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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노예…벗어날 길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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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노예…벗어날 길은 없을까?

[철학자의 서재] 알랭 드 보통의 <불안>

불안에 매달린 현대인

2008년 10월 유명 여배우가 자살을 했다. 도대체 자신의 삶을 끊어야 할 만큼, 그녀에게 고통스러웠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사람들은 그녀의 자살을 두고 참으로 많은 말들을 쏟아냈다. 그런 가운데, 그녀가 했던 어느 방송국과의 인터뷰가 회자되면서, 그녀의 자살이 인터넷의 악의적 댓글(일명 '악플')과 무관하지 않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녀는 말했다. 수많은 인터넷 악플을 볼 때면, 모든 세상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 같다고. 우리는 종종 남의 시선에 의존해서 살아간다. 심지어 우리는 타인에 의해서 나를 규정하고, 그 속에서 괴로워하기도 한다. 아마 그녀도 그랬으리라. 수많은 사람들의 말과 편견 속에서 그녀는 자신을 잃고 방황했을 것이다.

지금 나는 해묵은 기삿거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의 죽음은 신문의 한 귀퉁이를 장식하는 한낱 기삿거리도 아니요, 그녀 개인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 모두가 직면하고 있는 불안이 빚어낸 안타까운 사건이다.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에게 불안은 자신만의 삶의 색깔을 찾아주는 실존적 체험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불안을 회피하지 말고, 그것에 적극적으로 맞서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사실상 불안에 당당히 맞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늘날과 같이,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것에 발맞추지 못하는 사람들은 종종 낙오자나 실패자로 간주된다. 그래서 현대인은 자신이 혹시 세상의 왕따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만성적인 불안감에 시달린다. 더군다나 경제 불황, 실업률 증가, 구조 조정 등의 어두운 사회현실은 더욱 더 우리를 불안으로 내몰고 있다. 마치 불안은 삶의 전면에서 우리를 마구 뒤흔들어놓는 거대한 해일과도 같다. 그리고 이처럼 불안이 휩쓸고 간 우리네 삶에 남는 것이라고는 자괴감과 상실감 밖에 없다.

그러나 불안은 일종의 친구와도 같다. 어떤 이에게 그것은 늘 자신을 고독하게 만드는 냉정한 친구일 수도 있고, 또 다른 이에게 그것은 더욱 더 화를 돋우게 만들거나 아니면 더욱 더 자신을 소심하게 만드는 친구일 수도 있으며, 또한 그것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달라고 끊임없이 조르는 아이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예고도 없이 불쑥불쑥 얼굴을 들이미는 이 귀찮고 성가신 친구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알랭 드 보통은 바로 이 불안이라는 불편한 친구에 대해서 의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해준다.

세상 사람들의 사다리에서 나는 어디쯤에?

▲ <불안>(알랭 드 보통 지음, 정영목 옮김, 이레 펴냄). ⓒ프레시안
알랭 드 보통의 글은 이제까지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문제나 사건들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그래서 이 친근한 철학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언제나 권태롭고 재미없는 세상에 활기를 불어넣고, 거기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준다. 이번에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그의 저서 <불안>(정영목 옮김, 이레 펴냄) 역시 이와 마찬가지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의 삶에서 도저히 떨쳐낼 수 없는 불안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이를 통해서 이 성가신 친구를 어떻게 껴안고 보듬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조언해준다.

인간은 누구나 사회적 지위를 얻고 싶어 하고, 나아가 그것을 유지하고자 한다. 알랭 드 보통은 우리가 느끼는 모든 종류의 불안이 근원적으로 바로 이러한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불안감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지위란, 좁은 의미로는 한 집단 내의 법적 또는 직업적 신분이고, 보다 넓은 의미로는 세상의 눈으로 본 그 사람의 가치나 중요성을 의미한다.

우리는 종종 타인에 의해서 나의 존재감을 자리매김해놓고서는, 정작 스스로는 자신의 낯선 모습에 당황하곤 한다. 사회적 위치에 대한 불안은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나'와 '실제의 나' 사이의 간극은 우리에게 불안감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이 때, 타인에 비친 나의 모습은 결정적으로 사회 속에서 내가 어느 위치에 속하는지를 알려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 사회적 위치가 그 자체로 나를 규정해버림으로써, 실제의 나의 모습은 사라지고, 지위가 곧 나를 대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예컨대, 높은 지위를 차지한 사람은 돈, 명성뿐만 아니라, 타인으로부터 배려와 존경을 받으며, 무엇보다도 늘 다른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이것을 통해서 그 사람은 자신이 세상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에 반해서,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지 못하며, 결국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자신의 존엄성마저도 위협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남들보다 작아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사회 속에서 나의 존재감을 알리려고 늘 고군분투한다. 결국 우리의 불안은 다른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그들보다 비교적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싶고, 남들보다 더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똑똑한 놀부와 게으름뱅이 흥부 이야기

