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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없는 '고향의 봄'…이 겨울의 끝은?

[기고] 유럽 동포와 함께한 6·15 행사

현대로 거듭나는 전통의 라인 강변과 6·15행사

5월말~6월초 푸르른 라인 강은 잔잔하게 빛나고 있었다. 라인 강 너머 평원과 언덕의 수많은 포도밭에서는 태양빛을 받아 포도가 익고 있었다. 뤼데스하임(Rüdesheim)은 프랑크푸르트에서 2시간여 떨어진 관광지로 유명한 곳이다. 뤼데스하임에는 수많은 독일이나 유럽의 명사들이 다녀갔다. 그래서 그곳의 아름다운 숲의 곳곳에는 명사들이 다녔던 자취가 표지판으로 기억되고 있었다. 주변 라인 강가의 수많은 중세 고성(古城)들은 현대인들의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또 인근의 로렐라이 언덕에서는 관광객-특히 한국 관광객-들이 부르는 '로렐라이(Lorelei)'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 관광객으로 북적대는 뢰데스하임의 아름다운 카페. ⓒ김귀옥

뢰데스하임은 인구가 1만 명 내외의 유네스코에 등재된 도시이다. 중세풍의 목조 가옥과 좁은 거리에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가게가 들어차 있었다. 어른 한 사람이 팔을 쫙 펴면 손에 닿을 듯한 수백 년 된 145미터 길이의 좁다란 골목길이 개발되지 않은 채 전통을 간직한 관광 명소로 재탄생했다. 또 1000년 전 마인츠 대주교가 소유했다는 브룀서부르크(Brömserburg)는 거대한 포도주 박물관으로 변했다.

뢰데스하임의 니더발트 고지 꼭대기에는 1871년 보불전쟁의 승리와 독일 통일을 기념하는 게르마니아 동상이 있다. 12세기 힐데가드 수녀원장에 의해 세워졌다고 하는 언덕 위의 성 힐데가드(St. Hildegard) 수녀원은 음악과 책, 포도주로 유명한 관광 명소 중 하나이다. 이 곳 수녀원의 포도주 시음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이번 여행의 기쁨 중 하나가 아닐 수 없었다.

한 폭의 그림과 같은 라인 강변의 작은 호텔에 2박 3일간 머물게 된 것은 6·15공동선언실천유럽위원회(위원장 박소은)가 개최하는 6·15 행사에 강연자로 초청받았기 때문이다. 5월 30일부터 6월 1일까지 실시된 이번 6·15 행사의 큰 주제는 "해외 동포와 통일"이었다. 이번 행사에는 독일 각지와 네덜란드에서 50~60여 명의 해외 동포들이 참가하였다.

이 행사에서는 해외 동포들이 자신의 현장에서 보는 통일에 대한 전반적인 의견과 세계화 시대 해외 동포들의 정체성 문제, 나아가 세계화와 열린 민족주의 등의 주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재독 동포들이 보는 한국 상황과 동포 사회의 위기와 과제

5월 30일 저녁 행사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애도하는 묵념으로 시작되었다. 프랑크푸르트 소재 한국 영사관에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분향소가 있었으나, 재독 동포들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그곳에 가길 꺼렸다고 한다. 그래서 프랑크푸르트 인근에 살고 있는 유럽공동위원회의 몇몇 뜻있는 분들이 프랑크푸르트 주변 지역의 '정토사'에 분향소를 별도로 마련해 두었다. 마치 서울 시내의 정부가 설치한 공식 분향소와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를 연상시켰다. 프랑크푸르트의 동포 자체 분향소에는 인근 동포들뿐만 아니라 차로 몇 시간을 달려온 일시 체류 한국인들도 있었다.

▲ 프랑크푸르트 근교 정토사 분원에 차려진 고 노무현 대통령 분향소. ⓒ김귀옥

애도로써 시작된 6·15 행사의 첫 주제 발표는 독일 유학생인 오제욱 씨의 '위기 극복과 통일을 향한 소통과 연대를 꿈꾸며'로 시작되었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실을 '정치적 타살'로 규정하며 그 배후에는 신자유주의자와 조·중·동과 같은 극우 보수 세력 등이 있다고 예각을 드러냈다. 또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이나 현재 한국 사회의 위기에 대해 진보 세력 또는 좌파 세력들도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꼬집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현재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위기의 표출이며, 그러한 위기와 남북의 반목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도 사회적, 정치적 소통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소통과 관용을 위해서는 좌우, 보수, 진보로부터 자유로운 '경계인'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수많은 흩어진 경계인들이 관용과 연대로써 소통하게 된다면, 위기와 갈등의 화해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2003년 송두율 교수 사건 이전부터 이미 '경계인'으로서 운명을 살었던 재독 동포들이기에 경계인 논의는 너무도 익숙하면서도 여전히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였다. 경계인이 관용과 연대의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화해와 탈분단적 환경이 필요하다고 참석자들은 목소리를 모았다.

