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한국 민족주의의 과잉
제2절 정체성과 배타성의 경계
키 작은 사람보고 땅딸보라고 부르면, 키 큰 사람보고 꺽다리라고 부르면 어떻게 반응할까? 어떤 사람은 모욕감을 느끼겠지만 어떤 사람은 가볍게 넘길 것이다. "땅딸보"나 "꺽다리"는 둘 다 경의보다는 가볍게나마 놀리는 뜻이 들어간 단어다. 그렇다면 영리한 친구에게 천재라고 부르고 둔한 친구에게 백치라고 부르거나, 돈 많은 자에게 부자라고 부르고 돈 없는 자에게 거지라고 부르거나, 얼굴이 반반한 동무에게 미녀라고 부르고 잘 안 가꾼 동무에게 못난이라고 부르면 어떨까? "백치", "거지", "못난이" 등의 표현이라고 해서 언제나 누구에게나 모욕적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는 "천재", "부자", "미녀" 따위 지칭으로도 모욕감이나 상처를 받을 경우가 있다.
한 개인의 정체는 나이, 성별, 키, 몸무게, 체형, 생김새, 성격, 고향, 종교, 출신학교, 직장, 기타 등등, 누구나 무수한 속성들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둘 이상의 개인들에서 모든 속성들이 일치하는 경우를 찾기는 어렵지만, 어떤 하나의 속성만을 보면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공유된다. 키 170cm의 남성이라고 범주를 잡으면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이 아마 수백만 명은 될 것이고, 경상도 예천에서 태어나 자란 무신론 40대 여성 쯤으로 특화해도 아마 수백 또는 수천 명을 헤아릴 것이다. 이처럼 특정한 개인적 속성을 중심으로 결합된 집단이 정치적 요구를 내놓는 것을 정체성의 정치라고 한다. 오래된 것으로는 노동운동이나 여성운동이 있고, 최근의 것으로는 동성애자라든지 장애인의 권익을 주장하는 형태가 있다.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소수종족집단들이 차별을 받지 않기 위해 기울이는 정치적인 노력도 이에 속한다.
전 세계를 묶어서 하나의 사회라고 생각하고, 민족 또는 종족을 경계로 사람들을 구분하면서, 그 중에 지배자 민족을 굳이 추려내기로 한다면 한민족이 지배자에 속한다고 볼 사람은 한국인 중에 별로 없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떤 집단이 지배집단인지를 말하라고 하면 엄청나게 엇갈린 대답들이 나올 것으로 보인다. 혹자는 영미를 합해 앵글로색슨, 혹자는 단순히 국가를 가리켜 미국민족, 혹자는 백인종을 말할지도 모르고, 혹자는 가까운 장래에 중국의 한족이 지배자로 등장하리라 예상할 수도 있을 것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충실한 유물론자라면 어떤 인종보다도 눈먼 자본이 지배한다고 말할 것이다. 구체적으로 지배집단 또는 지배계급을 어떻게 지목하든지, 세상을 특정한 지배자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보면 한민족이 그런 지배자라고 볼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다. 이처럼 전세계를 하나의 사회로 보면 한국 민족은 한쪽 구석에 좁은 자리를 차지했을 뿐, 핵심에서는 상당히 비껴나 자주 차별과 소외의 설움을 겪어야 하는 불쌍한 처지인 것처럼 보이기가 쉽다.
월드컵이나 올림픽 같은 가시적인 경쟁이 벌어질 때, 기대했던 만큼 경기 결과가 신통치 못할 때 판정이 불공정했다는 불평이 쉽게 나온다든지, 유학생들이 걸핏하면 인종차별을 들먹이는 데에, 근거가 있을 때도 없지는 않지만 많은 경우 단순한 소외감의 표현에 불과한 것도 사실이다. 이런 태도들은 기본적으로 국내에서도 경기에서 이기면 자기가 실력이 뛰어났다고 생각하고, 지면 판정이 불공평했다고 핑계를 대는 태도와 같다. 재판에서도 마찬가지로 이기면 사필귀정을 외치고 지면 무전유죄라는 둥, 정치적인 판결이라는 둥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의 정서와 통한다.
