 흔히 거론되는 사례로 회사 일로 밤을 새운다든지, 직장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사적인 심부름까지 시켜도 항의하지 못한다든지, 기타 등등, 집단주의적 특성으로 거론되는 사항들은 대단히 많다. 하지만 한국인들의 패거리문화를 단순히 서양의 개인주의와 대비되는 것으로만 이해해서는 여러 가지 중요한 점들을 놓치게 된다. 이에 관해서 본격적으로 파고 들 계제는 아니기 때문에, 현재의 논의에 필요한 만큼 두 가지만 지적한다.

첫째, 한국 문화에서는 사람의 정체성을 개인적 속성보다는 귀속적 속성에 따라 규정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동서양의 차이로 볼 수도 있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차이로 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가문, 학교, 지역, 인종, 민족, 종교, 정치적 신조 등등에서 어떤 집단에 속하는지를 귀속적(歸屬的, ascriptive) 속성이라고 하는데, 이런 속성들은 물론 그 사람의 행동패턴을 기어이 예측해야만 하는 상황이라면 참고사항에 포함될 요소이기는 하다. 그러나 경상도 출신이라고 모두가 전라도 사람들을 증오할 리가 없고, 무슨 일에서든 서울대 졸업생이 다른 대학 또는 고등학교 졸업생에 비해 능력이 반드시 뛰어날 리도 없다. 귀속적 속성으로 한 사람의 미래 행동을 예측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 개인이 과거에 속했던 집단에 따라서 앞으로 그가 보일 행동을 미루어 짐작한다는 태도인데, 신분사회에서나 가당한 일이지 평등한 인격체로 구성된 자유 사회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했던 조승희 사건이나 뉴질랜드 유학생의 사례에서 일부 한국인들이 보인 말초적인 반응은 한국문화에 신분사회적인 요소가 얼마나 짙게 남아있는지를 보여준다.

둘째, 조선일보와 같은 신문이 최근 30년 동안 보여주는 행태는 집단주의일까 개인주의일까? 그 신문사가 내부적으로 강력한 조직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리고 기자들이 회사의 편집방침에 저항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의 자발적으로 순응한다는 점을 주목하면 확실히 동양적 집단주의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사실을 자의적으로 편집해서 자기들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만 집중적으로 부각한다든지, 편집의 와중에 과장이나 왜곡까지도 서슴지 않는다는 점은 이기적인 작태의 전형이다. 오늘날 서양사회라고 저런 정도로 극우적 정치지향을 가지는 신문사가 없지는 않지만, 대개 사회 전체의 스펙트럼에서는 별종 취급을 받는 것이 보통이다. 혼자만의 편협한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태도는 사회평화를 저해한다고 보는 사람들이 진보나 보수라는 진영의 차이를 막론하고 넓은 주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서양사회가 겉으로 보면 한국에 비해 개인주의가 성행하는 것 같지만, 한 꺼풀만 벗기고 들어가면 사회구성원들이 전체적으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존중한다는 사실을 볼 수 있다. 이때 다른 사람의 권리에 대한 존중은 결코 목전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이기심일 수는 없고, 사회 전체를 생각하는 고려에서만 가능하다. 사회평화가 궁극적으로 개인에게도 이익이라고 보면 이것도 이기심의 일종이라고 하겠지만, 이와 같은 "개명된 이익"이란 곧 공동선과 통하는 항목이지 전통적인 도덕관에서 매도하는 이기심과 같을 수가 없다. 섣불리 집단주의와 개인주의를 동양과 서양의 문화적 차이인 것처럼 단정하게 되면, 이런 의미들을 전혀 상감할 수가 없게 된다.

민족주의에서 민족을 내가 지금까지 역설 해 온 대로 정치공동체에서 공동의 관심사를 해결한다는 차원에서 바라보면, 불필요한 감정이나 위신을 결부시키지 않고 개명된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의 노력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한국 민족주의에서는 개인의 정체를 귀속적인 속성으로 규정하면서 다른 민족을 현재적이거나 잠재적인 적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훨씬 강하게 나타나 왔다. 상대에 대해 무방비 상태로 자신을 노출하거나, 상대의 선의를 무작정 믿고 자신의 모든 운명을 거기에 거는 짓은 개인으로서든 민족으로서든 어리석은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상대를 무조건 두려워하면서 어떤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도 모종의 보장을 요구한다는 것은 매우 불행한 폐쇄성이다.

