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문화부는 지난 3월부터 5월까지 한예종에 대한 현장 감사와 서면 감사 등을 벌였고, 그 결과를 지난달 18일 한예종에 통보했다. 감사 결과에는 12건의 처분이 담겨 있었고, 이와 함께 문화부는 황지우 총장에 대한 중징계를 교육과학기술부에 요청했다. 황 총장이 사퇴를 결심한 계기였다.
지난 2일, 황지우 총장과 한예종 교수협의회는 기자회견을 열고 "황 총장의 교수직 박탈을 기점으로 학교의 강압적인 구조 조정이 본격화할 것에 깊은 우려를 표명한다"고 밝혔다. 이들은 법적 대응 등 다양한 방법을 통해 부당한 감사에 대응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학생들도 나섰다. 지난달 20일 학생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이들은 성명서를 발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1인 시위를 벌였다. 서울 석관동, 서초동에 있는 양 캠퍼스에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붙인 호소문이 곳곳에 붙어 있다.
지금 한예종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충격과 위기'이다. 1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에서 교수와 학생 모두 대책 회의와 대응책 마련에 여념이 없다. 학교 측은 감사 결과에 대해 이의 신청을 할 예정이다.
지난 2일 한예종 교수협의회 의장을 맡고 있는 김채현 교수를 만나 한예종 사태의 전모를 물었다.
▲ 1학기가 마무리되는 시점이지만, 한예종의 분위기는 교수와 학생 모두 '충격과 위기 의식'을 느끼고 있다. 서울 서초동 한예종 캠퍼스. ⓒ프레시안 |
"색깔론은 '표면'…예술계 이해관계 얽혀 있다"
"색깔론은 표면적인 부분이다. 사람들이 이해하기도 쉽고, 잘 먹히니까. 그러나 그 배후에는 예술계의 다른 인사들이 있다."
황지우 총장의 사퇴는 문화계 '좌파 인사 물갈이'의 수순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다. 이는 지난 1년간 이뤄졌던 다른 문화기관장의 사퇴와 상당히 비슷한 절차를 거쳤기 때문이었다.
황 총장은 지난 1월 문화부 관계자가 학교를 찾아와 거취를 물었다고 밝혔다. 그는 임기를 지키겠다고 했고 이후 집중 감사, 징계 추진 등 일련의 과정이 벌어졌다. 이는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김정헌 전 한국문화예술위원장과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황 총장의 사퇴는 다른 기관과 달리 '마지막 수순'이 아니었다. 문제는 학교의 구조 개편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긴 감사 처분 통고서였다.
여기에는 한예종이 2008년부터 추진했던 예술과 과학기술의 통섭 교육(U-AT) 중지, 이론과 축소·폐지, 전공과 무관한 교수 채용, 서사창작과 폐지 등이 포함돼 있었다. 사실상 전반적인 학제 규모를 축소하라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이런 내용이 전국예술대학교수연합과 문화계 뉴라이트를 표방한 인사들이 소속된 문화미래포럼의 그간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이다.
"한예종은 실패작? 못 먹는 감 찔러보는 건가"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에 따르면 지난 2008년 9월 3일, 두 단체가 주최한 심포지엄에서 동국대 영화영상학과 정재형 교수는 "한예종은 지난 정부의 실패작"이라며 구조 조정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정재형 교수는 "각 원의 이론과 및 협동과정은 물론 타 예술대학과 중복되는 모든 전공을 폐지하고, '대학'이 아닌 조기 영재 교육만을 담당하는 본래 취지를 살린 '작은 대안학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또 서우석 서울대 음악대 명예교수는 "해체를 우리가 직접 주장할 필요 없이 정부가 진행하는 것을 보고 있으면 된다"며 "해체 이후의 인력과 기자재 배치 문제를 논의하는 공청회를 하자"고 언급하기도 했다. 정준모 전 고양문화재단 전시감독은 "과거 수도공대가 홍익대에, 서라벌예대가 중앙대에 넘어갔듯이, 해체 이후의 배치 걱정을 하지 말라"며, "부분 인수할 대학도 많고, 입찰을 붙여서 떼주면 간단하다"고 덧붙였다.
김채현 의장은 "문제는 정부가 무비판적으로 이들의 주장을 따라가는 점"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부가 공정한 심판관이 되어줘야 하는데, 그게 전혀 안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일사천리로 이뤄지는 구조 개편 요구에는 일정한 정부의 이해관계도 얽혀 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김 의장은 "지금 정부에서 국립대 구조 조정이 계속 이야기되고 있다"며 "그 추진 과정에서 경험 축적 내지는 사례 정리를 위해 한예종을 본보기로 삼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다"고 말했다.
