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초 대학수학능력시험 바로 전날 밤, 큰아이가 고3 들어 몇 개월간 다니던 학원에서 수능 예상 문제가 도착했으니 가져가라며 연락이 왔다. '뻥'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지만 학원의 성화에 못이겨 한밤에 가서 문제지를 가져온 기억이 새롭다.
그날 밤 가져온 문제를 수험생인 큰 아이가 풀어보았는지 안 풀어보았는지는 알지 못하지만, 문제가 적중하건 적중하지 않건 불안감에 학원 말을 외면한다는 것도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쪼잔하다' 욕해도 수능 한 문제 차이로 지원 대학이 달라지는 입시 현실에서는 어쩔 수 없다. 대부분 그럴 것이다.
수능 모의시험 격인 고등학교 전국연합학력평가 문제지가 유출되었다고 한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육방송(EBS) 외주 PD가 시험 전날인 3월 10일 학력평가 해설방송 제작을 위해 서울시교육청이 EBS에 건넨 시험 문제를 조카인 서울 강남구 대치동 K학원 김모(35) 원장에게 이메일로 보냈고, 학원장은 자신의 학원 인터넷 사이트에 이를 올려놓고 "시험 전에 풀어보라"며 학원생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는 것이다.
지난번 글 서두에 쓴대로 대부분 학생과 부모들은 수능시험 결과에 일희일비한다. 그러다보니 1년 6차례 모의 학력고사에도 수험생들은 목을 맨다.
"에효…언어 보자마자 재수할까 생각 들더라구요.
외국어 끝나고는 자살 충동까지도 들었어요. =_=
대학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일 듯 말듯 한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애요. =_=
이건 뭐 제주 OO대 가서 말들과 뛰어 놀 점수…."
(2009년 6월 3일,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이 주최하는 모의 수능시험을 치른 날 저녁 고3 여학생이 부모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지난 2007년에는 김포외고 시험 문제가 유출되어 온 사회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는데 이번 일도 그 비슷한 사례이다. 다만 이번 사건은 강남쪽 입시학원과 교육방송, 교육청이 얽혀있다. 이번 일로 교육방송이 위축되지 않기를 바라지만 교육방송에서 수능 방송을 시도한 것은 지난 김대중 정부 때인가 참여정부 시절, 사교육비 경감 목적에서 도입되었다. 그때 교육단체들은 반대했다. 예산 확보를 위해 정부 측 요구를 거절하지 못하고 문제집 판매 수익을 무시할 수 없는 교육방송이 선택한 고육지책이었다.
나 자신도 교육방송 시청자위원을 한 적도 있엇지만 교육방송이 미국의 PBS처럼 공영방송으로서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지는 못할 망정 수능 문제 풀이나 하면서 교재대 판매 수입으로 근근히 살아야 하는 공영방송이라는 것이 안쓰러웠고 전국의 교육 과정을 수능시험하나로 평정하는 것은 교육 발전에 무익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부는 이를 강행했다. 결국 수능 방송은 학원도 없는 오지, 소외 지역 운운하며 수능 방송은 첫발을 내딛었고 소외지역뿐 아니라 전국의 학생이 울며 겨자먹기로 듣고 봐야하는 제3의 입시교육이 되고 말았다. 그 당시 그런 사업에 내가 낸 시청료와 세금이 왜 쓰여야하는지 죽어라 반대했지만 막지 못해 죄송할 뿐이다. 그 당시도 역부족이었다.
▲ "입시 부정도 입시 부정이려니와 돈있고 정보력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강남쪽 입시학원들의 정보력과 취득 방법, 정보력의 힘과 엄마들의 호기심과 신뢰 문제, 학원에 외국자본이 들어온 이후 상황, 그 파행이 간단치가 않기 때문이다." 한 입시설명회에 참가한 학부모들의 모습. ⓒ뉴시스 |
이렇게 학생들이 일희일비하는 전국연합 학력평가 문제 유출은 흔한 부정같지만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입시 부정도 입시 부정이려니와 돈있고 정보력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강남쪽 입시학원들의 정보력과 취득 방법, 정보력의 힘과 엄마들의 호기심과 신뢰 문제, 학원에 외국자본이 들어온 이후 상황, 그 파행이 간단치가 않기 때문이다. 최근 몇년간 강남 지역 학원은 점차 늘어나고 학원 이름도 글로벌하게 바뀌어 예전에 학원 이름만 대면 알만했으나 점차 주변 학원 이름을 일일이 꿸수도 없다.