불안은 인간이 타인과 더불어 살기 시작한 그 오랜 역사와 늘 자리를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역사는 우리에게 낮은 지위에 속하는 것은 곧 불행으로 이어진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이 쓰라린 배움 속에서 참으로 무던히도 높은 지위를 향해 내달렸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오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은 여전히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어만 간다. 왜 이처럼 불안은 점점 더 우리의 삶을 잠식해 들어오는 것일까?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불안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랑에 대한 갈구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사랑에 대한 열망 이외에, 불안을 조장하는 인간의 속물 근성, 지위 상승에 대한 기대감, 능력주의 등은 인간의 선천적 감정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회 환경 속에서 발생되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이러한 불안의 원인들은 지위에 대한 근본적 변화라는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더욱 더 부각되었다.

과학기술의 발전과 경제적 성장은 인간에게 물질적 진보를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적 신분 상승의 기회를 넓혀주었다.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 사회적 지위는 이제 더 이상 전통 사회에서처럼, 혈통이나 가문 또는 신분 등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에 따라 다양하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특히 이 때 경제적 능력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문제는 이러한 능력 위주의 사회가 사람들에게 높은 지위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해준 반면,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능력, 사회적 박탈감, 수치심 등을 안겨다주었다는데 있다. 특히 가난한 사람에게 가난은 곧 자신의 무능력과 직결되고, 그는 더 이상 사회에 쓸모없는 사람처럼 취급되고 말았다.

알랭 드 보통은 서양 중세만 해도, 가난은 전혀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당시 부자와 빈자는 신이 구분한 것에 불과하며, 이들은 각자 사회 속에서 나름의 중요한 역할이 있었다. 그래서 당시 농민의 삶은 육체적으로 힘들지는 몰라도, 정신적인 박탈감이나 수치심을 느낄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가난한 자에게는 물질적 궁핍에 정신적인 고통까지 더해졌다.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무능력에 수치심을 느껴야만 했고, 사회는 그들에게 실패자라는 꼬리표를 달아주었다.

오늘날 우리에게 흥부와 놀부의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이다. 21세기에 놀부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이고, 흥부는 멍청하고 게으름뱅이로 평가받는다.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적 무시와 외면 속에서 점차 세상 밖으로 밀려났으며, 그래서 이들에게 불안은 삶을 위협하는 가장 무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경제적 부가 인간의 불안에 끼친 영향은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급속한 경제 성장은 사람들에게 보다 많은 지위 상승의 기회를 제공했고, 그 속에서 서로 더 나은 지위를 얻고자 하는 경쟁심 또한 그만큼 늘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소위 지배 계층은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 늘 전전긍긍하게 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확고하게 사회적 지위를 보장받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들의 불안감은 여기에 기인한다. 결국 오늘날 똑똑한 놀부나 멍청한 흥부나 불안에 떨긴 매한가지다. 한쪽은 자기가 가진 것을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다른 한쪽은 자기가 가질 수 없는 것을 한탄하고 괴로워한다.

또한 자본주의 사회 역시 우리의 불안감을 극대화시키는데 한 몫을 했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은 현대에 들어와서, "불안은 욕망의 하녀" 라고 말한다. 결국 인간이 욕망하는 한, 불안은 늘 따라다닐 수밖에 없다. 이미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욕망의 성격을 '구멍 난 술통'에 비유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의 자본주의식의 경제적 성장이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도록 요구한다는데 있다. 욕망은 자본주의 사회를 구성하는 중요한 원동력이며,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새로운 욕망을 창출하도록 강요받는다. 그 결과, 현대인은 자신의 욕망에 대한 조절 능력을 상실한 채, 끊임없이 욕망을 만들고, 그것의 충족을 위해서 내달리는 욕망의 기계로 전락하고 말았다.

타인의 시선에 꿋꿋한 그들

사회로부터 도태되거나 소외되지 않기 위한 애처로운 절규와 몸부림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알랭 드 보통은 점점 더 소심해지고 작아지는 우리에게 자신의 불안을 감싸하고 다독일 줄 알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들은 남의 시선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예외적인 인물들이며, 사회 밖으로 스스로 걸어 나갈 줄 아는 즐거운 산책자이다.

