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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공부 중…MB가 고맙고 또 고맙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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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공부 중…MB가 고맙고 또 고맙구나"

[기고] 미래를 위한 일상적 실천의 정치

지금 한국 사회는 거대한 정치의 학습장이다. 학습의 내용은 간명하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를 계기로 이명박 대통령으로 대변되는 대한민국 수구 권력동맹(청와대-한나라당-조·중·동-경찰-검찰-재벌-(대)기업 등)의 얼굴을 명료하게 확인한 것이다. 학습의 결론은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독재체제인 대한민국의 수구 권력동맹은 정치경제적, 사회적 금치산자이기 때문에 '못살겠다, 갈아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학습은 여전히 진행 중이며 학습이 제대로 된 것인지는 빠르면 올 하반기의 재·보궐선거와 내년 5월의 지방선거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그 2년 후의 국회의원 선거는 그 학습의 결정적 고비를 이룰 것이다.

당연히 수구 권력동맹은 점점 더 과격해질 뿐 아니라 이들을 거의 무조건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이나 정치 학습 과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적지 않다. 그러나 작금의 다양한 여론조사를 종합해보면 과반수이상의 시민들이 수구 권력동맹에 파산 선고를 내린 것은 확실하다. 과제는 파산 선고의 효력을 장기적으로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이다.

거대한 벽과 일상적 실천

수구 권력동맹은 많은 사람들에게 넘기 어려운 거대한 장벽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무기력과 공포심을 조장하고 체념 효과도 가지고 온다. 지금 이 벽을 극복하기 위한 장·단기적 과제를 두고 많은 논의들이 정당 차원에서, 사회단체 차원에서 진행되고 있다. 당연한 일이고 시급한 일이며 극히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 중 하나는 거대한 장벽을 부수면서 넘어가는데 반드시 거대한 망치만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거대한 변화를 이루어내는데 거대한 부정만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는 일상적 실천의 정치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대한 망치도 필요하지만, 나날의 일상에서 우리들이 작지만 질기게 실천하는 비판과 저항이 끝내는 거대한 장벽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바로 그것이 지금 요긴한 과제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거리의 정치, 집단의 정치에 버금갈 만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일상적 실천의 정치란 그럼 무엇인가? 추상적으로 풀이하면 그것은 정치와 역사를 자기의 일상생활로, 자기의 내면으로 끌어들이고자하는 각자의 노력을 말한다.

정치와 역사를 자기의 것으로 내면화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역사에 휩쓸려 가는 부나비 같은 존재들에 머문다. 집단의 정치학, 거리의 정치학에 치중하려는 것은 그것이 어떤 의미에서는 더 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익히 경험하듯이 거리에서, 광장에서, 집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으로의 귀환에서 우리는 정치적 실천의 자부심과 동시에 뼈저린 허망함을 느낀다. 그 허망함은 집단의 정치와 우리의 일상 사이에 존재하는 도저한 거리에서 비롯된다. 자유로운 정치적 실천의 시간과 공간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집안에서, 동네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마주치는 일상은 거리와 광장에서 우리가 만난 집단의 정치학, 투쟁의 정치학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어떻게 보면 초현실적인 이미지처럼 우리를 휘감는다. 우리를 뒤덮는 바로 그 두꺼운 벽, 우리가 흔히 구조라고 부르는 그 벽을 넘어서는 일은 그러면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것은 일상의 실천에서부터이다. 일상적 실천의 노력이 쌓이고, 또 그렇게 하는 사람이 지금보다 더 많을수록 저항은 단단해지고, 변화는 더 빨리 찾아오며, 그 변화는 또 더 오래 가는 법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 추모 열기는 수구 권력동맹과의 한판 싸움이 불가피하는 걸 확실히 가르쳐줬다. 자, 이제 어떻게 싸울 것인가? ⓒ프레시안

생활정치의 항목들

그러면 일상적 실천의 정치학은 어디에 있는가? 말 그대로 일상적 실천의 정치는 우리 주변 어디에서나 항상 가능하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나서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참여해야 한다.

