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대응하는 방식은 기업별로 다를 수 있다. 한 때 세계 최대 생산량을 자랑했던 GM은 정리해고와 고수익 모델 생산에만 집중하다 결국 무너졌다.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한 때 심각한 위기를 겪었던 독일 폭스바겐은 10년이 넘는 기나긴 개혁을 통해 올해 세계 메이커 중 홀로 성장가도를 달리는 탄탄한 회사로 변신했다. 올해 1분기 현재 폭스바겐은 일본 도요타에 이어 생산량 세계 2위를 자랑한다. 폭스바겐은 오는 2018년까지 도요타를 추월하겠다는 내부 목표를 세워놨다.
폭스바겐 성공의 힘은 크게 세 가지로 꼽힌다. 생산·마케팅·노사관계 혁신이 그것이다. 특히 노동자의 일자리를 보전하면서도 생산성을 높인 '워크쉐어링(일자리나누기)'은 노동자 해고에만 초점을 두는 한국 산업계에 신선한 충격을 준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 비결은 노와 사의 신뢰와 이들을 뒷받침하는 지방정부의 힘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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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성 '꼴찌'에서 노사 '윈-윈' 사례로
폭스바겐AG그룹은 지난 1937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에 따라 국영기업으로 탄생했다. 이후 1960년 주식을 공개해 민영화한 후 9년 뒤 그룹의 또 다른 축인 아우디 그룹을, 이어 1990년에는 스코다를 인수해 유럽 최대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현재 폭스바겐 산하 브랜드는 △폭스바겐 △스코다 △벤틀리 △부가티(이상 폭스바겐 브랜드) △아우디 △세아트 △람보르기니(이상 아우디 브랜드) △포르쉐 △만 △스카니아 △제일기차(FAW) △유롭카(렌터카 사업체) 등 12개에 달한다.
위기는 90년대에 찾아왔다. 1993년 폭스바겐의 독일 내 종업원 수는 10만3000명으로 최대 수준에 달했으나 공장은 전혀 수익을 내지 못했다. 노동자들의 임금은 포드, 오펠 등 경쟁사보다 20% 가까이 높았다. 독일 공장의 생산성은 업계 최하위 수준으로 조사됐다.
반면 1992년 순이익은 1억4700만 마르크에 그쳐 전년보다 무려 87%나 급감했으며 93년에는 19억4000만 마르크 적자로 돌아섰다. 93년 판매량은 80년대로 돌아갔다. 일본 업체의 유럽 진출이 본격화한데다 통일 후 생겨났던 경기 거품이 빠진데 따른 후유증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탓이 컸다. 당시 독일 언론이 앞 다퉈 폭스바겐을 구조조정 0순위 업체로 지목할 정도였다.
위기를 타계하기 위해 회사는 혁신을 단행했다. 제품 생산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비용 구조를 뜯어고치기 시작했고 현지 시장에 발맞춘 마케팅 전략을 새로 세웠다. 무엇보다 93년 노사가 협상 4주 만에 일자리나누기 도입을 합의한 '생산입지와 고용안전을 위한 기업협약'이 새로운 회사를 만들어냈다. 무려 3만 명을 해고하려 했던 사측과 '정리해고 결사 반대'를 외치던 노조가 극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1994년부터 실시한 일자리나누기의 핵심은 사측이 노동자의 고용을 보장하는 대신 노조는 임금 보전 없는 근로시간 단축(주4일제 도입으로 주당 노동시간 36시간에서 28.8시간으로 단축)에 합의한 것이다. 이를 통해 노동시간이 20% 줄어들고 노동자 소득은 최고 16%가 줄어들었으나 고용이 안정돼 노와 사의 신뢰가 쌓였다.
노동유연성을 위한 조치도 마련했다. 95년에는 감산으로 조업이 단축될 경우 노동자에게 기존 근로시간에 해당하는 임금을 보장해주고 결손된 조업시간은 이후 증산 시 결산하는 등 내용을 담은 '노동시간 계좌제'를 도입했다. 이로써 회사는 수요 변동에 따라 생산량을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교대제 또한 설비 특성에 따라 1교대제~3교대제 등 다양하게 분화시켰다.
조업이 줄어든 노동자는 정부가 최대 6개월까지 유급 직업교육을 보장하는 블록시간제 혜택을 얻었다. 이로써 노동자는 유휴 시간에도 업무 숙련도를 높일 수 있었고 회사는 인건비를 절감했다.
다단계 모델 역시 고용 안정을 위한 조치였다. 도제생은 도제 후 부분 근무를 하고, 나이 든 노동자는 정년퇴임 전까지 노동시간을 단계적으로 줄여나가도록 해 노동조건을 안정시켰다.
이상호 금속노조 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노사의 합의에 따라 해고를 통한 사회적 비용 발생을 막았고 회사는 복지비와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게 됐다"며 "노사가 서로 양보하면서 사회적 모범 사례를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도입 첫 해 16억 마르크 상당의 인건비를 절감했다. 93년 25%에 달하던 매출액 대비 인건비 비중은 6년 후 16%까지 낮아졌다. 고용안정을 보장받은 노동자들의 노동 생산성은 6%포인트가 올라갔다.
