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복 선생을 생각하면 달과 손가락의 비유를 맨 먼저 떠올리게 된다. 무엇보다 그가 일관되게 강조하는 언어의 관념성이 선불교에서 말하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상통하기 때문일 것이다. 손가락이 아니라 달을 보아야 한다는 비유는 불교 경전에 이론적으로 집착하는 것을 경계하고, 깨달음의 실천궁행을 중시하는 뜻이다. 그렇듯이 그도 실천과 무관한 논리적 언어의 관념성을 경계하고, 인간관계 속에서 실천적으로 검증된 품성과 사상을 중시한다.
그런데 2009년 5월 <신영복 함께 읽기>(돌베개 펴냄)를 읽으면서, 달과 손가락의 비유가 담고 있는 또 다른 함축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것은 글의 내용과 글쓴이의 삶 사이의 깊은 관계였다. 숱한 지식인들과 지인들이 공감하고 감동하면서 그의 사상과 삶을 전달하고 있는 이 책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같은 내용이라도 말하는 사람이 누구냐에 따라, 또 말하는 방식이 어떠하냐에 따라 공감과 긴장의 정도가 달라지는 경험을 종종 한다. 이 책에 담겨 있는 신영복 선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깊은 공감의 이유는 무엇일까? 진보적 독자뿐만 아니라 보수적 독자에게도 울림이 있고, 지식인뿐만 아니라 일반 생활인에게도 공감을 자아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 진보주의가 걸어온 길을 상징하는" 그의 감옥 생활, 혹은 "현재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유하기 위해 누군가 치러야 했던 역사적 희생"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감옥 생활을 통해 벼려진 그의 촌철 같은 성찰, 각고의 노력으로 연마된 품성, 정감과 배려의 글쓰기 방식에 있다이다. 좌파에게는 진보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연 사상가로, 우파에게는 부드럽고 편안한 좌파로, 생활인에게는 인생의 지혜를 전달하는 온화한 수필가의 모습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책에 나와 있는 신영복 선생에 대한 평가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과 관계론의 인간 철학에 기반을 둔 문명론적 진보주의자", "증오를 부추기는 투쟁 패러다임의 덫에 의문을 제기하는 구도자", "인도적 사회주의자" 등 다양하다. 이 짧은 글에서는 신영복 선생의 책을 읽으면서 크게 공감한 두 측면을 중심으로 내 나름으로 이해한 그의 생각을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우선 삶의 현장에 기초하여 인간 변화와 사회 변화를 결합하는 그의 방식은 비록 논리적으로 체계화하여 제시된 것은 아니지만 매우 의미 있는 성찰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음으로 우리 문화의 관계론적 전통의 계승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다양한 삶의 현장의 모순을 고민하고 해결하는 데 실천적으로 중대한 의의를 지닌다고 생각한다.
인간 변화와 사회 변화의 결합 방식
▲ <신영복 함께 읽기>(강준만 외 지음, 돌베개 펴냄). ⓒ프레시안 |
개인의 실존적 자각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사회 구조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의 문제가 엄연히 존재한다. 사회구조적 모순에 대한 이러한 강조는 마르크스 철학에서 그 전형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사회 제도나 구조는 이해관계에 의해 얽혀진 공고한 결합체이므로 인간이 쉽사리 바꾸거나 통제할 수 없는 자체 고착성과 운동성을 갖는다. 마르크스는 이러한 사회적 관계망, 구조를 인간 개개인의 의지, 의도와 독립된 객관적 조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및 경제적 구조를 변화시키면 인간의 정신도 자동적으로 변화되는가? 사회주의의 역사적 실패가 보여주는 것은 제도 혁명, 정치 혁명만으로 인간은 변하지 않으며, 인간 변화를 동반하지 않는 그 어떤 사회 변화도 사상누각일 뿐이라는 점이다.
사회구조의 변화만으로는 해방된 인간의 출현을 기대할 수 없고, 개인의 도덕적 변화만으로는 해방된 사회를 가져올 수 없다면, 사회와 인간의 변화는 양자택일의 관점, 선후의 문제로 취급될 성격이 아니라는 것을 함축한다. 사회 변화와 인간 변화를 선후문제로 볼 경우, 끝없는 순환논쟁이 있을 뿐이다. 이는 비단 기독교 내의 구원 논쟁뿐만 아니라 실존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대립을 포함한 여러 철학 사상에도 반복되는 논쟁이기도 하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는 신영복 선생의 주장은 인간 변화를 더 중시하는 입장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인간의 도덕성에 대한 강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회 구조의 경시와는 거리가 멀다. 그가 인간 변화를 주장하는 맥락은"다시는 뒤집어지지 않는 불가역적(不可逆的) 사회 구조의 변화"를 이끌어내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가 말하는 인간변화가 도덕적 주관주의와 구별되는 지점은 삶의 현장(<더불어 숲>) 개념에 있다.