50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하면서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조문을 표했다면, 또 지금도 그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다면, 그 중의 절반, 아니 절반의 절반에 해당하는 우리들이 조·중·동을 끊어버리고 좋은 신문을 읽는다면, 삼성제품과 서비스 대신에 다른 회사의 제품과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작든 크든 힘닿는 대로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의 건강한 시민·사회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하거나 후원한다면, 에버랜드에 놀러가는 대신에 올 여름에는 아이들과 함께 역사 체험으로 봉하 마을에 간다면, 공정무역, 공정거래와 같이 착한 기업과 윤리적 생산자들의 물건을 찾아 착한 소비를 한다면, 단체들은 또 단체들대로 서로서로의 연대를 넓혀간다면, 또 이외에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는 생활정치의 항목을 실천한다면, 그리고 혼자보다는 여럿이 한다면, 거대한 장벽은 이미 무너지기 시작하는 것이고 2009년의 정치 학습은 이미 긍정적인 결론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말할 나위 없이 개개인의 실천이, 또 소규모의 실천이, 권력과 자본을 바탕으로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수구 권력동맹과 결코 대등하지 않다. 또 일상적 실천의 항목들을 보고 그것이 정치를 왜소화하는 것이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또 규모 있게 조직화되지 않은 저항이 가지는 한계도 분명하다. 맞다. 기실 일상적 삶의 정치는 꽃도 십자가도, 이름도 명예도 주어지지 않는 행위이다. 그러나 그것은 삶의 방식으로 깊게 뿌리내리는 정치라는 점에서 오히려 매우 강력한 사회적 행위이며, 그것을 바탕으로 여럿이 함께할 때 비로소 저항은 더욱 힘 있게 꾸려질 수 있다. 데모크라시와 리퍼블릭, 민주주의와 공화국의 토대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또 오늘날의 네트워크 시대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은 얼핏 약해보이는 개인들의 무수한 연결체가 매우 강하다는 점이다. 동시에 네트워크 시대는 많은 부정적 현상들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개인들이 약하고 동떨어진 외톨이들이 아니라 사회적 공동체의 일원임을 명료하게 느끼게 해 준다는 점이다. 집단지성이라는 말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미래를 위하여

사회는 혼자 사는 곳이 아니며, 또 사회가 혼자 사는 곳이 되지 않도록 하는 큰 책임이 국가에 주어져있다. 대한민국의 삶이 대체로 고통스러운 것은 해방 이후 오늘날까지 국가가 이런 역할을 거의 하지 않아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각 국가가, 특히 이명박 정권이 수구 권력동맹의 일선에서 폭력과 약탈을 일삼는 독재체제로서의 소임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검찰, 법원 등이 법과 무력을 동원하는 용역 구사대 노릇을 할 때, 조·중·동 같은 신문이 이명박 정권의 홍보실 역할을 수행할 때, 대통령이 기업의 사장이고, 청와대는 기획조정실, 정부 각 부처는 기업 영업부 내지 현장 사무소 수준으로 일할 때, 한나라당의 국회의원들이 이 기업의 이사 정도로 처신할 때, 친기업 정부가 기업주와 손을 잡고 직·간접적으로 노동자를 탄압할 때, 시민들은 민주공화국의 주권자가 아니라 이 회사의 말단 직원정도로 간주되고, 국가와 사회에 대한 희망과 신뢰는 지리멸렬해지면서 대한민국은 쇠약해진다. 바로 대한민국의 수구 권력동맹이 파산선고를 받은 이유이다.

2009년 대한민국의 정치학습이 참으로 귀중한 것은 수구 권력동맹의 실체기 이렇다는 것을 수많은 이들이 눈과 몸으로 명료하게 확인했다는 점이다. 이를 바탕으로 수구 권력동맹의 벽을 넘어 희망과 신뢰에 기초한 미래의 나무를 심는 것은 우리 시민들의 몫이다. 수구 권력동맹은 본래 자신들만의 미래를 꿈꿀 뿐 모두의 미래를 염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의 수명을 오히려 단축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벽을 넘어 새날을 여는 위대한 시민의 출발점은 개개인의 실천이 담보되는 일상의 정치학이다. 이것은 정치를 사적인 행위로 왜소화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이다. 또 규모 있는 조직과 집단과 거리의 정치학이 필요치 않다는 것도 아니다. 다른 것 제쳐두고 이것부터 하자는 단계론을 말하는 것도 아니다. 거듭 강조하는 것은 역사에 투신한다는 것이 커다란 거부의 행위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나날의 삶에서 여럿이 이루어내는 작지만 커다란 실천이 물결을 이루면서 자연스럽게 조직과 연결될 때 민주와 정의, 그리고 평화를 여는 미래의 역사는 새롭게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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