물론 경기장이나 재판정에서 오심이나 불공정한 판정이 드물지만은 않을 것이다. 판관들의 주의소홀이나 착각으로 인한 실수도 있고, 개인적인 편향성이 판결에 반영될 수도 있다. 개중에는 아예 청탁이나 뇌물을 받고 판정을 왜곡하는 자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들은 모두 개별적인 차원으로서, 아예 뿌리를 뽑아서 미연에 방지할 길은 없고, 단지 발생하게 되면 그때그때 정황에 따라 적절한 사후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사회개선을 위해 고려할 수 있고 고려해야 할 문제는 제도적, 체계적, 구조적 차별이나 불공정이 있느냐는 차원에 국한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국제사회에서 한국인 또는 한민족이 단지 한국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무슨 제도적, 체계적, 구조적 차별을 받는지 나로서는 아는 바가 없다. 개별적인 사례에서 드물게나마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대접을 받는 경우가 실제로 없지는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한국인이 현재의 지구촌에서 체계적으로 소외당하는 종족집단이라고 봐야 할 증거는 상상할 수도 없다. 개별적인 사례로 보면 영국인, 미국인, 일본인, 기타 어떤 다른 민족에 속한 사람이라도 자기가 그런 민족에 속한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경우는 있을 수 있다. 개별적인 사례로 봐야 할 문제를 민족적인 문제로 과장하는 버릇이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외부세계 때문이 아니라 당사자의 피해의식 때문이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2009년 3월 3일 뉴질랜드에서 한 한국인 유학생(17세)이 수업 중에 교사를 공격하는 일이 있었다. 교사가 뒤돌아 화이트보드에 뭘 쓰고 있는 사이에 준비해 간 칼로 찌른 것이다. 다행히 큰 부상은 입지 않았고, 그 학생은 현재 보석 상태에서 잘못을 인정하고 선처를 탄원하면서 7월 30일로 예정된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이 일 자체는 불행한 일이지만 서로 벌 받을 일은 벌 받고 용서할 일은 용서하며 반성할 일은 반성하는 가운데 처리될 수밖에 없다. 내가 거론하고 싶은 대목은 사건 직후 일부 한인들이 보인 반응이다.
저 학생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그 교사는 남아프리카 출신 백인으로 일본어를 가르치는 49세 남성이었다. 학생의 친구들이 전한 바에 따르면 평소에 그 교사가 한국전쟁에 관해 "한국판 남북전쟁"이라고 표현하고, 한 번은 그 학생이 수업 중에 졸자, 그런 식으로 졸고만 있으면 "북한 사람들이 너를 총으로 쏴서 죽일지도 모른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모욕이 될 수도 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실없는 농담일 수도 있다. 교사로서 주의가 산만한 학생에게 약간 강한 표현으로 꾸짖은 것으로 볼 수도 있고, 교사로서 어린 학생의 여린 마음을 헤아리지 않는 경솔한 행동으로 볼 수도 있다. 좌우지간 저 정도의 증거만으로 교사의 "인종차별"을 들먹일 수는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가 인종차별적이었고, 그 때문에 학생의 공격을 도발했다고 말하려면 저 정도를 훨씬 능가하는 확실한 증거가 있어야 한다. 그가 남아프리카 출신 백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를 인종차별주의자로 몰아간다면, 바로 그것이 인종차별이고 전횡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한인들은 "인종차별"을 처음부터 당연시하면서 한인 차원의 집단적인 대응을 시도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까지 그런 주장을 공언하는 사람은 없는 것 같다. 나는 당시에 내 블로그에, 성급하게 흥분해서 "인종차별"부터 들먹이지 말고 구체적인 증거들을 수집하라는 취지의 글을 올렸다 (☞바로가기, 「뉴질랜드 법정에 선 한국 소년」 , 「전횡이 습성화된 우리 정서」. 