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독도 문제, 일본 진보정치와 협조하라"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독도 문제, 일본 진보정치와 협조하라"

[박동천의 집중탐구]<60>과거에 대한 집착

제5부 민족주의: 집단생존 프레임
제7장 원한의 부메랑
제4절 과거에 대한 집착


민족주의는 상징적 기억을 공유하는 것인 만큼 역사를 중요시한다. 그 중에서 전쟁의 승리와 패배는 민족적 영광과 치욕이라는 강렬한 공감대를 자아내는 데 크게 기여한다. 그리고 승리나 영광의 기억보다는 패배나 치욕의 기억이 연대의 끈으로서 더 질기게 오래 버틴다. 영광의 역사는 본인이 내팽개치면 그만일 수가 있지만, 치욕의 역사는 동료에 대한 배신으로 여겨지기가 아주 쉽기 때문이다. 한국인들은 일반적으로 최근세사를 민족적 치욕과 고통의 역사였다고 가르치며 배운다. 민족주의라는 우산 아래 감정적으로 격앙될 태세를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내면화하는 것이다. 전쟁의 모형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습성이 생긴 바람에 쓸데없는 엄숙주의와 배타적인 이분법이 한국 정치의식에 똬리를 틀고 있다는 지적은 앞에서 했다(제6장 제3절). 여기서는 더욱 일반적으로 과거에 대한 미련에 집착할 때 무슨 폐해로 연결되는지를 고발하려 한다.

법률용어로 시효(prescription)이라는 것이 있다. 보통법이나 국제법에서는 시효취득이라는 것이 있고, 형사소송법에서는 공소시효라는 것이 있는데 기본적인 취지는 마찬가지다. 부동산의 경우 원래 소유권자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일정한 기간 동안 그 땅에 누군가 들어가서 사는데 스스로 뭔가 조치를 취하거나 법정에 호소해서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면, 들어간 사람에게 권리가 인정된다는 내용이 시효취득의 원리다. 이 원리를 적용해서 국제법에서도 원래 주인이 있는 영토라 할지라도 다른 나라가 영유하기 시작하는데 구경만 하고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로 일정 기간이 지나면, 원래 소유권을 가진 나라가 아니라 영유권을 실제로 행사해 온 나라가 권리를 가지게 된다. 독도에 관해 일본이 한국의 "실효적 지배"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기회만 있으면 주장하는 이유도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한국의 영토로 굳어지기 때문이다. 반면에 한국 정부는 조선말이나 해방직후에나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때나 이와 같은 국제법적 관습을 잘 알지 못해서 명확하게 대응을 하지 못했다.

얼핏 보면 강도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데, 실제로 이것은 설사 강도짓을 했더라도 별 탈 없이 충분한 기간을 지났다면 권리가 발생한다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원리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정한 기간 또는 충분한 기간이란 그야 말로 상당한 기간을 뜻하니까 바로 강도가 소유권을 가진다고 오해는 말기 바란다. 강도짓 중에 가장 큰 강도라면 찬탈, 즉 주권을 강탈하는 행위일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일제의 강도짓을 빼면, 수양대군의 강도짓이 유명하다. 수양대군은 엄연히 정당한 권리와 만인의 축복을 받아 즉위한 단종을 무력으로 쫓아내고 왕이 되었다. 이 사건은 단순히 왕 자리 하나가 바뀐 것이 아니라, 악행은 모두 자기가 도맡고 세종을 성군으로 만들고자 했던 태종의 염원, 그리고 그런 부왕의 뜻을 따라 실제로 갓 태어난 왕조의 문화적 기반을 탄탄하게 다졌던 세종의 모든 위업을 헛고생으로 돌려버린 만행이었다. 수양대군의 찬탈, 살육, 그리고 거기 앞장선 깡패들이 "훈구"라는 명목으로 행세하게 된 불의가 없었더라면, 그리하여 세종이 설계해 놓은 문화국가의 구상이 적어도 한 세대만 더 자라나 볼 기회가 있었더라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한국의 최근세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수양대군이 찬탈한 것이 틀림없고, 사육신과 생육신에게 도덕적인 정당성이 온전하게 수여되어야 하는 것도 분명하다고 할 때, 1453년 이후 1910년까지 조선의 왕들은 지위가 어떻게 되는가? 조선 8대 임금 예종부터 27대 순종까지가 모두 세조의 자손들이다. 세조가 찬탈자이므로 예종부터 순종까지도 다 찬탈자인 것일까? 단순히 말로 우겨대는 것으로 만족할 사람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앞에서(제3부 제4장) 논했듯이 1954년의 사사오입 개헌이 엉터리였다고 해서 그 후의 모든 헌법이 무효라고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영국의 보통법에서 시효취득의 원리는 바로 이런 고려 때문에 발전한 것이다.