삶의 현장과 무관한 인간의 도덕적 각성이나 실존적 자각은 그 자체로는 결코 새로운 사회 변화를 이루어낼 수 없다. 그가 말하는 인간 변화는 개인적 차원의 인격 완성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삶의 현장에 튼튼히 기반을 두고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더불어 길러지고 지탱되는 역동적인 삶의 방식과 과정을 의미한다. 그는 이를 "나무의 완성이란 낙랑장송이 되는 게 아니라 다른 나무들과 함께 숲이 되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인간 변화는 이상적이고 완성된 인간의 모습을 상정하는 개념이라기보다, 관료적 힘, 자본의 힘, 도그마의 지배에 휘둘리지 않고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더불어 새로운 삶의 방식을 모색하는 주체들의 실천적 역량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교육, 환경, 교통, 빈민, 농민, 노동 등 수 많은 삶의 현장 가운데 어느 한 곳에 우선적 중요성을 부여하는 방식을 반대한다.
과거 좌파는 소시민적 일상생활을 부정하고 사회 변혁적 요구에 충실한 인간상을 강조하면서, 특히 노동 현장을 특권화함으로써 대중의 현실적 정서를 무시하는 한편, 다양한 삶의 현장에 서열을 부여하였다. 그가 볼 때 대의 혹은 대안 제시란 이름의 관념적 전위성은 이상주의적 사고의 결함에서 비롯된다. 바람직한 인간상이나 사회상을 미리 규정하는 이상주의적 발상은 실천을 도식화하고, 일반대중이 접근하거나 결단하기 어렵도록 만든다. 그래서 그는 많은 이들이 현실적으로 몸담고 있으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영역, 즉 학교나 기업과 같은 우리들의 일상적 삶의 영역을 실천의 장으로 삼으면서 긴 호흡으로 주체적 역량을 키워나갈 것을 제안한다.
우리 문화 속의 관계론적 전통
신영복 선생의 최대 화두는 관계론이다. 그의 관계론은 자본주의뿐만 아니라 서구적 근대 문명 전체를 비판적으로 겨냥하는 근대 극복의 문명론적 비전이다. 그의 관계론은 삼라만상의 참된 모습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존재론적 측면과 인간 사회의 구성 원리를 의미하는 사회철학적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우선 관계론은 세계의 기본 구조를 개별적 존재들의 집합으로 보는 '존재론'과 달리 상호 연관된 관계망으로 이해한다. 존재론을 존재의 참 모습을 밝히는 철학적 탐구로 이해하는 서양 철학의 용법에서 보면 그의 관계론도 일종의 존재론에 해당한다. 그는 서구 근대적 사유의 철학적 바탕인 '존재론'을 비판하면서, 유불도의 동양 철학에 공통적으로 관류하는 관계론을 세계관적 대안으로 내세운다.
또한 그의 관계론은 사회 구성의 원리를 의미한다. 여기서'존재론'은 개인이든 집단이든 국가든 개별적 존재가 배타적으로 자기를 강화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구성 원리를, 관계론은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실천적 연대론을 각각 의미한다. 그의 연대론은 관계론의 사회 구성적 실천 원리로서, 인성의 고양, 사랑, 자유, 평화, 화이부동 등 윤리적 가치를 포함한다. 하지만 이러한 윤리적 덕목은 개인 윤리적 차원이 아니라 사회 변혁의 주체적 역량을 강화하는 맥락에서 전투적, 실천적 의미를 지닌다.
이상 간략하게 요약해본 신영복 선생의 관계론은 동서 문명의 본질적, 우열적 이분법의 혐의가 있음에도 그 자체로 21세기 한국 사회의 방향에 대한 고심 가득한 성찰을 담고 있다. 내가 특히 그의 관계론에 공감하는 부분은 우리 문화 속의 관계론적 전통에 대한 언급이다. 그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준거를 동양 철학에서 찾고자 한 동기는 서구적 가치에 매몰된 우리 사회의 지적 불구성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 문화적 정체성을 상실한 지적 식민성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도 물론이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의 몸에 체화된 정신적 문화를 사회 변혁의 동력으로 삼으려는 그의 문제의식에 커다란 공감이 갔다.
그에 따르면 관계론의 사상과 정서는 특히 우리의 문화와 정서 속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 두레, 계 등 상부상조의 관계론적 전통은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폐기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우리 삶의 여러 영역에서 그리고 우리의 심정에 많이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삶이 영위되고 완성되는 곳도 인간 관계 속에서이며 사후에 남아 있는 곳도 인간 관계 속이라는 '관계론'이 한국의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리 문화 속의 관계론적 전통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서구적 준거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화 전통 속에서 인류의 공감을 자아내는 보편적 사유를 재구성하는 학문적 주체성의 측면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실천적 동력을 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서양 문화가 공식적인 제도나 생활양식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밑바닥을 흐르는 지하수처럼 전통적 가치관과 정서 역시 간단없이 지속되면서 한국인의 일상적 삶과 마음에 여전히 영향을 주고 있다.
한국인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소수 지식인의 이론적 고안이 아니라, 평범한 한국인이면 누구나 동의하고 자연스럽게 호응할 수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관계론적 전통은 여전히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적 삶 속에 내면화되어 있는 규범적 잠재력의 원천이다. 다양한 삶의 현장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논의하고 풀어가는 데 있어 추상적으로 정립된, 혹은 외부에서 주입된 당위적 규범보다 한국인의 일상적 삶 속에 녹아 있는 전통의 규범적 잠재력을 활용하는 것이 실행력을 높일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전 세계적으로 한계에 봉착한 경제 논리 혹은 국가 주도의 복지 모델이 아니라, 두레와 같은 관계론적 전통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복지 문제를 풀어보자는 신영복 선생의 제안은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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