5월 31일 오후 행사의 1부에서는 중국 <흑룡강신문>의 논설위원인 재중 동포 김범송 씨(한국학중앙연구원 사회학 박사)가 '재중 동포 정체성의 다변화'라는 주제로 발표를 했다. 또 원래 발표자로 예정된 재일 동포 림혜영 씨(전 희망제작소 연구원)가 불참하게 되어 글쓴이가 평소 공부와 일본 동포 사회에 대한 참여 관찰을 바탕으로 하여 '재일 조선인의 역사와 정체성'이라는 주제로 대신 발표하였다. 부언하자면 글쓴이는 1995년부터 '재외한인학회' 회원으로 활동해 오고 있다.

아무튼 두 편의 논문에서는 재중 동포와 재일 동포의 역사적, 사회적 특수성에 대한 설명과 함께 공통성이 논의되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주제는 결국 한반도 분단이 중국과 일본의 재외 동포 사회에 미친 영향과 문제로 집약되었다. 그러한 문제의 해결과 동포 사회의 자유로운 이동과 본국과의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도 동포 사회 내부의 이질성을 극복하면서 서로의 차이를 관용하는 노력이 필요하다는데 대부분의 참석자들이 공감하는 것으로 보였다.

▲ 6·15유럽공동위원회 6·15 행사장 모습. ⓒ임희길

2부 발표에서 글쓴이는 본 발표 주제인 '세계화 시대의 열린 민족주의'를 중심으로 민족문제와 열린 민족주의를 발표했다.

불편하지만 극복해야 할 민족문제

금융자본 2조 달러가 하루 24시간 동안 전 지구를 돌아다니는 시대가 이른 바 세계화 시대이다. 이미 자본에는 국적이 없고, 국가도 없다. 2007년 미국발 '서브프라임모기지론' 사태는 전 세계 구석구석에 영향을 미쳤다. 북핵 위기뿐만 아니라 경제 위기조차 국가 간의 공조로 대응하는 시대에 과연 민족문제나 민족주의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가?

더구나 냉전도 아닌 탈냉전 시대 남북에 화해의 기운이 높아져갈 무렵인 2003년. 어렵사리 방문한 송두율 교수의 체포 구속 사건은 남북 동족의 어디에도 서지 못하는 '경계인'의 비극적 숙명을 다시금 환기시켰다. 과연 그들에게 같은 민족은 무슨 의미를 지닌 것일까? 더구나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들과 국제 이주 결혼 여성으로 인해 다문화 사회와 다문화 가족이 만들어지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민족주의는 다문화 사회로 이행하는데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 아닌가? 실로 세계화 시대 민족주의나 민족문제는 시대착오의 대명사로 비쳐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된 민족으로서, 만들어진 경계인의 운명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또는 초자본과 신자유주의의 횡포에 대항하여 복지국가와 통일의 과제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민족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하며, 그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열린 민족주의가 필요하다는 취지의 발표였다.

이 발표를 둘러싼 긴 토론이 있었다. 그 토론은 유학생과 고학력자들이 많은 독일 동포사회답게 다양한 이론을 갖추고 있어서 어느 학술 토론회에 못지않은 열기를 띠었다. 그러나 토론을 뒷받침한 것에는 그들의 30년간 조국 민주화 운동으로 다져진 토론과 남북으로부터 상처 입은 경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상처 입은 이방(異邦)의 비전향 장기수

참가자들은 크게 보아 세 군으로 나눠져 있었다. 일군은 1960~70년대 파독 광부 출신과 간호사 출신이다. 둘째 군은 유학생 출신이고, 셋째 군은 상사 주재원 출신이나 주재원들, 동포2세대 청년들과 아이들이다. 광부 출신 가운데에는 1960년대 취업 상황이 좋지 않았고, 정치적 상황을 비판하여 고학력자들이 꽤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이들의 학력은 어느 해외 동포 사회보다도 높은 편이다.

