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원한의 부메랑
제1절 영웅숭배의 문제
제1부 제2장에서 나는 세종을 숭상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현대에 "어진 군주"를 그리워하게 되면 곤란하다는 취지로 말한 적이 있다. 이제 그 점을 좀더 일반화함으로써 이 장의 논의를 시작하려 한다.
한국사회 어린이들은 대부분 위인전을 읽으면서 자란다. 그런데 한국의 위인으로는 을지문덕, 연개소문, 김유신, 김춘추, 계백, 왕건, 강감찬, 이성계, 이순신, 유관순, 안중근, 윤봉길 등 장군 또는 순국선열이 단골로 들어가고, 세계 위인으로도 알렉산드로스, 칭기즈칸, 나폴레옹 같은 정복자들이 빠지지 않는다. 이외에도 정몽주, 이방원, 세종대왕, 이승만, 김구, 링컨, 처칠, 루스벨트 등등, 정치인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들이 인류와 한국의 역사에서 대단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므로, 어린이용 위인전집을 기획하면서 그들을 빼기는 어려우리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내 얘기는 저 사람들이 위인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고, 저런 형태의 위인전을 읽고 자라는 아이들의 맘속에 정치에 관해 어떤 프레임이 형성되기 쉬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저런 사람들이 활동한 환경은 주로 전쟁이고, 그들은 주로 적군을 죽여서 물리쳤거나 아니면 자기가 죽임을 당함으로써 업적을 세웠다. 저런 영웅들은 그저 숭배만 해야지 조금의 티끌도 묻히면 불경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지금 내가 한 이 정도의 말투에서도 뭔가 불온한 기미를 느끼며 불안해질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지금 저 사람들의 업적을 폄하할 의도가 아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저렇게 살지 않는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기어이 전쟁이 난다면 누구나 이기는 편에 서기를 선호할 것이고, 강한 의지와 결단력을 갖춘 영웅들이 지휘하는 편이 아무래도 이길 확률이 높을 것이다. 그러므로 저런 영웅들이 자기 선조의 편이었던 것을 다행스럽게 여기는 것도 인지상정이고, 설사 선조와 아무 상관이 없더라도 선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 또한 충분히 가능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전쟁이 불가피할 때의 일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쟁 자체를 별로 원하지 않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 국회의사당 로비에 세워져 있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 동상. 이순신 장군 동상의 경우 중국식 갑옷을 입고 일본시긍로 칼을 쥐고 있다고 해서 논란이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전당인 국회에 이 두 동상이 어울리는 것인가에 대한 문제제기는 거의 없다. ⓒ연합뉴스 |
그런데 우리 사회와 같은 역사적 환경에서 민족주의는 사람들로 하여금 방금 내가 지적한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도록 유도한다. 전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원하지 않는다는 본심을 드러내지 못하게 가로막고, 전쟁이란 불가피한 것이며 그때에는 민족을 위해 전사로 나서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조한다. 전쟁이 불가피한데 맞서 싸우지 않으면 노예로 전락한다. 그러나 전쟁이 언제 무엇 때문에 불가피한 것인지는 언제나 불확실성 가운데 각자가 판단해야 할 문제다. 그런데 "전쟁이 불가피하다면 싸워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전쟁이 불가피한지 않은지에 관해 호전주의자들의 선동에 따라 공론이 춤을 추기 쉬워지는 것이다. 평화의 가능성을 찾아보려는 노력 자체를 전쟁을 겁내는 나약함으로 몰아붙이는 마초이즘이 성행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역사진행에서 개인의 역할을 중시한다면 보수이기가 쉽다는 점은 앞에서(제1부 제3장 제3절) 지적했다. 그만큼 어릴 때부터 위인전을 통해 영웅의 이미지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보수적인 프레임이 무의식적으로 심중에 자리 잡기가 쉬워진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특정 개인의 성취 또는 잘못으로 간주하는 버릇이 사회적으로 만연한다면, 제도적 구조적 차원에 관한 관심 자체가 자라기 어렵기 때문이다. 앞에서(제4부 제1장) 논의했듯이 숭례문에 불이 났을 때 유홍준이 옷을 벗는 것으로 정리되는 사태에는 이와 같은 영웅주의에서 파생하는 프레임이 크게 작용하는 것이 틀림없다.