시효제도는 도덕의 원리라기보다는 사법의 원리로서, 세속적이고 현실적인 발상에서 비롯한다. 첫째, 만약 시효제도가 없다면 현재의 소유자에 대해 누군가 까마득한 고대의 권리를 가지고 와서 나가라고 할 수 있다. 그 권리가 진짜이든 가짜이든, 그런 일이 허용된다면 재산권을 비롯한 사회의 안정적 질서는 크게 흔들릴 것이다. 둘째, 설사 최초의 취득은 강탈이나 사기 등, 불의였다고 할지라도, 그 불의 때문에 발생한 피해보다 원상 복구한다고 할 때 더 큰 피해가 초래될 수도 있다. 위에 든 세조의 찬탈이나 사사오입 개헌이 좋은 예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정복이나 찬탈이나 쿠데타라도 상당한 기간이 지나면 정당성을 획득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혁명을 비롯한 어떤 정치변동에 의해서 수립된 권력은 모두 정당할 수가 없다는 함축을 가지는데, 이는 단지 현실을 도외시한 탁상공론밖에는 될 수가 없다.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도 기본 취지는 마찬가지다. 과거에 범죄를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오랜 시간이 지나는 사이에 나름대로 선량한 시민으로 살았다면, 그런 사람을 새삼스럽게 처벌한다는 것은 지나친 복수심의 발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벌의 목적을 복수에 둔다면 공소시효에 반대할 수 있겠지만, 처벌의 목표를 교화에 둔다면 공소시효제도는 당연하다. 예컨대 살인범이라도 그 후 15년 동안 다른 죄를 짓지 않고 살았다면, 설사 그 기간만큼 교도소에 갇혔더라도 가석방이 허용될 기간이다. 그런 사람을 새삼 잡아다가 교도소에 가두고 교화할 필요는 없다. 의도적으로 공소시효를 악용해서 그동안만 도망 다니겠다는 심보를 가지고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복수심만 빼고 생각하면 오랜 기간 도망 다녀야했다는 것으로 충분히 처벌 받은 것으로 간주할 수도 있다.

캐나다는 5000달러까지 절도범은 6개월에 공소시효가 만료된다. 반면에 그 이상의 범죄에는 공소시효가 없다 (☞ 바로가기: "Statute of limitations"). 그렇다고 캐나다 사회가 복수심으로 충만한 것은 아니고, 공소시효제도의 취지는 실제 재판과정에서 반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한편, 인간성에 반하는 범죄(crime against humanity)에는 공소시효가 인정되지 않는 것이 국제적인 관례다. 나는 개인적으로 국가, 재벌 또는 폭력단과 같은 조직에 의한 범죄는 공소시효를 배제하는 것이 온당하다고 본다. 10년이나 15년이 개인에게는 충분히 긴 세월일 수 있지만, 만약 권력이나 자본이나 조직의 비호를 받게 된다면 30년이나 50년도 오히려 짧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구체적인 고려사항과는 상관없이, 일반적인 원칙으로서 나는 시효제도는 문명사회의 사법원리로 가당하다고 본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용서라는 덕성이 포함되고, 나아가 사법의 목적을 분풀이가 아니라 사회평화에 두는 세속적 관점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사회평화는 언제나 오로지 과거보다 현재 및 미래를 중시하는 관점에서만 가능하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이 좋은 예다. 과거의 억울함과 원한을 풀기로 하면 끝이 있을 수 없다. 영국이나 미국에게 책임을 아무리 물어봤자, 문제의 해결책은 나올 수가 없다. 오로지 현재의 사정을 인정하고 쌍방이 적당한 선에서 금을 그어 땅을 나누는 길이 유일한 방법이다. 물론 이 말은 구경꾼의 입장이니까 쉽게 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만큼 그 길 밖에는 평화로운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분명하다.

