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중한 알선수재 혐의에 대해 김형두 서울중앙지법 영장전담 부장판사가 그랬다. "박연차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 로비 부탁을 받은 천신일 회장이 한상률 전 국세청장에게 청탁을 한 사실은 인정되지만 수수한 금품의 대가성에 대한 소명이 부족하다"고 했다.
방점을 찍자. 법원은 인정했다. 천신일 회장이 세무조사 무마 로비를 벌인 사실, 그리고 금품이 오간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았다. 오간 금품이 세무조사 무마 로비의 대가라는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을 들어 범죄(알선수재)의 구성요건을 갖추지 못했다고 판단했다.
이왕 짚은 김에 두 가지 사례를 더 살피자.
▲검찰이 한국중부발전 전 발전처장 박모 씨를 기소했다. 납품 청탁과 함께 협력업체에서 2천만원을 받은 혐의(배임수재)가 있다고 기소했다. 하지만 1심과 2심 모두 무죄를 선고했다. "피고인이 돈을 받은 사실이 인정되지만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를 단정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검찰이 한국수력원자력 전 재무팀 간부 허모 씨를 기소했다. 거래처로부터 청탁과 함께 2천여만원을 받은 혐의(배임수재)로 기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허씨가 금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부인하는 반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 구모 씨의 진술이 유일하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의 세무조사 무마로비 의혹을 받고 있는 천신일 세중나모여행 회장이 구속영장이 기각돼 2일 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나와 귀가하고 있다. ⓒ뉴시스 |
종합하면 분명해진다. 단순히 금품이 오간 혐의만으로는 공소를 유지할 수 없다. 유죄 판결을 이끌어내려면 청탁과 대가성, 그리고 금품 수수 사실을 하나도 빠짐없이 소명해야 한다. 이게 법원의 잣대다.
어떨까? 세 사례에서 확인된 법원의 잣대를 '노무현 수사'에 대면 어떤 결론이 나올까?
형식상으로 보면 적합하지 않다. 세 사례와 '노무현 수사'를 단순 대비하는 건 부적절하다. 검찰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적용하려던 혐의는 알선수재 또는 배임수재가 아니라 포괄적 뇌물죄다. 포괄적 권한을 갖고 있는 대통령과 포괄적 선처를 바라는 청탁자 사이에 금품이 오갔을 경우에 성립되는 범죄다. 그래서 대가성에 대한 입증과 소명이 다소 부족하더라도 법적 제재가 가능하다는 범죄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포괄적 권한을 갖고 있던 대통령 재임 시절에 100만 달러가 오간 사실을 알았다는 점만 입증되면 공소 유지에 큰 어려움이 없다고 봤던 범죄다. 이런 포괄적 뇌물죄와 천신일 회장에 적용된 알선수재죄는 분명 다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 보면 굳이 대비 못할 이유가 없다. 범죄 구성요건 중 어느 하나라도 제대로 입증되지 못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는 법원의 판결 취지를 '의역'하면 '노무현 수사'에 시사하는 바가 적잖다.
이런 것이다.
검찰은 100만 달러가 오간 사실은 확인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또한 이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확인하지 못했다. 100만 달러가 오간 사실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중에 인지했는지 여부를 확증하지 못했다. 포괄적 청탁과 포괄적 대가 이전에 포괄적 인지 여부를 소명하지 못한 것이다.
물론 다르게 말한다. 검찰과 언론 일각은 '상식'과 '정황'을 근거 삼는다. 박연차 회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보고 돈을 줬다"고 진술한 점, 100만 달러가 건네진 장소가 청와대인 점을 들어 노무현 전 대통령이 금품 수수 사실을 재임 중에 알았다고 보는 게 '상식'이요 '정황'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질없다. 이런 '상식'과 '정황'이 얼마나 허약한 것인지는 앞서 나열한 사례에서 이미 확인된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어떤 사람이 '피 같은' 돈을, 그것도 수천만원을 건넸다면 대가를 바랐을 것이라고 보는 게 '상식'이고, 그 과정에서 청탁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게 '정황' 이다. 하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피고인이 돈을 받은 사실은 인정되지만 부정한 청탁이 있었는지를 단정할 수 없다"고 한다.
억하심정이 없는 한 생사람을 무고하는 사람은 없다. 더구나 박연차 회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오랜 후원자였다. 이런 사람이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일부러 옭아매기 위해 거짓 진술을 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게 '상식'이다. 하지만 법원은 인정하지 않는다. "(돈 받은 혐의를 받고 있는 피고인이) 금품을 받은 적이 없다고 일관되게 부인하는 반면 공소사실을 뒷받침하는 증거는 돈을 줬다고 주장하는 진술이 유일하다"면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한다(법원이 박연차 회장과 천신일 회장 사이에 오간 금품 가운데 15만 위안, 즉 베이징 올림픽 때 오간 2500만원을 '뇌물'로 보기 어렵다고 밝히면서 "두 사람이 1971년부터 막역한 관계였던 점"을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제시한 점도 눈길을 끌지만 따로 언급하지 않겠다).
둘러보고 둘러봐도 이해할 수가 없다. 지금까지 언론이 중계방송한 수사 내용을 놓고 보면 검찰은 무리수를 뒀다. 근거가 허약한데도 사건을 거창하게 키웠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돌출상황을 빼놓고 보더라도 뒷감당을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판을 키웠다.
그래서 묻고 촉구하는 것이다. 노무현 수사자료를 공개하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행여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은 '비장의' 증거가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다. 재판 진행 중에, 결정적인 타이밍에 '비장의' 물증을 내놓으려고 했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검찰이 앉아서 여론의 뭇매를 맞을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단지 '상식'과 '정황'에만 기대 노무현 전 대통령을 법적으로 옭아매려 했다면 그건 대한민국 최고의 사정기관에 어울리지 않는 '아마추어'의 면모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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