한미 FTA를 원천적으로 두려워하는 정서에는 미국이라는 불가항력의 강대국과 자유롭게 무역하다가는 우리가 통째로 잡아먹히리라는 걱정이 있다. 나는 농민들이 반대하는 데에는 충분히 이유가 있다고 보며, 그 문제는 국내의 가치배분이라는 관점에서 설득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하지만 그 이외의 제조업이나 서비스업 분야는 세부적인 교역조건에 관해 끈질기게 줄다리기를 할 수 있는 문제이지 "나라 망하는 길"은 절대 될 수가 없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어차피 미국 의회의 비준도 몇 년 걸릴 일로 기약이 없기 때문에, 한국 국내의 반대여론을 무마하거나 설득하는 과정은 충분히 길게 잡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정부가 아무리 소통의 노력을 기울이더라도 반대의견을 굽히지 않을 사람들이 상당수 남을 것이고, 그 가운데에는 미국을 괴물로 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이런 심사는 북한을 무조건 증오하는 극우의 심보에 비해 전혀 나을 것이 없다. 근거도 이치도 없이 누군가를 증오하는 데서 자신의 존재이유를 찾는 의존적인 심리이기 때문에, 실제로 증오대상을 언제든 바꿀 수도 있다.

대한민국은 연간 무역액이 2008년도 추계로 8500억 달러가 넘는 장사꾼의 나라다. 이 수치는 구매력평가(PPP) 기준 국내총생산(1조2천억 달러)의 67%이고, 공식환율(OER) 기준 국내총생산(8575억 달러)으로 치면 99.6%에 달한다 (☞ 미국 CIA, World Factbook). 우리가 외국에 물건을 팔아서 이익을 볼 때, 한국 물건을 사서 쓰는 사람들이 그만큼 손해를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물건을 파는 외국이 우리를 잡아먹는 괴물일 수는 없다. 거래의 세계에는 당연히 사기꾼도 있고, 서로 몰라서 해로운 물건을 사고 팔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성은 국제무역에서 뿐만 아니라 국내거래에도 있는 일이고, 그 때문에 상거래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상호이익이 가능한 게임이라는 사실이 변할 수는 없다. 상거래 자체를 두려워한다는 것은 현재 대한민국의 위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제노포비아인데, 우리 사회에서는 식자층부터가 민족주의를 비판할 엄두를 못 내는 탓에 이런 정서들이 보수층보다 오히려 진보를 자처하는 시민들 쪽에서 더 강하게 나타난다.

무사들, 다시 말해 깡패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대에는 낯선 사람이 나타나면 먼저 굴복시켜서 휘하에 넣으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리고 만약 일합을 겨뤄본 후에 상대가 더 강하다는 사실이 판명되면, 상대에게 굴복해서 부하가 되겠으니 받아달라고 간청할 수밖에 없다. 현재와 같은 세상에서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우리끼리 살 테니 내버려 달라"는 의미의 자주권을 주장하면서 자본의 이동이나 무역장벽의 철폐를 원천적인 악으로 간주한다는 것은, 무사 시대의 세계관을 가진 데 더해서 상대가 강하다고 싸워보기도 전에 기가 죽은 다음 겨루기 자체를 회피하겠다는 태도밖에 안 된다. 이런 패배주의에 바탕을 이루는 전제들은 다 틀렸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무사 시대의 세계관이 가장 큰 문제다.

대한민국이 국력을 모두 동원해서 일본이나 중국이나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일본이나 중국이나 미국이 국력을 총동원해서 맞선다면, 아마 질 것이다. 그러나 상거래는 호들갑떠는 사람들이 "전쟁"에 곧잘 비유를 하든 말든 결코 그런 종류의 전쟁은 아니다. 기업과 기업 사이의 거래고, 궁극적으로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거래다. 경제적 거래라는 관계가 깡패들 사이의 쌈박질과 같은 종류라면 어떻게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은 경제적 성취를 이룰 수가 있었겠는가? 또, 외국과의 거래를 한국이 회피하려든다고 해서 회피할 수 있는 일도 아니다. 정부가 전지전능할 수도 없고, 국내 시장의 규모가 이미 커졌기 때문에 정부가 일일이 통제할 수 있는 능력도 없다. 더구나 그런 종류의 정부규제는 언제든지 악용되어 전체주의의 망령이 부활될 수 있다. 근본적으로 현대 세계는 칭기즈칸이나 나폴레옹 같은 무인들의 무대가 아니고, 서부 활극처럼 총잡이들이 설칠 장소도 아니다. 스포츠나 연예계에 여전히 영웅은 있고, 때로는 정치인이나 장군, 법조인 등이 영웅으로 각광을 받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보통 사람들이 그들에게 강제로 머리를 조아려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 현대 세계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민족들 사이의 관계를 깡패세계의 질서로 치환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으로는 바로 현대의 이런 모습을 자꾸만 망각하게 된다.