옛날에 내가 초등학교 다닐 적에는 짝꿍과 책상을 같이 썼는데, 사이가 틀어지면 중간에 금을 긋고 서로 네가 넘어왔다는 둥, 금이 불공평하게 그어졌다는 둥을 가지고 싸웠다. 민족 사이에 영토를 가지고 싸우는 싸움이라고 해서 이런 아동들의 싸움에 비해 본질이 크게 고상해보이지는 않는다. 이런 싸움은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들기 때문에 벌어진다. 그리고 "더 많이"가 단순한 양적 차이가 아니라 모종의 우월성을 표상하게 되면 어김없이 사태는 악화된다. 여기에 선조들의 위신, 역사에 대한 충성심이 덧붙여지면 한 쪽이 망할 때까지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역사는 잊지 말아야 하겠지만 적어도 원한은 잊는 것이 평화의 지름길이자 유일한 길이다. 이 점에서 용서는 도덕적인 덕성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세속적인 지혜인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기에 앞서, 누구보다 바로 자기 자신의 현재 삶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만이 원한 모드에서 용서 모드로 바뀔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사회의 진보진영에게는 특히 민족주의라는 이름 아래 과거에 집착하는 프레임이 전략적으로도 크게 불리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그 까닭은 우선 조선, 일제, 전쟁, 독재 등등, 과거 이야기는 젊은 세대에게 별로 흥미 있는 주제가 못 된다. 물론 젊은 세대에서도 상당한 수는 민족사에 관심을 가질 것이고, 과거의 학생운동 세대와 같은 "역사의식"을 어느 정도까지 공유할 것이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그런 적극적인 정치의식을 가진 젊은이 말고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젊은이들이다. 현실정치에서 유권자 다수의 마음을 끌어 모으는 차원, 특히 300만 이상의 부동층으로 하여금 진보 쪽으로 투표하게 유도하는 데에는 적극적인 사람들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소극적인 사람들이 관건이기 때문이다.

김구, 안중근, 류관순, 윤봉길 등, 순국선열들은 학교에서 그렇다고 하니 훌륭한 사람이 틀림없으리라 겉으로 치부는 하겠지만, 지금 20대 30대에서 그들의 삶을 따라서 나라를 위해 인생을 바쳐야겠다고 맘먹는 젊은이는 과반수는커녕 극소수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은 50-60대에서도 다수일 수는 없다. 임시정부의 주석이 곤궁한 생활을 견뎌야 한다든지, 18세 소녀가 옥중에서 고문 받다가 숨진다든지, 행사장에 도시락 폭탄을 숨겨가서 투척한다는 이야기들은 비장미가 있는 만큼, 21세기 OECD 회원국인 한국에서 개인이 따라 할 행동으로는 낯설기만 한 이야기다. 고난이나 희생이 곧 미덕이라는 얘기는 잘난 척하는 언표의 수준에서나 떠도는 소리지, 실제 사람들의 행동에서는 이미 예외적인 경우에나 해당하는 일이 되고 있다. 표를 얻기 위해서 유권자들에게 고난과 희생을 강요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만 봐도 드러난다.

다음으로, 과거에 속박되어 있으면 정치적 상상력이 크게 제약을 받는다. 독도 문제에 관해 진보진영일수록 아무 대책이 없는 것이 아주 좋은 예다. 일본의 각료 한 사람이 독도를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는 발언은 앞으로도 계속 해서 심심하면 한 번씩 나올 것이다. 정상회담에서 어떤 덕담이 오가든, 독도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언제 그것을 철회하게 될지 전혀 기약할 수 없다.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당장 일본이 그 바위섬을 차지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틈나는 대로 주장했다는 기록을 남겨두지 않으면 바로 한국의 시효취득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한국정부가 뭘 할 수 있을까?