내가 너무 "차갑다"는 둥, "그들의 신발을 확실히 신었다"는 둥, 나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댓글들이 여럿 달렸고, 내가 답변을 하자 자연스럽게 논쟁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은 한결같이 구체적인 증거가 없이 "인종차별"을 성급하게 단정하면서, 그런 속단에 편을 들어주지 않는 내 태도를 성토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두 번째 예는 "동해"와 "일본해"라는 명칭을 둘러싼 한일 간의 논쟁이다. 다른 나라가 발행하는 지도에 그 바다 이름이 "일본해"로만 되어 있을 때, 우리는 "동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는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여기 감정이 개입되는 것은 아주 곤란하고, 자칫하면 민족적 위신은 고사하고 민족적 망신을 자초하기가 쉽다고 생각한다. 상황을 좀 객관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아주 비슷한 사례들을 우선 살펴보자.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도 바다가 있다. 영어로는 잉글리시 채널(English Channel, 즉 영국해협)이라고 부르고, 프랑스어로는 라망슈(La Manche, "소매" 모양이라는 뜻)라고 부른다. 그래서 영어로 표기된 지도에는 보통 영어 이름만 쓰고 프랑스어로 표기된 지도에는 보통 프랑스 이름만 쓴다. 한국어로는 이 바다를 영불해협이라고 할 때도 있고 영국해협이라고 할 때도 있으며, 드물게는 라망슈 해협이라고도 쓴다. 어쨌든 이 바다를 한국어로 영국해협이라고 표기한 지도를 보고 프랑스에서 라망슈를 병기해달라고 항의했다거나 제안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바다는 에스파냐어(Mancha), 포르투갈어(Mancha), 이탈리아어(Manica), 그리스어(Manchēs) 등, 지중해 국가들은 프랑스어 명칭과 비슷한 발음으로 부른다(뜻은 반드시 같지는 않다). 물론 이 때문에 영국 정부나 어떤 영국인이 영어 명칭을 병기하라고 요구했다는 말도 나는 들어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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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로 된 지도에서 "동해" 옆에 "일본해"라는 표기를 병기하지는 않는다. 일본사람들이 그 바다를 "일본해"라고 부를 때 "동해"라고 병기하라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문제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제3국이 그 바다를 "일본해"인줄만 알면 한국인의 입장에서 곤란할 것 같다는 점일 텐데, 구체적으로 어떤 점이 곤란할지를 좀 따져 보자. 이번에는 "대한해협"의 경우와 대조해보자.
일본은 이 해협의 국제적 명칭이 Korea Strait로 되어 있는 데 대해서 특별히 시비를 걸지 않는다. 한국은 일본이 이에 관해 시비 걸지 않는다는 사실을 당연시한다. 한국은 "일본해"(Sea of Japan)라는 명칭을 일본이 고집하면서, 심지어 양국간에 합의가 되지 않으면 "동해"(East Sea)를 병기하도록 하자는 제안마저 거부하는 것을 보면, 그 바다를 "일본해"로 부르는 관행을 국제적으로 확립함으로써 독도 영유권 문제에서 이용하려는 속셈이 있다고 의심한다. 일본은 바다의 명칭과 영유권은 상관이 없고, 단지 Sea of Japan이라는 명칭이 관행상으로 확립되어 있기 때문에 바꿔야 할 이유가 없다는 입장이다.
이 문제 자체를 풀자면 청해(靑海, Blue Sea) 따위 어느 한쪽의 주관적 시선이 들어가지 않은 명칭으로 타협을 보든지, 아니면 쌍방 중 한쪽이 일방적으로 양보하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지금처럼 국제수로기구(IHO)나 유엔지명표준화회의(UNCSGN)가 열릴 때마다 한국과 북한은 의제를 상정하려고 노력하고 일본은 그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겨룸이 계속될 것이다. 이 문제를 거론한 까닭은 이 자체에 관해 내가 뾰족한 해답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고, 이런 문제의 본질이 어떤지를 우리 시민들이 좀더 깊게 음미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본질이란 방금 말한 대로다. 쌍방 중 한 쪽이 양보하거나 제3의 대안으로 합의가 없다면 현재와 같은 줄다리기가 계속된다는 얘기다. 이 점을 음미해보면 몇 가지 생각할 점이 더 따라 나온다.