이명박 정부가 북한에 관해서 그저 김정일 탓으로만 일관하는 데에도 마찬가지 원인이 작용한다. 북한 정권의 체질이 바뀐다면 북한의 핵무장과 관련된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냥 북한 탓만 하면 체질이 바뀔까? 그럴 리는 만무하다. 따라서 책임 있는 정부라면 북한 정권의 체질이 당장 바뀌지 않더라도 문제가 커지지 않을 방법, 나아가 북한 정권의 체질을 서서히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들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겼을 때, 한 놈 지목해서 "네 죄를 알렸다"는 식으로 접근하는 미개한 사유구조 때문에 고정관념에서 도무지 빠져나오지를 못한다. 더구나 누차 지적했듯이, 이런 심보에는 위신이 항상 결부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맞는 지적을 할수록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 충고를 받아들여서 일이 성사될수록 자신이 처음에 얼마나 어리석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나중에라도 이치에 귀를 기울여서 다행이라고 사람들이 선의로 해석해 주리라는 방향으로 생각할 능력 자체가 없게 된다. 승자 아니면 패자라는 두 개의 좁은 점 말고는 다른 어떤 입지도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집단따돌림(그리고 일본의 이지메)은 여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영웅을 숭배하는 심성 속에 자연스럽게 정치사회의 사업들을 개인 차원 이상으로는 파악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생긴다. 그리고 우리/저들의 구분을 곧 선악 구분으로 연결하는 버릇에 집단 따돌림이라는 횡포의 핵심원인이 있다. 평소에 어떤 경계로 구분되어 있었더라도, 일단 통념에 따라 지탄의 대상이 나오기만 하면 종전의 구분에 상관없이 모두 "우리"가 되어 지탄받을 "저들"을 공격하도록 사유구조가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으레 자비, 이치, 균형, 정의 등은 도외시된다. 그런 것들은 모두 "우리"에게만 적용되는 것이고, "저들"에게는 무자비할수록 영웅에 가까워지기 때문이다. 신정아와 황우석과 황석영에 대해, 그리고 두 말할 필요도 없이 노무현에 대해 우리 여론이 어느 정도로 냉탕과 열탕을 속절없이 오갔는지를 보면서 적어도 이런 점들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아직 희망은 남은 셈이다.
이는 제2부에서 고발한 내용과도 밀접한 연관이 있다. 나는 거기서(제2부 제2장 제1절) 흔히 "지역주의"라고 뭉뚱그려 지칭되는 현상 중에 진짜문제를 한번 찾아 보자면 선거 시 투표성향의 지역간 편차, 패거리 사이의 관직독점 현상, 그리고 향리주의를 후보로 거론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역주의"를 성토하면서 서로에게 손가락질을 멈추지 않는다면, 이 세 가지 문제 모두 해결은커녕 갈수록 악화되리라는 취지로 주장했다. 아울러 투표성향의 편차는 자체로는 문제될 것이 없고, 다만 70% 이상의 몰표는 광주학살에서 비롯된 결과이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해결된다고 보았다. 관직독점 현상이나 향리주의 역시 자체로 큰 문제라고 볼 필요는 없으며, 설령 문제라고 할지라도 직접 타박을 한다는 것은 정치판 주변에서 노니는 사람들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설교하는 격이므로 효과가 있을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이제 여기 덧붙여 관직독점이나 향리주의의 원인에는 민족주의의 근저에 위치하는 것과 동일한 형태의 우리/저들 구분이 있음을 고발하고 싶다.
향리주의란 경계가 무상하게 변한다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민족주의에서도 똑같이 나타나는 특성이다. 김해 사람 노무현이 경상도에서 표를 못 받으며, 그러면서도 소위 동교동계로부터도 찬밥 신세였던 사정, 그랬지만 다시 전라도 지역에서 나온 강력한 지지에 힘입어 대통령이 되었다가 열린우리당 창당 이후로는 "영남민주화세력의 한풀이" 쯤으로 격하된 격심한 굴곡은 결코 "지역주의"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물론 "지역주의"라는 문구에다가 모든 문제를 몰아서 분풀이를 하겠다는 사람이라면 그 모든 일이 "지역주의 때문"이라고 우겨대겠지만, 그런 식의 말투는 기본적으로 "모든 게 노무현 때문", 또는 "모든 게 이명박 때문", 또는 "모든 게 김정일 때문", 또는 "모든 게 사탄 때문"이라고 침을 튀기는 바람몰이와 동일한 유형이다. 바로 위에서 내가 지적한 대로 한 놈 지목해서 "네 죄를 알렸다"고 으름장을 놓는 태도, 또는 제2부에서 지적한 대로 마녀사냥의 증상에 해당하는 것이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은 출신지역인 경상남도에서 108만 대 43만 정도로 뒤졌을 뿐만 아니라, 고향인 김해시에서도 10 대 7의 비율로 이회창에게 밀렸다. 