민족주의로 아무리 중무장을 해도 일본이 독도에 대해 한 마디 할 때 우리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기껏 주일대사 소환하는 정도를 넘기 어렵다. 한국의 무역은 전체 수출액 중 7.1%, 전체 수입액 중 16%가 일본을 상대로 하는 반면에, 일본은 총수출액의 7.6%와 총수입액의 4.4%가 한국을 상대로 한다. 기어이 따지자면 한국경제가 일본에게 의존하는 정도가 일본경제가 한국에게 의존하는 정도보다 분명히 높다. 대일 수입액의 대부분은 달리 방법이 없어서 일본에게 의존하고 있는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약 오른다고 판을 걷어차면 당장 한국의 기업과 소비자들에게 손해가 더 클 뿐만 아니라, 애당초 성난다고 판을 걷어찬다는 미숙하고 폭력적인 발상 자체가 더 큰 문제다. 일본의 소행이 아무리 괘씸하더라도, 독도 문제는 짧게는 해방 직후 일본의 공작과 미국의 착오와 한국의 무신경에서 비롯된 사연이 있고, 길게는 한말에 국력이 약했던 탓이 있다. 짧게는 60년 길게는 100년이 넘는 오래된 다툼인 것이다. 앞으로도 그보다 길게 인내심을 겨뤄야 할 문제라고 보면, 적어도 이런 소모적인 다툼 때문에 "망언"이 있을 때마다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을 낭비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연합뉴스

일본의 정치인이 대개는 국내용으로 한 마디 할 때마다 화르르 들끓었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하면서 일본에 대한 반감을 축적하는 대신에, 나는 오히려 일본 우익의 망언은 무시하고 가능한 한 일본인 개개인들과 일상적인 교류와 소통을 확대하는 편이 장기적으로나 단기적으로나 도움이 되리라고 믿는다. 민족적 위신의 문제, 다시 말해 한국 쪽에서 일본을 괘씸하게 여기는 마음만 결부되지 않는다면, 사실 독도문제는 어떻게 처리되더라도 남북의 한국인 7000만여 명과 일본인 1억2000만여 명이 반목해야 할 만큼 치명적인 일은 아니다.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에 비하면 확실히 작은 일이고, 임진왜란이나 일제강점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과 일본은 적어도 외교나 경제에서는 서로 친밀한 이웃이다. 독도 영유권 주장은 일본에서 주로 우익의 입장이며, 따라서 일본에서 민족주의가 쇠퇴해서 그 문제 자체의 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어야 정치인들도 저런 소리를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도 진보진영일수록 일본 전체에 대한 반감을 민족주의로 응결시킬 일이 아니라, 일본에서 진보정치가 힘을 얻도록 협조하고 상호이해를 넓혀야 한다. 양국에서 민족주의가 원색적 감정의 거품을 걷어내고 실질적인 이익이라는 알맹이만 남게 된다면, 독도 문제는 별로 중요하게 간주되지 않는 순간 자연히 한국으로 귀속될 수밖에 없다. 한국 쪽의 주장이 훨씬 이치에 맞고, 고대부터의 자료들도 훨씬 풍부하기 때문이다. 단, 일본의 주장이 괘씸하니까 응징한다는 발상으로는 상황이 악화될 수밖에 없다. 한국이 그런 반응을 보일수록 일본에서는 별 생각이 없던 사람들까지 일본 민족주의에 동조하게 만들어져, 극우세력이 집권을 연장할 여지가 넓어지기 때문이다. 과거의 역사로부터 비롯된 문제는 현재에 대한 중요성의 정도를 낮춰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수 있다. 그래야 감정이나 위신을 결부시키지 않을 수가 있고, 그래야 꽁한 마음에는 깃들 수 없는 다양한 상상력이 날개를 달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