일찍이 철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모욕이나 비난에 의연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이성은 타인의 말과 시선이 실제로 자신을 비추는 거울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었다. 그래서 철학자들은 타인의 말보다 자신의 이성을 더 신뢰했으며, 이러한 이유로, 남의 생각이나 판단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지 않았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통해서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았던 세상의 모습도 소중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준 훌륭한 선생님이었다. 뿐만 아니라, 신을 경배하는 사람들은 인간들이 다투는 지위란 실상, 신에 비하면 아주 보잘 것 없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해줌으로써 지위에 목을 매는 우리를 위로해주곤 했다. 그리고 19세기 초 서구와 미국에서 등장한 이른바 보헤미안들은 경제적 능력으로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현실에 대항함으로써, 세상의 가치를 전복시키고자 한 삶의 혁명가들이었다. 이들은 세상이 외면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고 그것을 몸소 자신의 생활에서 실천한 사람들이었다.

알랭 드 보통이 서구의 오랜 역사를 파헤치면서, 역사적 문화 곳곳에 숨어있는 불안에 꿋꿋한 이들을 찾아낸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바로 이 세상에는 단순히 경제력이나 물질적 성공으로 환원될 수 없는 다양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고자 함이다. 결국 불안에 당당했던 그들은 바로 세상이 버려둔 가치를 재발견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해서 우리는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던 가치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가치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세상 밖 일탈 즐기기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전 대통령이 주장했던 이른바 '보통 사람'은 국민의 마음을 강력하게 사로잡았고, 결국 이 전략적 멘트는 그를 대통령 선거의 승리자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물론 노태우 전 대통령은 누가 봐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고,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정책을 펼 의지도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민들은 나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데서 어떤 친근감 내지 동질감을 느꼈고, 결국 그것은 그를 지지하게끔 만들었다.

이처럼 인간은 다른 사람과 똑같다고 느낄 때, 일종의 편안함을 느끼고, 그와 반대의 경우에 매우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알랭 드 보통의 흥미로운 예를 인용하자면, 키가 아주 작은 사람이라고 해도, 고만고만한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으면, 자신의 키를 고민하지 않다가 이 집단에 조금이라도 키가 큰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그는 갑자기 불안감에 휩싸인다고 한다. 이처럼 불안의 원천은 내가 남과 다르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절대적으로 평등할 수 없다는 쓰라린 현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사람의 평등을 외치고, 일상에서 마주치는 자그마한 불평등조차도 참을 수 없어하면서도, 모순적으로 남들과 다르게 살고 싶어 한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똑같을 수 없다면, 차라리 내가 그들보다 우위에 서야지만 비로소 편안함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나보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불쾌감을 잘 표현한 것이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서, 남보다 좀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려고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지려고 애쓴다. 우리는 무조건 '튀어야' 한다. 그리고 이처럼 남들보다 '튀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늘날 현대인을 점점 더 병들게 만든다. 그러면 도대체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아옹다옹 다투며 살아가야만 하는가? 해법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사다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 어차피 나는 남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으며, 그러한 한에서 끊임없이 샘솟는 불안감과 마주쳐야 한다. 그런데 알랭 드 보통에 의하면, 인간이 느끼는 불안감의 정도는 자신이 생각하는 준거집단, 바꿔 말하면 세상의 울타리에 한정된다고 한다. 즉, 우리는 세상에 나름의 울타리를 치고서는 적어도 이 안에 있는 사람들보다는 우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이제 세상에 울타리를 치는 일을 그만두고, 아니 그 울타리 밖으로 한번 나가보자. 그러면 거기에는 우리가 생각했던 울타리 이외에 또 다른 많은 울타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처럼 세상 밖으로의 일탈을 즐긴 사람들을 잘 알고 있다. 이들은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울타리를 벗어나, 새로운 자기만의 울타리를 마련하고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줄 알았던 사람들이다.

우리도 이제 그들처럼 세상의 울타리에 고민하거나 화내지 말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가보자. 세상 밖 일탈을 두려워하지 마라. 그것은 결코 우리를 세상의 왕따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이제까지 우리를 옭아맸던 세상 사람들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만들고, 거기에 자신의 존재감을 새겨 넣는 작업이다. 그리고 이 때, 비로소 우리는 불안을 삶의 침입자가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삶을 꾸려나갈 숙명적인 동반자로서 묵묵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철학자의 서재'는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공동으로 진행하는 서평 연재입니다. 매주 주말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자들이 심사숙고해 선정한 책을, 철학자가 직접 심혈을 기울여 쓴 서평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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