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 FTA가 양국 의회에서 언제 비준되어 발효할지는 나로서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찍어야 한다면, 내 예상은 결국은 비준이 되리라는 쪽으로 살짝 기운다. 그런데 지금 한미 FTA에 결사반대하는 우리 사회의 진보파들은 막상 그 날이 오면 어떻게 반응하려는 것일까? 그렇게 되지 않도록 결사적으로 저항하다가, 다수의 지원을 못 받아 결국 그런 날이 오면 모두 옥쇄라도 할 생각일까? 절대로 그럴 리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에 관해 "좀 더 뻔뻔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하는 한 기사를 보니, 1990년대 초 덕성여대 학보사 기자로 일할 때 학내집회에 참석한 노무현에게 반해서 그가 대통령이 되자 환호했지만, "이라크에 군대를 파병할 때 실망하고 한미 FTA를 추진할 때 내 마음 속에서 조용히 그를 보냈다"고 한다(☞ "조금 더 뻔뻔했으면... 바보 노무현"). 나는 이 기자에게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 FTA가 구체적으로 어떤 이유 때문에 그토록 혐오스러웠는지는 (또는 아직도 혐오스럽고 앞으로도 혐오스러울 것인지는) 잘 모르지만, 막상 이라크에 한국군이 가서 활동하고 돌아온 사실 때문에 그 상심이 더 커지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한다. 노무현을 "마음 속에서 조용히 보낸" 원인이 된 한미 FTA도 지루한 공방을 거쳐 막상 시행될 즈음이 되면 지금 결사반대하는 사람들 중 절반 이상에게 굳은살이 생겨서 심드렁한 일상사의 일부로 편입될 것이다.
시간이 지나 심드렁한 일상사로 편입될 일이라면 적어도 결사적으로 반대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은 아니었다는 확실한 증거로서 부족하지 않다. 그런 일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물론 자유지만, 거기에는 개인적인 취향 또는 좌절감이 작용한 것이 틀림없다. 사회구성원들이 주권적인 시민으로서 어떤 이유에서든 어떤 정책에 대해서든 나름대로 강한 의견을 가지는 것까지는 나로서 개탄하기보다는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민주주의가 자생력을 가지고 작동하려면 어쨌거나 시민들 개개인이 뚜렷한 주관과 분별력을 갖춰야 하고, 그러려면 일단 주입된 의견이 아닌 나름의 의견을 가지는 것이 선결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차적으로 각 개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관념이라는 것은 나름대로 아무리 매개와 검토를 거쳤다고 하더라도, 다시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론을 만날 때 그대로 관철되기만은 어렵다.
그런데 선험주의의 프레임은 예지력과 선견지명을 가진 개인을 동경하며 숭앙하는 방향이기 때문에, 이런 프레임에 따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예언자의 역할을 해야 할 의무 또는 허영심에 빠지기가 쉽다. 하지만 허영심에서 비롯되는 예언자 흉내일수록 의식역(意識閾) 위에서든 아래서든 내심 자신의 오류가능성이 켕기기 때문에, 자기가 틀렸다고 판명이 될 수도 있는 검증의 판 자체를 두려워하게 된다. 따라서 자기 맘속의 두려움을 증폭해서 선동하는 행태에 자신을 내던지기 쉽다. 반면에 미래에 관해서든 과거에 관해서든 남들이 보지 못하는 대목을 명료하게 감지하고 있는 사람일수록, 남들을 억지로 끌고 가려 들기 전에 그들이 두려움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게 된다. 공황상태에서 울부짖는 사람들에게는 애당초 밝은 이치가 통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두려움, 공포, 공황의 본질은 불확실성을 무서워하는 데 있다. 엄마 품에서 아늑하게만 살다가 낯선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게 된다면 겁이 나기도 할 것이다. 하지만 자기가 곧 다른 사람들에게는 낯선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특별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보면 나 역시 아직 만나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무서워 떨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반면에 다른 사람들을 동료가 아닌 먹잇감으로만 여기는 사람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먹잇감 아닌 동료로 여기리라고 기대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남을 두려워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앞 제2부 제6장에서는 차이를 관인하지 못하는 태도가 제노포비아임을 지적했고, 제3부 제5장 제2절에서는 불확실성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이 또한 제노포비아임을 지적했다. 이 와중에서 "부정확하고 도움이 안 되는 추정을 믿어버리고, 자기 주변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자기가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과대평가하는 실수를 저지르며, 그 결과 제반사의 진행에 자아를 너무나 결부시켜 일이 뜻대로 안 되면 불필요하게 자신을 책망한다.