통섭 교육 딴죽 걸기…이유는 '없다'?
문화부 감사 결과에서 문제삼고 있는 주 사업은 바로 통섭 교육(U-AT)이다. 한예종은 예술 분야 간의 복합, 예술 및 과학, 인문 등의 융복합을 추진하는 통섭 교육을 5년 계획으로 추진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지난해 3월 업무보고에서 유인촌 장관은 "하던 것이나 하라"며 불쾌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문화부의 딴죽 걸기는 계속됐다. 2008년도 예산이 국회에서 통과됐지만, 2009년도 예산은 35억 원에서 20억 원으로, 다시 장관의 지시로 20억 원 전액이 삭감됐다. 한예종은 사업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자체 기성회비로 사업을 운영하기로 했다. 이를 두고 문화부는 감사에서 "장관의 지시를 불이행했다"며 이를 황지우 총장 징계 사유와 감사 처분에 적시했다.
문화부를 비롯해 통섭 교육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는 인터넷미디어협회와 변희재 <빅뉴스> 대표의 주요 요지는 한 마디로 한예종이 할 사업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기 전문기관으로 설립된 한예종의 취지에 맞지 않는다는 것. 카이스트와 문화콘텐츠진흥원에서도 비슷한 사업을 한다는 점도 이유 중 하나다. 김채현 의장은 이런 지적을 두고 "말이 안 된다"고 반박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우리 학교의 설립 형태는 1990년대 초반의 개념이다. 그러나 그 동안 시대 상황은 너무 많이 바뀌었다. 전문 실기 교육기관을 전면에 내세웠던 설립 당시에 생각하지 못했던 세상이다.
지금 통섭 교육은 학교가 가진 아날로그적 실력을 기반으로 이 시대 문명의 변동을 빨리 흡수해서 예술 발전을 도모해보자는 것이다. 자꾸 한예종은 실기 전문학교라서 하면 안 된다는 이들은 자신들이 아날로그에 갇혀 얘기한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다."
한편, 예술계 일각에서는 다른 해석도 나온다. 중앙대학교 등 다른 대학 역시 세계적 추세로 읽혀지는 통섭 교육에 욕심을 냈는데, 한예종이 '선수를 쳤다'는 것. 중앙대는 유인촌 장관이 교수로 재직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 한예종 캠퍼스에는 학생과 졸업생들의 항의 글과 호소문이 곳곳에 붙여져 있다. ⓒ프레시안 |
"실기 전문학교에 이론과가 너무 크다? 과장된 왜곡"
한예종이 이론학과를 설립 취지와 맞지 않게 확대했기 때문에 이를 축소해야 한다는 문화부의 감사 결과 역시 앞서 문화미래포럼과 예술대학교수연합이 펼친 주장과 같다. 이를 두고 김채현 의장은 "학교를 음해하는 과장된 왜곡 전파이자 악소문"이라며 "이론학과가 늘어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원에 따라 축소한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한예종은 실기 전문 교육기관이라는 건 맞다. 그런데 그 뜻이 뭔가. '실기만' 가르치는 교육이 실기 전문교육인가. 그렇게 하면 학생들 '딴따라'밖에 안 된다. 실기만 하는 교육의 앞날은 불보듯 뻔하다.
이런 식으로 예술을 보면 안 된다. 예술에 필요한 건 지식을 엮은 지성이다. 피카소, 백남준 같은 천재는 키워주지 않아도 두각을 나타낸다. 학교 교육은 수재와 준재를 가르쳐서 천재형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요즘 어느 영재교육을 봐도 어릴 때부터 지성을 쌓는데 초점을 맞춘다."
김채현 의장은 "또 이론 교육을 통해 실기자들을 가르칠 이론 지도자를 길러내는 것 역시 대학이라는 기관의 몫이 아닌가"라며 "그런 이들을 집중적으로 키우는 학교가 우리나라에서는 더 많아져도 모자랄 판에 왜 있는 것도 축소하려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짧은 역사에 뛰어난 사례…이래도 실패작인가"
김채현 의장은 "한예종은 실기 역시 제대로 가르치려 했다"며 "우리나라 예술대학에서 입시 부정을 저질러서 문제가 심각해졌기 때문에 멀쩡한 대학들 놔두고 한예종을 만든 것 아닌가"고 덧붙였다.
1994년 설립 이후 한예종 학생들이 국·내외에서 올린 성과는 예술계 전반에서 인정받고 있다. 국내외 유수 콩쿨과 각종 경연에서 1위 수상자가 473명에 이른다.