현대 세계라 할지라도 기어이 신분사회와 같다고 우겨대려면 스스로 영웅들을 숭배하고 그들의 힘과 영향력에 뼛속까지 굴종하면 된다. 앞에서(제3부 제2장) 번햄에 대한 오웰의 비판을 소개했듯이, 체질적으로 권력을 숭배하는 사람은 세상이 어떻게 짜여져 있더라도 권력을 숭배해야 할 이유를 기어이 찾아서 그렇게 할 것이다. 반면에 권력을 숭배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권력이 주제를 모르고 일반 시민의 일상생활을 간섭하려고 할 때 당연히 비판하고 항의해야 맞을 것이다. 말로는 권력을 숭배하기 싫다고 하면서 행동으로는 권력을 숭배하고,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핑계를 대는 짓은 정확히 번햄과 같은 성향의 인물들이 보이는 작태다.

한국사회에서 국내정치의 차원에서는 권력에게 엄격한 한계를 부여할 만큼 시민의식이 깨어나 있고, 권력이 한계를 넘을 때 자유를 위해서 기꺼이 저항할 의지를 가진 영혼이 충분하다고 나는 믿는다. 시민들 중 상당수가 자유로웠던 기억만 유지하면 부자유한 사회로 전락하기 어렵다고 했던 마키아벨리의 임계점을 우리 사회는 국내적으로는 넘었다고 본다. 하지만 국제정치를 바라볼 때에는 아직도 자유시민들 가운데서조차 국가 단위의 권력, 궁극적으로는 군사력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리고 그 원인이 민족주의 프레임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하지만 일례로 미국이라는 나라는 3억 인구가 한 마음으로 움직이는 나라가 아니고, 대통령이 한 마디 해서 느닷없이 어떤 다른 나라를 침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게 반대할 사람은 이라크 침공의 경우를 들겠지만, 그 일은 9·11 테러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배경이 있었고, 그랬음에도 미국 내 인구의 절반 이상은 처음부터 반신반의하면서 자국 정부에 대한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였다. 북한이 어떤 도발을 감행해서 빌미를 제공하지 않는 한, 북한을 미국이 실제로 군사적으로 공격한다는 것은 현실은 고사하고 상상으로도 불가능에 가깝다. 하물며 대한민국이 미국을 상대로 그런 식으로 사생결단을 벌인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가 없는 경우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자본이 한국을 제물로 삼는다는 우려는 자본의 움직임이라는 것이 군사적 공격과는 다른 패턴임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하는 기우에 불과하다. 이건 정밀하게 비판할 가치도 없는 헛소리인 것이 간단한 귀류법으로 밝혀진다. 미국의 자본이 한국 내에 들어오면 우리 모두의 내장을 다 뽑아 삼켜버릴 정도로 불가항력이라면, 한국 정부 또는 민족이 문을 아무리 잠그고 빗장을 걸어봤자 소용이 없을 것이 아닌가? 지난 60년 동안 미국이 우리를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놔뒀다면,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더 키워먹으려고 나둘 것이라도 봐야 맞지 않는가?

미국이 우리를 지금 잡아먹을지 나중에 잡아먹을지를 걱정하기 전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국이라는 나라를 잡아먹고 자시고 할 여지가 없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이라크가 당한 정도의 처지를 우리가 겪을 일도 없지만, 그런 이라크조차 사담 후세인이 죽었을 뿐 민족이 망한 것은 아니다. 앞에서(제7장 제4절의 말미) 일본에 대해 말했듯이, 미국에 대해서도 우리 사회에서 진보를 원하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미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대하지 말고 미국 내의 진보세력과 동맹을 맺어서 한국과 미국의 보수 세력에게 대항하는 것이다. 이때 "진보"가 선험주의적인 교조로 규정되면 우물안개구리들이 서로 깨끗하다고 싸우는 수준을 넘지 못한다. 현실정치를 도외시할 사람들은 면벽참선을 하든지, 수도승이 되어 섭리를 궁구하든지, 납으로 금을 빚어내는 사업에 인생을 걸든지, 토정비결을 70억 인류에게 맞도록 정교한 과학으로 만들겠다고 자기최면을 걸든지, 나는 별로 말리고 싶은 생각이 없다. 다만 현실정치에서 생전에 뭔가를 이룩할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진보"에 관해 소아병적 결벽증을 버리고 경계를 개방적으로 넓게 잡으라고 권고할 생각은 많다.