▲폭스바겐은 더 이상 싸구려 '국민차(독일어로 폭스바겐)'가 아니다. 최고급 차종부터 저가형 차종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라인업을 갖춘 세계 2위의 자동차 대기업이다. 최근 폭스바겐 산하 브랜드 포르쉐는 역시 산하 브랜드인 아우디 지분을 인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로이터=뉴시스 |
일자리 나누기 확산…아우토5000 프로젝트 도입
2000년대 다시 위기가 찾아왔다. 2003년 순이익은 전년대비 61% 급감했고 세계 시장점유율은 2001년 9.2%에서 8.2%(2005년)로 낮아졌다. 무엇보다 급성장하던 중국 시장에서 경쟁에 뒤쳐짐에 따라 한때 50%가 넘던 점유율이 17.3%로 급락했다. 여전히 고비용구조를 완전히 탈피하지 못한 데다 브랜드 간에 경쟁모델이 우후죽순으로 나와 사내 경쟁이 일어난 탓이 컸다.
10년 넘게 이뤄진 시스템 혁신과 발맞춰 2001년과 2004년 노사가 일자리나누기 확산을 협약해 위기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2001년 협약에 성공한 '아우토5000' 프로그램은 실업난에 시달리던 독일 경제에 놀라운 사건으로 칭송받았다.
독일 내 새로운 공장을 만들어 노동자 전원을 장기 실업자 및 청년 실업자로 채용한 아우토5000 프로젝트는 노사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실업자들은 폭스바겐 평균 노동자 임금보다 10~15%가량 낮은 입금을 받고 직장을 얻었다. 노동시간은 다시 주5일로 전환하면서 35시간으로 연장됐으나, 임금체계를 성과에 연계해 지급함으로써 생산성을 끌어올렸다. 노동시간 계좌제는 기존 200시간에서 최대 400시간으로 늘려 노동유연성을 더욱 끌어올렸다. 생산성 향상은 물론 기업의 사회적 책임까지 이행한 프로젝트였던 셈이다.
아우토5000 프로젝트를 적용한 볼프스부르크 공장은 우수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면서 인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티쿠안을 생산하는 성공작으로 자리매김했다. 현재 이 공장은 독일 내에서도 유일하게 생산량이 증가하는 곳이다.
일자리나누기로 큰 성공을 거둔 폭스바겐 노사는 지난 2004년, 오는 2011년까지 노동자 전원 고용 보장과 3년 간 임금동결을 주고 받았다. 그룹 내 타회사 파견까지 수용하는 등 노동자의 큰 희생이 뒤따르는 조치였으나 이 모델은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정리해고를 막은 것은 물론, 새 일자리까지 창출해냈다.
사측도 노동유연성을 얻었다. 지난 2007년 현재 폭스바겐 노동자의 평균 근로시간 계좌 적립시간은 300시간으로, 400시간의 계좌를 가진 만큼 총 700시간을 노동자가 활용 가능해 휴식이 필요할 경우 최대 5개월 휴가로 사용 가능하다. 반면 앞으로 생산량이 더 감축하더라도 노동시간 적립분 만큼 노동자의 고용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
정부의 노력…폭스바겐 특별법 제정
비단 노사만의 노력으로 성과가 나온 게 아니다. 정부의 역할이 컸다. 독일 연방정부는 회사 경영에 깊숙이 개입해 사회적 책임을 다하도록 감시했다.
이 연구위원은 "연방 정부는 '폭스바겐 특별법'을 만들었다. 황금주의 권한을 가진 10%가 넘는 지분을 지방정부가 소유해 정부 동의 없이는 생산설비 해외 투자나 고용부문 등을 회사가 마음대로 결정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며 "유럽연합(EU)에서 한때 경쟁제한 조치로 제소까지 할 정도로 강력한 정부의 개입이 있었기에 노사 모두 사회적 책임을 잊지 않았던 셈"이라고 강조했다.
▲폭스바겐은 한국에서도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켜가고 있다. 올들어 5월까지 총 2894대를 판매, 전년동기대비 성장률이 40.8%에 달했다. 지난 3월 골프 2.0 TDI(사진)는 290대가 판매돼 소형차 중 처음으로 수입차 모델별 월 판매량 1위를 기록했다. 한동안 한국을 휩쓸다시피 한 일본 경쟁업체들의 판매실적은 최대 67%(혼다)까지 감소했다. 유일한 한국 브랜드인 현대·기아차 역시 세계 각국 시장에서 폭스바겐과 승부를 벌여야 할 것이다. ⓒ폭스바겐코리아 제공 |
MB정부의 본심은 일자리나누기가 아니라 정리해고?
한국에도 자동차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방편으로 일자리나누기 프로그램을 도입하자는 주장이 일부에서 제기된다. 최근 가장 주목할 만한 제안은 법정관리 중인 쌍용차 노조에서 나왔다.
쌍용차 노조는 노동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 나누기로 비용을 절감하는 것을 비롯해 미지급 임금 등을 담보로 1000억 원의 은행 대출을 끌어오겠다는 회생방안을 내놨다. 또 12억 원 규모의 비정규직 고용안정기금을 출연키로 했다.