김 의장은 "물론 대한민국 국력이 그만큼 신장되고, 한예종에 좋은 학생이 들어와서 그럴 수도 있을 것"이라며 "그러나 짧은 역사에도 뛰어난 사례가 자꾸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예종은 다른 사립 예술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렴한 등록금으로도 알려져 있다. 약 200만 원 가량의 저렴한 등록금으로 인해 학교 측은 집안 사정이 여유롭지 않아 해외 유학을 가지 못하거나 사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이 한예종에서 교육을 받아 예술계에 기여했다고 자부하고 있다. 김 의장은 "교수의 월급 역시 다른 예술대에 비해 훨씬 적다"며 "그럼에도 교수들이 한예종에서 일하는 이유는 인재 육성 밖에 더 있나"라고 덧붙였다.
현재 한예종 교수와 학생들은 학교가 타의에 의해 구조 조정이 될 수 있다는 위기감에 시달리고 있다. 김채현 의장은 "한예종이 외부 인사들의 뜻대로 바뀌게 되면 젊은 세대가 자신감을 많이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그는 통섭 교육에 대해서도 "우리 학교만큼 예술 분야 다양성을 하나의 시스템 속에 가진 학교가 없다"며 "단과대학으로 나눠져서 협동 내지 공동 사업이 어려운 것이 한국 대학의 현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공론화 작업 없이 행정 감사로 학사 운영을 감사한 것은 교권 침해 소지가 굉장히 크다"고 지적했다.
"정부 부처나 장관이 가져야 할 것은 포용력이다. 국가 전체 방향으로 봐서 어긋나지 않는데 개인적인 관점이나 이해 관계를 내세워 학교 운영 전반을 좌우하려는 것은 우리나라 공직자가 취할 태도가 아니다."
유인촌 "차기 총장에 전권"…신재민 "우파 집권하면 우파 총장 나와야" 인터뷰가 이뤄진 지난 2일은 한예종 사태에서 또 한 번의 '전환점'이기도 했다. 이날 한예종 교수와 학생은 문화부 유인촌 장관과 신재민 차관으로부터 각각 의견을 전달받았다. 유인촌 장관은 이날 오전과 오후, 각각 한예종 소속 6개원 원장과 학생비상대책위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유 장관은 이론학과 축소를 재고하고 서사창작과 폐지 등 감사에서 문제로 제기됐던 내용도 조율하겠다고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또 유 장관은 차기 총장 선출을 언급하며 "학교와 교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다"고 했으며 "한예종 구조 개편은 차기 총장이 임명된 후에 학교 내에서 논의가 되어야 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황지우 총장의 교수직 박탈을 두고서는 "황지우 전 총장의 교수직 복직에 관해 학교에서 재임용 절차를 거치면 된다"고 덧붙였다. 이를 두고 학생비상대책위는 "유 장관은 전반적으로 유화적인 태도였지만 입장에 있어 종전과 큰 차이는 보이지 않았다"며 "통섭 교육을 반대했으며 '너희들이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정말 이론과 폐지할 수 있다'는 식의 발언도 있었다"고 밝혔다. 그러나 같은 시간, 신재민 문화부 1차관이 한예종 서초동 캠퍼스를 찾아와 음악원장 및 기획처장을 비롯한 몇몇 교수를 만나 '다른 이야기'를 전했다. 신재민 차관은 "황지우 총장이 현 정권을 지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유럽에서는 좌파 정부가 집권하면 총장도 좌파에서 나오고, 우파가 집권하면 우파에서 총장이 나와 정부와 협력적인 관계를 갖는다" 등의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한예종 교수협의회는 "실로 충격적"이라며 "그의 발언은 결국 현 정권과 코드가 어울리는 사람이 차기 총장이어야 한다는 저의를 드러낸 것이나 다름없다"고 밝혔다. 교수협의회는 3일 신 차관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통해 "비지성적인 이면 행태, 표적 감사 그리고 총장 사퇴로 인해 본교가 엄청난 고통과 아픔을 겪고 있는 매우 민감한 이 시기에 특히 신재민 차관의 발언은 주무 차관으로서 본교를 보호하기는커녕 본교의 모든 구성원들을 정치적으로 압박하고 분열시키려는 몰상식한 처신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신 차관은 차기 총장 선임에 대비하여 미리 선거에 개입하려는 의도를 즉각 거두고 본교 교수들에게 정중히 사과하고 자중할 것을 촉구한다"며 "아울러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본교 업무를 총괄하는 차관을 교체할 것을 문화체육관광부에 공개적으로 요구한다"고 밝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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