6·15유럽공동위원회의 주축은 재독, 재유럽 동포 사회에서 1970~80년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위 '68세대'들의 문화혁명 속에서 혁명적 분위기의 영향을 받았다. 그런 가운데 1974년 3월 1일, 재독 동포 지식인 사회에서는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회' 줄임)가 만들어졌다. 이날 박정희 "유신독재 타도"를 외치는 성토대회 및 시위와 함께 "민건회 제1선언"이 발표되었다. 여기에 55명의 서명이 있었다. 서명자의 일부를 보면, 김길순 박사(한국학술원 원장, 간병으로 병사), 박대원(현 민건동지회 공동대표), 송두율 교수와 정정희 여사, 윤이상 교수, 이영빈 목사와 김순환 여사, 이화선 목사, 임희길(현 민건동지회 공동대표), 이삼열 교수(숭실대교수), 이경택과 박소은(현 6·15유럽공동위원회) 등.

▲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 광장에서 재독한인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설명하고 있는 김원호 선생(좌측). ⓒ김귀옥

그 후로도 그들은 남한 내 현안이 생기면 프랑크푸르트 시청 앞 성 바오로 교회(Pauls Kirche) 광장에서 시위를 했다. 이 광장은 2006년 독일 월드컵 대회 당시 재독 한인들의 축제의 장이자, 2008년 촛불 집회에서의 촛불의 광장으로 한국에도 알려졌다. 1970~80년대 그들은 남한이 민주화가 되는 게 자신들의 모든 꿈이자 미래라고 여겼다. 그들은 사재를 털어 연구소를 건립하고 자료집, 백서를 만들었다. 1980년 5·18 당시에는 외신을 통하여 신군부의 등장과 5·18의 실상을 상세하게 해외 동포 사회에 알리는 선봉장이 되었다. 또한 이영빈 목사와 이화선 목사 같은 분은 '조국통일해외기독자회'를 열어 남과 북, 해외 동포 간의 대화와 교류를 열어가는 데 앞장섰다.

그러나 1987년 민주화 이후 한국은 그들을 잊었는지도 모르겠다. 주지하듯 윤이상 선생은 동백림 사건 이후 고국의 땅을 밟지 못한 채, 혼백으로 고향에 올 수 있었고, 송두율 교수는 2008년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국내 일반인들에게는 여전히 '간첩 김철수'로 기억되어 있다. 2005년 8·15 행사 당시에는 망명객으로 타국을 떠돌던 12명이 고향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정경모 선생뿐만 아니라 독일의 박대원 선생(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출신)이나 김용무 선생(서울대 문리대 철학과 출신)은 아직도 꿈에서나 고향을 만날 뿐이다. 그들이 바로 6·15유럽공동위원회의 시인 김원호 선생이 말하는 '이방(異邦)의 비전향 장기수'이다.

▲ 6·15유럽공동위원회 6·15행사 기념 촬영. ⓒ프레시안

끝나지 않은 고향의 노래

6월 1일 행사의 끝은 '고향의 봄'으로 장식되었다. 세계화 시대 돈도, 물자도 국경을 모른 채 지구를 떠돈다. 세계화 시대, 능력 있는 사람들은 '노마드(nomad) 정신'을 외친다. 미국 월가의 큰 손들, 보보스족, EU의 유로파들에게는 민족주의는 정신 빠진 헛소리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전히 복지에는 국경이 있고, 국가 안보에는 국경이 있다. 사회적, 정치적 약자에게 국적이 없다면,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송두율 교수와 함께 경계인의 삶을 살고 있는 이들에게는 민족이란 너무도 불편한 이름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이 경계를 자유롭게 넘어서기 위한 조건 역시 민족 문제의 해결이고, 민족주의의 회복은 긴 분단과 냉전으로 인한 상처의 치료제가 될 수밖에 없다.

아직도 경상도 사투리를 진하게 쓰는 박대원 선생이나 쾰른의 택시운전사인 김용무 선생이 더 이상 눈물 젖은 '고향의 봄'을 부르지 않아도 되기를 빌어본다. 그들이 자유롭게 고향을 왕래하고 헤어진 가족들과 상봉할 수 있는 날이 바로 통일의 날이다.

* <민족화해> 2009년 7·8월호에 일부 수정 원고가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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