아울러 "독심술"의 덫에 빠져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이나 느낌에 관해 성급한 결론으로 비약하기 때문에 남이 악의 없이 한 행동을 자신에 대한 비판으로 읽기가 쉽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보통 거부하며, 누구도 자신을 꺾을 수 없다는 착각에 무모한 짓을 벌인다".
이 인용문은 위키피디아(Wikepedia)의 "사춘기(Adolescence)"(☞ 바로가기) 기사 중 "심리적 고비(psychological challenge)"에 열거된 증상을 거의 그대로 번역한 결과다. 사춘기 아동들이 아직 시야가 좁아서 자아 바깥의 외부세계를 두려워하면서 적절한 대응의 수위를 터득하지 못한 데서 말미암는 증상인 것이다.
물론 부정확한 추정, 과대평가, 일에 위신을 결부시키기, 성급한 결론, 무모한 행동, 등은 사춘기 때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성인들도 자주 저지르는 실수다. 하지만 자기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깊이 인정하고, 어떤 일의 결과를 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을 줄 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성숙한 사람이라고 일컬을 수 있다. "결과를 보고 실수를 깨닫는다"는 것도 물론 객관적으로 명확한 척도는 아니고, 다시 "어떤 결과에서 어떤 실수를 어떻게 깨달을지" 자체가 복잡한 논쟁의 주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예컨대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에 갔다 온 일은 조지 W 부시의 체면을 조금이나마 세워줘서 속상해할 사람이 없지는 않겠지만, 이라크 사람들에게 준 도움뿐 아니라 거기 다녀온 장병들 대다수에게도 좋은 경험이 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노무현이 목숨을 끊은 후까지도 그것 때문에 그에게 섭섭함을 느낀다는 정서는 결과를 보고 실수를 깨달은 부류에는 속하지 않는다. 전형적으로 "진보"라는 말의 자의적인 규정에 얽매여 있으면서, 그 공허한 말장난의 쳇바퀴 밖으로 나오기를 겁내는 행태에 해당한다.
모든 두려움은 부정확한 추정, 백해무익한 교만, 상상과 현실의 혼동, 등에서 비롯된다. 이라크 파병이 치명적인 잘못이었다고 지금도 고집하고 싶은 사람은 나름대로 정합적인 시나리오를 장황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이다. 체니가 이라크 공격을 정당화하면서 써먹듯이, 역사에 대한 가정을 여러 가지 집어넣는 수법을 쓰면 어떤 시나리오도 나름대로 그럴 듯한 모양으로 내놓을 수는 있다. 이명박 정권이 촛불과 대북화해정책에 대한 두려움을 여러 가지 역사적 가정들을 끼워 맞춰서 그럴듯한 말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저런 식으로 말을 만들어 자기를 변명하기로 작정한 사람에게 말로 이치를 설득할 방법은 별로 없다. 여러 번 밝혔듯이, 이 연재는 그런 사람들더러 읽으라는 것이 아니다. 한국정치의 현재 상황을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해보고, 어떤 개선의 가능성을 구하는 관심에 내가 나름대로 내놓을 수 있는 하나의 응답일 뿐이다. 나는 당파적인 증오나 자기 위신세우기를 잠시 뒤로 접어두고 생각한다면, "대량살상무기" 때문에 쳐들어간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잘못이었음이 적어도 지금은 분명하게 판명이 된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그런 부시의 요청을 마지못해 수락하면서도 평화재건활동에 임무를 국한한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을 "현명한 결정"으로 보는 내 일차적인 평가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이라도, 그 일이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어떤 누구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준 일이 아니라는 점에는 동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결론들을 일의 결과로부터 명확하게 찾아낼 수 있다면, 촛불이나 대북화해정책에 대한 이명박의 두려움 역시 명확하게 잘못임을 지적할 수 있으리라고 나는 확신한다.
▲ 자이툰 부대를 방문한 노무현 전 대통령. ⓒ연합뉴스 |
그런데도 한국사회에서는 보수나 진보를 막론하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선험주의의 프레임에 갇혀서 자기가 만든 말의 덫과 족쇄에서 헤어날 줄을 모른다. 예컨대 위에 내가 든 예 가운데 이명박 정부의 공포에 동의하는 사람 중에는 노무현 정부의 이라크 파병에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 일이 실제로 초래한 결과에 근거해서 판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또 실제적인 결과를 우선시하는 관점에서 그 일의 공과를 성찰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적 결과와 상관없는 어떤 선험적인 본질에서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하기 때문이다. 이때야말로 선험적인 본질은 전형적으로 패거리 구분에 의해 좌우되기가 무척 쉽다.