그러나 사측은 노조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사측을 대리하는 이유일 법정관리인은 지난 15일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구조조정에 실패하면 1%의 성사 가능성도 없다"고 밝혔다. 2600여 명을 정리해고해야만 한다는 기존 주장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다. 주채권은행인 산업은행이 회사 구조조정을 이끌기 때문에 이번 쌍용차 사태를 두고 "정부가 구조조정보다 정리해고 선례를 남기려고만 한다"는 비판이 제기될 정도다. 산은은 정부 산하 국책은행이다.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이 없이는 일자리나누기 모델을 적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갈등이 극에 달한 한국 자동차산업 노사관계는 정부의 중재가 있어야만 풀 수 있는 문제기 때문이다.
이 연구위원은 "최근 경제위기로 자동차 노사의 대립이 극에 달해 타협안이 들어설 공간이 협소해진 마당에 핵심결정권자인 정부마저 일자리나누기에 미온적이라 문제"라며 "사회적 대타협이 한국에서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이 연구위원은 하지만 일자리나누기의 효과에 대해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실업보험 체계가 잘 잡힌 독일에서도 사회적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런 조치가 나왔다"며 "기업의 경쟁력 강화와 노동의 인간화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대안 중 하나다. 도입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 참고 자료 :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 <폭스바겐의 위기 극복 모델>, 노동부 '근로기준 정책브리프' <독일 폭스바겐社 근로시간 단축을 통한 일자리나누기 사례>
생산 혁신·마케팅 혁신, 폭스바겐 이끈 '쌍두마차' 폭스바겐의 성공 요인은 일자리나누기와 동시에 진행된 체질 개선이었다. 특히 고비용 문제에 시달리던 생산 과정의 혁신과 시장에 맞는 신차 개발과 효과적 마케팅이 회사를 살렸다. 플랫폼 공용화와 모듈화 도입 등 비용절감 노력은 회사의 수익구조를 크게 향상시켰다. 93년 위기 당시 총 16개에 달하던 플랫폼은 크게 줄어들어 공용화에 성공, 다양한 파생모델이 저가에 생산 가능해졌다. 2000년 폭스바겐의 플랫폼당 모델 수는 10.3개로 크라이슬러(1.8개), 포드(2.8개), GM(3.5개)을 압도했다. 공동 플랫폼 도입으로 큰 비용이 들어가는 초기 연구개발 부문 비용은 연간 30억 마르크가 줄어들었다. 골프·보라·뉴비틀(폭스바겐), A3·TT(아우디), 레온·톨레도(세아트), 옥타비아(스코다)는 모두 A플랫폼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 폭스바겐 전체 모델에서 주 플랫폼인 A4와 A03가 전체 생산 모델의 75%를 차지할 정도다. 2000년대에는 공용 모듈을 더욱 확장해 비용을 줄여나갔다. 폴로(B 세그먼트)에 사용되는 액셀러레이터, 브레이크, 서스펜션 등 주요 모듈 부품이 골프(C 세그먼트), 파사트(D 세그먼트) 등에까지 그대로 적용됐다. 공용모듈을 제외하고 파비아에 적용된 변형 모듈은 9개에 불과하다. 이와 같은 비용절감 노력에 따라 2003년 20%에 불과하던 모듈화 비중(골프)은 2006년 제타 모델의 경우 60%까지 증가했다. 반면 플랫폼 수는 1993년 16개에서 2006년에는 11개로 줄었고, 플랫폼당 생산량은 16만 대에서 51만 대로 3배 이상 증가했다. 이는 적기생산방식(JIT)으로 비용절감의 대가로 알려진 도요타(44만 대)보다 뛰어나다. 지난 2007년 기준 골프 플랫폼의 14개 파생모델 판매대수는 258만 대로 2위인 도요타 캠리 플랫폼보다 무려 70만 대 이상 많았다. 제품·마케팅 혁신 역시 폭스바겐 성공비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다. 90년만 해도 전체 판매 중 72%가 서유럽에 집중됐으나 중국(산타나2000)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 현지형 모델을 판매한데 힘입어 93년 6.1%에 불과하던 신흥시장 판매 비중은 2년 뒤 23.1%로 급증했다. 2000년대까지도 회사의 발목을 잡던 브랜드간 상호 시장 잠식(Cannibalization)은 브랜드 차별화를 더욱 강화해 뛰어넘었다. 최상위급 소비자(벤틀리, 부가티), 상위 소비자(아우디), 중산층 소비자(폭스바겐), 중하층 소비자(세아트, 스코다)에 맞는 제품을 각각 포지셔닝해 목표시장도 이에 맞게 차별화한 것이다. 이와 함께 제품개발 기획위원회 기능도 크게 강화시켰다. 이는 제품개발에 시장 상황과 소비자 트렌드 변화가 보다 빨리 반영돼 새 모델 출시 시간을 크게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골프의 경우 5세대 개발에 6년이 걸렸으나 6세대는 5년 만에 완료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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