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래그 미 투 헬 |
샘 레이미는 <드래그 미 투 헬>의 연출 의도에 대해 "최근의 공포영화에 별 매력을 못 느끼겠다. 가학적인 방식으로 관객을 질리게 만드는 것은 내 장기가 아니다. 나는 그저 재미있는 공포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무섭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그런 구식(Old-Fashioned) 공포영화를."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런 점에서 <드래그 미 투 헬>은 <이블 데드2>의 속편이라고 할만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야기의 얼개부터 공포와 웃음을 유발하는 디테일한 묘사까지, 두 영화는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지나칠 정도로 많은 면에서 닮았다.
<드래그 미 투 헬>의 주인공 크리스틴(앨리슨 로먼)은 인생의 사면초가에 빠졌다. 대출상담원으로서 승진할 기회를 잡았지만 동양계 동료직원과의 경쟁이 힘겹기만 하고, 촌스럽고 가난한 크리스틴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대학교수 남자친구 클레이(저스틴 롱)의 엄마가 부담스럽기만 하다. 그러던 차, 집을 차압당할 처지에 놓인 불쌍한 노파 가누쉬(로나 레이버)의 대출상환 연기 상담을 맡게 된다. 허나 승진 누락이 두려웠던 크리스틴은 가누쉬의 청을 거절하기에 이르고 급기야 본의 아니게 망신까지 주게 되니. 이에 분노한 노파가 악마 라미아의 저주를 퍼붓자 크리스틴은 곧 수난의 연속에 빠진다.
<드래그 미 투 헬>은 한마디로 크리스틴을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Drag Me To Hell) 악마와 이를 저지하려는 그녀의 투쟁기다. 그건 봉인에서 해제된 악마와 그의 저주에서 벗어나려는 주인공의 사투를 다룬 <이블 데드2>도 마찬가지였다. 여자 친구와 깊은 산 속 외진 별장으로 놀러간 애쉬(브루스 캠벨)가 우연히 죽음의 책에 갇혀있던 악마를 부르게 되고 피할 수 없는 싸움을 벌이는 것.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는 그렇게 주인공들이 저주를 당하는 과정이나 이후 대응하는 태도가 놀라우리만치 닮아있는 것이다.
▲ 이블 데드 2 |
이는 아마도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를 살리기 위한 샘 레이미 감독의 의도적 설정처럼 보인다. 거친 손의 노파가 신경질적으로 책상을 치는 장면이랄지, 크리스틴이 가누쉬와의 격투 끝에 머리카락이 뜯기고 온갖 오물과 심지어는 튀어나온 눈알까지 삼키는 장면, 그리고 바닥에서 튀어나온 악마의 손에 잡혀 들어가는 장면까지, <드래그 미 투 헬>은 시대적 배경은 다를지언정 공포를 유발하는 디테일은 <이블 데드2>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사실 샘 레이미는 특정장르에 천착하는 감독이 아니다. <이블 데드> 시리즈가 워낙 유명세를 탄 탓에 영화광들 사이에서 공포영화의 특정 브랜드처럼 인식돼온 것이 사실이다. 한편, <이블 데드>를 접하지 못한 팬들 사이에서 <스파이더맨>의 성공 이후 그는 또한 블록버스터 감독으로 유명해졌다. 샘 레이미의 필모그래프를 살펴보면 그가 실은 꽤 다양한 장르를 경유했음을 알 수 있다. <다크맨>(1990)을 통해 안티 히어로를 다뤘고, <퀵 앤 데드>로 서부극을 연출했으며 <심플 플랜>(1998)과 <사랑을 위하여>(1999)로 각각 스릴러와 멜로의 세계에도 발을 디뎠었다.
다만 샘 레이미에게 공포영화의 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어울리는 이유는 공포를 조장하는 것에 있어서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장기를 선보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샘 레이미는 공포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는 감독이다. 그에게 공포영화는 표피적인 무서움을 전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시대의 집단적인 무의식에 스며든 고통의 장르적 발현이다. <드래그 미 투 헬>를 기획하면서 세 편의 <이블 데드> 시리즈를 두고 유독 <이블 데드2>를 염두에 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고 추정된다).
<이블 데드>와 <이블 데드2>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코미디적 요소가 두드러진 것 외에도 전편에서 나약하기 그지없었던 애쉬가 굉장히 과감한 저항을 보여준다는데 있다. 그것은 단순히 악마와 맞서는데 적극적일뿐만 아니라 현실을 은유하는 장치로써의 적극성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블 데드>에서 죽어가는 친구의 도움 요청에도 겁에 질려 소극적이었던 애쉬는 <이블 데드2>에 이르러 '람보'를 연상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팔에 전기톱을 들고 머리띠를 두른 모습은 영락없는 람보다!) 그러니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외부 세력에 공격당한다는 설정은 곧 당시 레이건 정부하의 미국을 상징하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애쉬의 저항은 곧 공산권을 향한 미국민의 불안감을 우회적으로 표현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드래그 미 투 헬>의 크리스틴이 느끼는 공포 또한 현실에서 기인한다. 사실 크리스틴이 라미아의 저주를 받는 이유는 그녀가 잘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죄가 있다면 그저 남자친구에 어울리는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 부지점장이 되려는 목표 하나로 상사의 지시에 따라 노파의 청을 거절한 것뿐이다. 물론 상사의 지시를 거부하고 노파의 대출상환 연기를 승인했더라면 저주를 피했을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도 올발랐을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 그녀에게 도덕적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는 것.
시골 출신으로, 여자의 몸으로, 더군다나 미국 내 동양인의 지위 상승에 따라 과거의 영광을 잃은 백인으로써 크리스틴이 현실에서 넘어야 할 장벽은 너무나 높다. 그건 가누쉬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너무나 견고한 자본주의 시스템 하에서 변변한 일자리도 얻기 힘든 노인의 몸으로 신용불량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대출기한연장을 거절당한 그녀는 죽고 만다!) 다만 자본주의가 생색조로 흘린 콩고물이라도 얻기 위해선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있는 이들을 짓밟는 수밖에 없다. <드래그 미 투 헬>이 크리스틴과 가누쉬의 대결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건 이 때문이다.
물론 샘 레이미가 정색을 하고 현실 비판에 목매다는 건 아니다. 그의 최우선 과제는 구식 공포영화의 장르적 재미다. 단지 주인공의 무의식을 잠식한 공포의 실체를 위해서 현실이 필요했을 뿐. 샘 레이미의 공포영화가 주는 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포영화는 살아 숨 쉬는 생물 같아서 시대에 따라 진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드래그 미 투 헬>과 <이블 데드2> 간의 차이를 살피는 건 곧 시대를 통해 장르의 내적변화를 살피는 것과 같다.
<이블 데드2>에서 애쉬는 결국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악마의 손에 이끌려 중세시대로 뚝 떨어졌다. 지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애쉬에겐 현실로 돌아가기 위한 유예기간이 주어졌다는 점이다. (결국 중세시대를 탈출하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돌아간 곳은 미래다!) 하지만 크리스틴에게는 최소한의 희망조차 없다. 지옥으로 끌려가자마자 영화는 끝. <이블 데드2>와 <드래그 미 투 헬> 사이의 시간 동안 현실은 그렇게 무시무시해졌다. (그에 비례해 웃음도 그만큼 늘어났다.) 그러니 샘 레이미가 자기 복제를 통해 도달한 지옥문에는 아마 이런 문구가 적혀 있지 않을까. '공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샘 레이미가 가학적인 공포영화가 난무하는 지금에 20년 전의 구식 공포영화로 돌아온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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