첫째, 이 명칭이 어떻게 결판이 나든지 안 나든지 보통 사람들 대다수의 일상생활에 큰 차이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정부 담당부서나 관련 시민단체에서는 지속적으로 추구하고 홍보하되, 일반국민들이 일희일비하면서 감정적으로 격앙할 일은 아닌 것이 틀림없다.
둘째, 이 문제는 두 가지 차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국제수로기구나 유엔지명표준화회의에서 명칭을 "결정"하는 차원이고, 다른 하나는 각국이 나름대로 관용어로 정착된 명칭으로 부르는 차원이다. 국제회의에서 표준을 정하는 차원에서는 우리 정부의 입장을 표명하고 요구할 필요가 있다. 그 경우 IHO나 UNCSGN은 일본이 양보하지 않는 한, Sea of Japan을 버리고 East Sea(북한은 East Sea of Korea를 선호)를 채택할 리는 없다. 한국이 현실적으로 얻을 수 있는 최대한은 두 명칭을 병기하는 정도에 그친다고 봐야 온당하다. 그랬을 때 Sea of Japan(East Sea)로 쓸지, East Sea(Sea of Japan)으로 쓸지를 가지고 또 논쟁이 벌어질 수 있는데, 나는 그런 정도는 세계 각국의 지도 만드는 사람들더러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두는 것이 우리 자신의 마음의 평화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다.
셋째, 이 바다의 이름은 러시아어(Японское море), 프랑스어(Mer du Japon), 독일어(Japanisches Meer), 에스파냐어(Mar del Japón), 덴마크어(Japanske Hav), 중국어(日本海) 등 대부분의 나라에서 "일본해"라는 방식으로 관용화되어 있다. 위키피디아의 각국어 버전을 통해 살펴본 바로는 대부분 한국명칭으로는 "동해", 북한명칭으로는 "조선동해"임을 적어놓았고, 덴마크어 위키피디아는 한국식 명칭 "동해"를 자기네 말로 바꾸면 Østsøen 이 된다고 표시도 해놓았다. 중국어 위키피디아는 물론 한자로 표기가 용이하므로 한국은 "東海", 북한은 "朝鮮東海"라 부른다고 하면서, 기사에 첨부한 지도에도 병기를 했다. 이처럼 각국어의 관용적 용례 차원에서 어떤 나라가 "일본해"에 해당하는 명칭만을 고수하든, 아니면 "동해"에 해당하는 명칭을 새로 쓰거나 적어도 지도에 병기를 하든, 나는 그 때문에 그 나라에 대해 특별히 섭섭하거나 고마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주장하고 싶다. 또 각국 정부나 지도제작자에게 우리는 동해로 부른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서 곤란한 부담을 주기보다는, 우리 정부가 영어 또는 각국어로 된 지도를 제작해서 책자나 인터넷 문서로 유포하는 것이 우리의 품위를 지키면서 실효도 거둘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넷째, 아주 이상적으로만 말한다면, 나는 이런 명칭 때문에 인접 민족들이 다투면서 제3국들을 서로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자 애를 쓰는 일은 없는 세상에 살 수 있다면 더 행복할 것이다.
뉴질랜드에 유학 왔다가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학생과 동해바다 명칭을 둘러싼 논쟁, 두 사례를 통해 내가 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어떤 일에 대해 감정을 앞세우다가는 도리어 손해를 보기가 쉽고, 위신도 깎이게 된다는 점이다. 민족주의는 대부분 민족의 위신을 어떤 다른 가치보다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한국 민족주의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되면 별일 아닌 것을 가지고도 위신을 따져서 의미를 크게 비약시키기가 쉽고, 그럴 때는 으레 사안의 본질과 범위를 냉정하게 구획해서 불필요한 확산을 차단하기보다는, 오히려 주변에 산재한 온갖 쟁점들을 뒤죽박죽으로 섞어서 결국 개인적인 자존심까지 결부시키고 만다. 이런 태도는 국제적으로 다른 민족들과 더불어 사는 데 대단한 불편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대화나 토론을 통해서 유익한 공존의 길을 생산하는 데 커다란 장해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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