학원들이 날이 갈수록 대형화되고 홍보에 치중하며 대치동 건물 옥상 입간판도 커지고 내부 시설도 화려해져 예전에 책상과 칠판, 걸상이 전부였으나 요즘엔 웬만한 병원 인테리어를 찜쪄먹을 만큼 달라졌다. 다 돈의 힘이다. 한국 교육 시장에 군침을 훌리며 들어온 외국자본이 많아졌다. <한겨레> 김진철 기자 보도에 따르면 '외국계 펀드들이 한국 사교육업계로 몰려들던 2006년 이후 지난해까지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에 투자된 외국 자금은 1조 원을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우리나라 사교육 시장 규모가 30조 원 정도이므로, 적어도 3~5% 이상이 외국계 펀드들의 자금인 셈이다. 엘림에듀가 대표적인 곳이다. 지난해 세계 금융시장을 파국으로 몰아넣으며 파산했던 리먼브러더스를 비롯해, 골드만삭스 계열의 오즈매니지먼트, 선라이즈오버시즈 등이 2006년 6월부터 2007년까지 약 300억원을 엘림에듀의 전환사채(CB)에 투자했다.
비상장사인 영어학원업체 아발론교육의 경우는 지난해 미국 정부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은 에이아이지(AIG)의 투자를 받았다. 금융 위기가 본격적으로 몰아닥치기 전인 지난해 7월 에이아이지 인베스트먼트는 아발론의 전환상환우선주와 전환사채 등에 600억 원을 투자했다. 이밖에도 글로벌 사모펀드인 칼라일펀드가 2007년 특목고 입시학원인 토피아에듀케이션에 2000만 달러를, 일본의 소프트뱅크 벤처스가 확인영어사에 100만 달러, 미국계 사모펀드인 티스톤이 하이스트·청산·학림 등 특목고 입시학원 5곳의 연합체인 타임교육홀딩스에 600억여 원을 투자했다.' 그동안 학원업계에 크고 작은 외국인 투자가 이루어졌고 대부분 독자들이 익히 들어본 학원의 속사정이 이런 줄은 거의 모르셨을 것이다. 이젠 언론에서 입시 전문가 자리는 다 학원 관계자가 맡을 정도로 힘이 세졌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학원 간 경쟁이 치열해지기 때문에 다른 학원과 차별성이 있으려면 그들은 앞선 정보력과 투자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수강생들 성적을 올려야하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토종학원들이 새 정부 서열화 정책에 기대를 걸고 투자에 목을 매다보니 외국자본이 들어올 수밖에 없고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이 영업 분야에 돈이 몰린 것이다. 그러나 기대한 만큼 이익은 보장되기 어려운 사정이라 한다. 새정부 서열화 교육, 특권 교육, 3불 해제에 대해 잔뜩 기대를 걸고 들어왔으나 교육단체들의 반대와 국민적인 비판적인 여론으로 관철이 쉽지 않은 때문이다. 결국 학원의 정상적이 운영과 그 이익에 만족하기 어려운 현실이다.(☞관련 기사 : 제2의 매가스터디는 없다)
요즘 학원 심야 영업 시간 제한이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한나라당, 정부, 청와대 간 우왕좌왕하고 갈피를 못 잡는 데는 다 이유가 있어보인다. 그런데 더 걱정인 것은 이제 그 관문을 거치지 않으면 대체로 대입 '인(in)서울' 예선 탈락이 되고 특목중인 영훈중도 못가고 입시명문고인 대원외고도 못간다는 사실이다.
경찰 수사 결과 그 파행이 그 정도에서 그쳤으면 좋겠는데 혹시 감자덩굴처럼 주렁주렁 끌려나와 감춰진 더 큰 사건이 있을까봐 걱정된다. 지금까지 파악된 것만 6건이라지만 과거 내 경험도 기억나고 김포외고 입시 부정 사건도 자연스럽게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이번에 경찰이 제대로 수사한다 해도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과열이 있는 곳에 변칙이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투기가 그러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수능이라는 고졸 자격 시험으로 바꾸는 것도 고려해 보아야하며 한날한시의 전국적인 시험 결과로 대학 입학 당락이 결정되는 시대는 지양되어야한다. 고등학교 교육의 다양성을 인정하여 내신 중심 평가가 자리 잡도록 견인하고 수능을 문제은행식으로 바꾸고 여러 차례 볼 수 있도록 하는 것도 필요하다.
이명박 정부는 최근 사교육비 문제 해결과 함께 전국교직원노동조합과의 전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헛다리인 셈이다. 새정부가 정말 사교육비 절반, '학교 만족' 두 배를 실현하고 싶다면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전교조와의 전쟁이 아닌 사교육과의 전쟁을 제대로 벌여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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