선험주의적 사고방식은 모든 정치적 문제에 객관적인 정답이 있다고 보면서, 통찰력이라든지 선견지명과 같은 우월한 지성이 그 정답을 찾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주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벌어지든지, "우월한 지성"의 소유자라는 간판을 차지하기 위한 위신싸움이 주제 자체에 대한 탐구보다 자연스럽게 더욱 중요시된다. 따라서 아무리 소소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이라도, 당사자들의 위신이 결부되기 때문에 무한히 다른 문제들과 결부되어 해당 주제 자체에 관한 종지부가 찍히지 않는다.
제3부와 제4부에서 여러 차례 논증하고 예시했듯이, 어떤 정책이나 노선이 올바른 방향이었는지 또 효율적으로 입안되어 시행되었는지를 아무 이의도 나올 수 없을 만큼 명쾌하게 판정할 도리는 없다. 시행 전에는 더욱 어렵지만, 다만 결과가 나온 다음에는 그나마 정치적 당파균열과 상관없는 지평에서 성과를 판정해볼 수 있는 여지가 좀 생긴다. 이익이 계급별로 당파별로 충돌하는 가운데, 정치사회가 그나마 하나의 공동체로서 공통분모를 가지려면 오직 정책의 성과를 결과에 근거해서 판정하고, 그 판정을 공유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경험으로부터 배운다, 또는 실수로부터 배운다는 말의 뜻이 여기 있다. 이로부터 공통적인 논리와 검증절차가 생겨나, 사회생활의 온갖 부면에서 제일층위의 이익충돌과 가치충돌이 제이층위에서 조정되고 관리될 수 있다.
그러나 선험주의 프레임은 바로 이와 같은 결과를 통한 공통분모의 생성을 천박하다고 경멸하고 만족수준에 한참 미치지 못한다고 일축해버린다.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사춘기 정서에서 바라보면 뭔가 멋있어 보이지 않고, 너무나 지루한 일상성과 닮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치에서 멋을 부리기 위해 일상을 경멸하게 되면 바로 초인의 이름으로 무수한 평민들을 짓밟아도 된다는 발상만이 남는다. 이런 발상이 한국사회에는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뒤죽박죽으로 뒤엉켜 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파당과 진영의 구분에 따라 서로 다른 선험적 해답들이 일차원 평면에서 서로 부딪치는 형국만이 이어진다.
나는 앞 장에서도 언급했듯이, 현재의 대한민국 정치사회를 구조적으로 한 단계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어떤 주어진 문제의 실상에 관한 진상조사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본다. 복지정책, 기업투명성, 공무원 업무의 효율성, 교수나 교사들의 연구역량과 강의능력, 비정규직의 실태, 표절, 부동산투기, 기타 등등, 공정한 판정을 내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실상에 관한 정확한 파악이 필수적이다. 한 사건에 관한 판정과 다른 사건에 관한 판정이 형평에 부합하는지도 다양한 사례들의 실상이 정확하게 파악되어야 분별될 수가 있다. 충분히 수가 많은 유사한 사례들의 진상에 관한 합의가 없는 상태에서는 공정성이든 형평성이든 전혀 생성될 수 있는 가능성이 없다.
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작은 의문을 침소봉대해서 파헤치면서 혐의사실을 중계 방송한 작태와 삼성 비자금 사건에서 오히려 X파일 내용을 공개한 당시 국회의원을 처벌하는 작태는 오로지 검찰이 진상의 열쇠를 틀어쥐고 선별적인 문지기 노릇을 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것을 믿고 조선일보 방 사장은 이종걸 의원을 오히려 명예훼손으로 걸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사착수 시기에서부터 법원의 지휘 아래 절차적 공정성이 확보되도록 형사소송법을 개정하는 등, 공개할 정보와 공개해서는 안 될 정보의 구분을 판사의 분별에 맡기도록 하고, 법원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아무리 작은 일도 반사회적인 범죄행위로 처벌하도록, 사법절차에 관한 발본적인 변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그 문제를 이 연재에서는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어렵고, 기본적인 얼개만을 제6부에서 논의할 것이다. 그 전에 제5부에서는 이 연재에서 고발하고 비판하려고 한 네 가지 프레임 가운데, 네 번째인 민족주의를 검토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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