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숫자의 함정'에 빠진 한국 교육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숫자의 함정'에 빠진 한국 교육

[김명신의 '카르페디엠'] 대학입학률이 교육의 본질인가?

"에효…언어 보자 마자 재수할까 생각 들더라구요.
외국어 끝나고는 자살충동까지도 들었어요. =_=
대학은 저 멀리 아득히 보일 듯 말듯 한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애요. =_=
이건뭐 제주 OO대 가서 말들과 뛰어 놀 점수…."
(2009년 6월 3일, 한국교육과정 평가원주최 모의수능시험을 치룬 날 저녁 고3 여학생이 부모에게 보낸 문자메시지)


나는 이 문자메시지를 보고 '대학을 안 가도 이미 뛰어난 시인이 될 학생이니 부모가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라고 말했다. 실제 이 학생은 뛰어난 문장력으로 이미 여러 차례 문학관련 행사 수상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이 학생이 그토록 좋아하는 책 한 줄 읽지 못하고 입시공부에 매진한 지 벌써 몇 년째다. 뛰어난 예비 시인 딸을 둔 부모의 심정도 대입 앞에서 애가 타기는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며칠 전 수능모의고사에서 그 학생이 대학에 가는데 꼭 필요한 성적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능의 언어영역 점수는 좋은 시인의 보증수표인가? 좋은 대학에 진학하면 문학적 감수성이 당근 높아지는가? 우리 모두는 숫자가 능력이 아닌 줄 알고 있다. 대표적으로 얼마전 프랑스에서 '외딴방'으로 문학상을 수상한 신경숙 씨도 그러하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학생이 언어영역까지 좋은 점수를 받아야 그 실력을 인정하는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더 나아가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그 학생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 훌륭한 문학인이 되기를 은근히 독려하며 모두 가해자이자 공범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나 아닌지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보게 된다.

숫자를 신봉하는 한국 교육의 함정은 '학교알리미'라는 정보공개를 통해 심화된다. 지난 4일 학교알리미를 통해 학교 서열이 발표됐다. 누구에게나 정보는 필요하다. 그러나 그 정보가 긍극적으로 교육발전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는 더욱 중요하다. 학교 알리미에서 알려주는 정보는 대학진학률, 전국 1만1418개 초·중·고의 교사 1인당 학생수, 학교폭력 발생수 등 28개 항목의 정보이다.

그러나 판도라의 상자가 열어젖혀지듯 실제 상자에서 뛰쳐 나온 정보는 득보다는 실이 많다. 교육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며 학교 서열의 꽁무니를 차지하게 될까봐 모두 불안해하며 학생들을 쥐어짜는 것이다. 아무도 어느 학교가 교사 1인당 학생수가 적은지 관심 갖지 않고, 한국 학교들이 저개발국가인 방글라데시 수준의 학급당 인원수라는 사실에는 관심갖지 않는다.

일부 신문에서는 전교조 교사수, 4년제 대학입학률, 외국대학 진학률 등 자신들의 관심사에 따라 학교들을 줄 세우기 바빴다. 교육의 본질이 대학입학률이고 학교폭력 발생 숫자인가? 평가 항목 어디에도 인간 교육 잘 시킨 학교 순위는 없다.

또 평가 항목 중 어디에도 학생이 자기 주도적으로 학습하고 대입에 필요한 문제풀이 능력뿐 아니라 미래의 학력(소통력, 민주적 의사 결정력, 기업가정신, 다문화이해, 모국어와 외국어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함등)을 키운다는 항목은 없다. 학교가 체벌 없고 학생회 운영을 잘 해서 학생과 교사, 학부모, 지역사회, 학교가 공존하고 발전한다는 평가 지표는 학교알리미 그 어디에도 없다.

학교알리미는 이명박 정부 기획에 따라 가공된 숫자, 숫자로 드러난 자료를 가지고 한국 학교와 교육을 재단하고 있다. 숫자는 서열로 이어진다. 포장은 '정보공개'이지만 결국은 나와 나를 샅샅이 줄세우는 학교 서열화로 대미를 장식하게 될 것이다.

이런 글에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대안을 묻는 분들이 늘 있다. 당연한 질문이다. 서열이아니면 무엇인가? 입시 경쟁력인 숫자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거칠게 말하면 교육 내용과 질이 우선되어야 하고 교육도 시대 정신과 부합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작은 구상과 실험단계이긴 하지만 경기도교육청의 공교육 혁신학교 모델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경기도교육청은 내달까지 20개교 혁신학교를 선정한다고 한다. 심상정 전 의원이 지난 총선때 공약으로 내놓았던 것과도 맥락이 비슷하다. 이들 학교는 우선 교장을 공모하여 학교별로 교장을 선정할 계획이라고 한다. 도교육감의 막강한 권한인 인사권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육감이 일선 학교를 그토록 복종시킬 수 있고 동원시킬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교육감의 교장 인사권에 있다. 그런데 경기도교육감이 인사권을 일부 포기하고 학교의 교장 선임을 단위학교 자율로 맡긴다는 것이다. 이는 야자의 자율, 0교시의 자율, 대학 입시 공부의 자율로 대표되는 MB식 자율과 가장 크게 다른 점이다.

경기도의 혁신학교는 과대학교, 과밀학급을 전면 재편해 한 학년을 5개 반 이하로 하고 학급당 학생수를 25명 이내로 줄인 형태의 학교로, 김상곤 교육감이 제시한 새로운 공교육 모델이다. 소규모 학교, 적은 인원의 학급은 학교개혁의 핵심이다. 혁신학교는 교과 편성의 자율권을 일정 부분 보장할 것이라고 한다. 지켜보고 격려할 일이다. 무엇보다 작은 학교, 소인수학급에서 '교육'은 이루어진다.

어쩌면 혁신학교는 학교알리미에서 다소 낮은 순위를 받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그 학교에 교육 경쟁력이 없다고 볼 수 있을까?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MB가 인정하지 않는 다른 줄- '올바른 교육', '교육본질에 입각한 교육'이라는 의미있는 줄에 서는 시도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 교육은 대안없다'고 하지 말고 경기도의 실험, 혁신학교가 도입 취지에 맞게 잘 운영되도록 관심을 갖고 지켜보자. 절망적이고 뒤틀린 학교알리미를 신봉하기보다 한국 내 학교 서열의 비교육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