마지막으로, 민족주의 프레임에 담겨있는 생존지상주의를 빠뜨릴 수 없다. 이미 지금까지 논의에서 간접적으로는 충분히 함축되었지만, 한국 민족주의는 지난 150여년의 역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항상 "빈곤하고 비참했던 과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든다. 그리하여 비참해 본 경험이 없는 세대에게까지 허리띠를 졸라매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굴지의 부자인 이명박 씨가 칠십 세를 바라보는 나이에도 틈만 나면 가난했던 옛날을 떠올리는 것을 보면, 그의 심성이 그렇게 각박하고 잔인한 까닭이 시야에 잡힌다. 이건희가 삼성그룹의 회장으로 있으면서 사장들을 자극하기 위해 "10년 후에 뭘 먹고 살지 궁리해야 한다"고 했던 소리도 마찬가지다. 맨주먹으로 출세하기 위해 링에서 상대를 때려눕혀야 하는 사람에게는 상대를 배려할 마음이란 사치일 뿐이다. 하지만 OECD 회원국의 대통령이나 그런 나라의 신문사들을 광고 주문 여부로 조종할 수 있는 재벌의 총수가 "헝그리 정신" 수준의 심보에 머무른다는 것은 도덕적인 수치를 지나서 기본적으로 경제적이지도 못하다.

장사꾼이라면 사회갈등보다는 사회평화를 원해야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전쟁이 나면 장사꾼들은 주인공이 될 수 없고, 깡패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개명된 이익을 추구하는 장사꾼이라면 사회에 평화가 유지되도록 투자를 해야 한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든지, 영미와 유럽사회의 기부문화는 인도주의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는 만큼이나, 개명된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이라고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이 지점에서는 결코 도덕과 이익이 충돌하지를 않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이명박이나 이건희를 위시해서 대다수 중산층조차 아직도 생존의 위협이라는 공포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위신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남보다 앞서지 못하면 곧 생존의 위협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서울대 못 들어가서 자살한다든지, 1등 못해서 자살하는 아이들의 경우가 위신을 곧 생존과 동일시한 사례에 해당한다. 물론 저런 심성은 병리적인 경우로서, 보통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한국시민들이 일상생활에서 실제로 보이는 행동패턴은 쓸데없는 위신보다는 실질적인 이익을 중시하는 경향이 과거에 비해서 훨씬 높다. 그러나 불특정다수를 잠재적인 동지로 보기보다는 잠재적인 적으로 여기며 두려워하는 데서는 생존의 위협에 찌들린 모습이 드러난다.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학교에서 학원으로 하루 열서너 시간씩 고문의 행렬로 내모는 현실을 보라. "성공"하지 못하면 곧 굶어죽기라도 한다는 위기의식이 아니라면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 아닌가!
▲ ⓒ연합뉴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개혁의제가 나올 때마다 "민생"이라는 구호가 어깃장을 놓을 수 있었던 배경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경제"라는 지극히 추상적인 단어를 가지고 이명박이 그토록 쉽게 당선될 수 있었던 배경도 여기에 있다. 이런 식으로 사용되는 "민생"이나 "경제"는 사실 "신자유주의 반대"라든지 "공교육 정상화"라는 구호만큼이나 추상적이면서 이념적으로 편향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통 한국인들은 "민생"이나 "경제"는 골치 아픈 이념과는 상관없이 "실용"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사용되는 "실용" 역시 실용적인 구호가 아니라 이념적인 구호, 다시 말해 일방적으로 보수적인 구호임을 간파하는 시민은 수가 많지 못하다. 이런 선입견을 깨뜨리지 못하면 한국정치에서 진보는 설 자리가 없다. 그리고 이런 선입견을 깨뜨리기 위한 작업은 과도한 민족주의가 생존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민족의 생존"이라는 것이 곧 보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밝혀내지 못하는 한, "민생", "경제", "실용" 등의 구호 역시 보수 이데올로기임을 일반 민중에게 일상적으로 알릴 길이 없다. 그런 단어들이 이념적으로 악용되는 구도를 밝히지 못한다면, "민생"과 "경제"와 "실용"을 들먹이는 주장에 반대했다가는 현실정치에서 제대로 도전도 못해보고 패배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렇게 되는 순간, "민생"이라는 이름 아래 재개발 지역에서 세입자들이 죽어나가는 광경, "실용"이라는 이름 아래 반대의 권리가 일축당하는 장면, "경제"라는 이름 아래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는 연극 같은 참상이 자행되더라도, 많은 보통 시민들은 뭐가 잘못인줄을 느끼지 못하는 마비증상에 걸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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