다른 지역에서 나온 표 덕분에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경상도에서는 대통령은 고사하고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는 곳이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아주 단편적이고 피상적인 눈으로 보면 이것이 지역주의인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정당에 대한 무비판적인 동일시에 해당한다. 이때 동일시의 경계는 이치나 이익보다는 말초적인 감정에 따라 그어지는데, 바로 이런 것을 향리주의라고 한다. 향리주의(parochialism)란 물론 일차적인 의미는 좁은 지역에 국한된 편협한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반드시 좁은 지역적 경계에 대해서만 적용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우리 사회의 학연처럼 출신지역과는 별 상관없는 연고로 묶이는 이해관계라든지, 2007년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총기를 난사한 조승희 사건의 여파로 한국인들이 괜스레 미국인들에게 해코지라도 당하지 않을까 두려워했던 일들도 향리주의적 사유구조의 연장선 위에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바로부터 충분히 함의가 도출될 수 있겠지만, 혹시 불분명하게 느낄 독자를 위해 "민족"과 "향리"라는 것이 고정된 경계가 아님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 민족주의는 얼핏 한국과 일본, 한국과 중국처럼 민족 사이에서 문제가 되는 일인 반면에 향리주의는 동해와 삼척, 완주와 임실처럼 좁은 지역 사이에서 문제가 되므로 서로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런 차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지금 내가 비판하는 과녁은 민족주의 그 자체가 아니라, 비판과 매개를 거치지 못해서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민족주의이다. "민족"이 과연 무엇인가, "민족"의 이름으로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지에 관해 민족 내부에서 진지한 공론을 기다리기는커녕 오히려 시작도 못하게 아수라장을 만들어 버리고, 서로 자기가 "진정한" 민족을 대표한다고 설쳐대는 싸구려 감정을 나는 지금 겨냥하는 것이다. 향리주의나 민족주의나 이처럼 싸구려 감정이 뒤섞이게 되면, 자의적인 우리/저들의 구분에 따라 저급하고 단기적인 편파적인 이익만을 위해 나머지 모든 가치를 내팽개치는 성향을 낳는다.
검찰과 법원이 인혁당재건위라는 조작극을 벌이면서 무고한 인명을 사법살인할 때에도 박정희의 "민족중흥"은 민족 다수에게 호소력을 가졌고, 지금도 여전히 박정희는 역대 대통령 평가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킨다. 일례로, 2009년 6월 17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가 역대대통령 호감도를 조사한 결과는 박정희(38.1%), 노무현(36.0%), 김대중(10.7%), 이승만(3.6%), 전두환(3.2%), 김영삼(1.4%), 노태우(0.6%)로 나왔다 (☞ 바로가기). 이런 경우 박정희의 "민족"은 지리적 경계와 상관없이, 자신의 뜻에 추종하는 무리를 가리킬 뿐이다. 전형적으로 말초적인 우리/저들의 구분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박정희를 반민족으로 몰아붙이는 이른바 "민족주의진영"이 말하는 "민족"이라고 해서 의미가 고무줄이 아닌 것도 아니다. 뒤에서 다시 따지겠지만, 일제하에서 어느 정도의 친일행위까지 반민족이 되는 것인지 기준이 전혀 냉정하지가 못하고 감정에 휩싸여 있기 때문이다.
감정과 울분과 원한은 정치적 관심을 구성하는 원초적인 요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그것만으로 구성되는 정치는 곧 적나라한 무력 투쟁을 벗어나지 못한다. 문명사회의 정치는 반드시 감정과 울분과 원한의 충돌을 매개해서 평화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통로를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최근세사에서는 민족주의라는 구호가 무비판적으로 신성시되어버린 풍조가 오래되어, 정치적 현안에 관한 논의들이 안건의 본질을 파고들어가기 전에 개인적인 숭배나 매도의 차원에서 멈춰버리는 경향이 팽배하다. 이런 경향은 다시 말초적이며 원색적인 수준의 우리/저들 구분을 정치의식 안에 내면화할 뿐 아니라, 거기에 "민족"이라는 감정언어로부터 전이된 전투적 광기를 덧붙임으로써, 지독할 정도로 무지하면서 야만적인 패거리 다툼을 양산한다. 이런 패싸움에서는 항상 영웅이 되고자 하는 인종들이 설칠 무대가 제공되기 때문에, 대책이라고는 없이 극악한 저주를 전공으로 삼는 강경파들이 패거리 내부 및 대중의 주목을 받고자 날뛴다. 그 때문에 조직폭력단에서나 나타날 수 있는 야만적인 행태들이 정당이나 정치단체는 물론이고 국회, 신문사, 그리고 경찰이나 검찰을 비롯한 각종 단계의 정부권력에서 자주 드러날 수밖에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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