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오전 9시부터 UN 유럽본부에서 ILO 총회에 참가하고 있는 노동자그룹 전체회의를 앞두고 있다. 이 자리는 부분별로 이뤄지는 위원회의 토론 내용이 공유되고 여러 문제를 놓고 토론이 벌어지는 곳이다.
우리는 300~400명 정도의 참여자에게 'ILO 권고안 이행하지 않는 대한민국정부와 기륭전자규탄'이 담긴 선전물을 나눠주었다. 함께 간 민주노총 사람들도 특수고용노동자의 노동권 보장을 한국 정부에 촉구하는 ILO권고안을 이행하지 않는 이명박 정부의 실태를 알렸다.
드디어 총회가 시작됐다. UN 유럽본부 강당에서 각국 정부 대표자들이 하나씩 발언을 시작했다. 11시 경 이영희 노동부 장관도 단상 위에 올랐다. 이 장관의 발언 취지는 이랬다.
'한국은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노사민정 대화를 통해 일자리나누기가 진행되고, 고용안정을 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함께 고용안정협약을 맺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이영희 장관의 모두발언이 시작됨과 동시에 한국 측 참가단은 앉은 자리 앞쪽 통로에 서서 소복을 입고 몸에 벽보를 두른 채 1인 시위를 벌였다. 몸에 두른 벽보의 내용은 '대한민국 정부는 비정규노동탄압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기륭비정규노동자들에 대한 ILO권고안을 즉각 이행하라'였다. 각국 대표단들의 이목이 집중됐다.
분위기가 술렁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경호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가와 우리에게 퇴장하라고 얘기했다. 그와의 약간의 실랑이 끝에 좌석 맨 뒤쪽 가운데 통로에서 1인 시위를 계속 했다. 장관이 시위자를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장소였다.
나중에 들으니 우리의 시위 얘기는 각국 노동자 대표단에게 삽시간에 퍼졌단다. ILO 총회에는 노사정 대표단이 함께 참여하기 때문에 이런 일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다들 더 '민주노총이 대단했다'고들 했다.
이 장관의 발언이 끝나고 조금 지나서 우리도 자리를 옮겼다. 12시 경 휴게실에서 국제금속노련 사람들과 간담회를 했다. 국제금속노련 사람들은 기륭전자 문제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며 프랑스 금속노조와의 간담회도 적극 주선해 주겠다고 했다. 그때 이영희 장관이 제네바 대사 등과 함께 우리가 있는 장소로 왔다.
마침 잘됐다 싶었다. 우리는 장관이 있는 테이블로 가서 기륭 문제로 얘기를 나누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대사관 직원과 노동부 직원이 앞을 가로 막고 우리를 밀쳐냈다.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자는데 왜 가로 막냐는 항의에 돌아온 답은 "나중에 얘기해라, 장관님은 매우 바쁘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이 장관의 얼굴마저 정면으로 보지 못하게 몸으로 막아섰다. 이영희 장관은 말 한마디 하지 않고 굳은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봤다. 대사관 직원이 다가와 "국제적 망신"이라고 했다.
국제적 망신? ILO 권고안도 지키지 않는 것보다 더 큰 국제적 망신이 있을까. 자국의 노동자들과 대화조차 못하는 것만큼 국제적인 망신이 있을까?
연대는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이뤄졌다. 프랑스노총은 13일 프랑스 노총의 대규모 집회에 참가했으면 좋겠다는 제안을 해주었다. 선전물도 우리가 준비해간 것이 부족하다며 프랑스 노총에서 추가 인쇄를 해주겠다고 한다. 간담회도 하기로 했다.
뒤이어 프랑스 내에 있는 쉬드라는 노조의 관계자도 만나서 사회단체와 쉬드노조 산하 노조와 간담회를 하기로 했다. 특히 쉬드노조는 산하 노조들에 기륭전자 관련 ILO 권고안 이행촉구 항의서한 전달 요청을 했더니, OECD 회원국들에게도 이 문제를 알리겠다고 했다. 그 회원국들이 우리 정부에 해결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낼 수 있도록 적극 조직하겠다고 약속했다.
이렇게 ILO 총회에 참석한 우리는 세계 각국 대표단들과 틈틈이 인사를 했고, 투쟁을 알렸다. 우리가 만난 ILO 관계자들과 각국 대표단들은 내가 인사를 하면 '아~ 기륭!'이라고 답해줬다. 다들 하나 같이 "문제가 잘 안 풀려 안타깝다"며 "함께 연대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5년여 길고 긴 죽음의 터널 같은 외로운 시간들이었는데, 이젠 국제 사회에도 든든한 벗들이 생겼다. 아니 우리가 이들의 든든한 벗들이 되어주고 있었다.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한국에 있는 우리 조합원들과 연대해주던 많은 벗들이 그립다. 외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용산 참사 유가족들이 떠오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꿈 많던 여고 시절, 공장으로 가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아무것도 모르면서 가슴 벅찼던 그 말 한마디가 가슴에 오롯이 새겨지는 이국의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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