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정치와 상관없는 교육개혁은 없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정치와 상관없는 교육개혁은 없다

[박동천의 집중탐구]<46>공교육에 대한 환상

제4부 선험주의: 선견지명 프레임
제8장 공교육에 대한 환상


앞에서(제2부 제3장) 나는 이기심이 민주주의의 바탕이고, 개인의사의 차원과 공공의사의 차원을 구분해야 하며, 정책의 공공성이란 경합과정의 공공성에 있다고 주장했다. 아이작 뉴턴이 미적분법을 최초로 개발했다는 영예를 위해 라이브니츠와 경쟁했다는 사실은 유명한 얘기다. 뉴턴의 명예욕이 동기로 작용했다는 이유로 미적분법의 공공성이 조금이라도 훼손되지는 않는다. 세종이든 조지 워싱턴이든 에이브럼 링컨이든 백범 김구든 김대중이든, 권력욕 또는 지배욕이 없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정치판에 뛰어들어 망신과 모욕을 무릅쓸 까닭이 없고, 그러므로 누구의 권력욕이 더 컸느냐에 따라서 그들의 업적에 대한 평가가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서머세트 몸이 돈벌이를 위해 글을 썼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 가치가 줄어드는 것은 아니고,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이윤추구가 독점적인지 아닌지에 따라 윈도우나 익스플로러의 효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의도와 동기를 문제 삼는 태도가 팽배하다는 점은 앞에서 여러 번 고발하고 비판했다. 예컨대 용산 참사 재판에서 수사기록을 보여주지 않는 검찰에게 항의하는 시위에 정치적 의도가 있다고 한다면, 수사기록을 보여주지 않는 검찰에게도 정치적 의도가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논쟁은 정치적 의도가 있느냐 없느냐를 둘러싸고 벌어져서는 끝이 없고, 실체적 진실의 발굴이라는 재판의 목적에 비추어 수사기록을 공개해야 하느냐 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 정치적인 논쟁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모두 일정한 정치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런 마당에 상대방의 "정략적" 의도를 걸어 문제 삼는다는 것은 곧 논쟁을 진흙탕 싸움으로 바꿔서 점잖은 사람일수록 끼어들지 말라고 협박하는 짓과 같다.

다시 말하면, 유권자들이 스스로 원하는 바를 구체화해서 주장하지는 않은 채 마냥 정치인들에게 공공성만을 요구하는 수준의 미개한 정치의식에 머무른다면, 공공성이라는 말 속의 내용은 갈수록 공허해지기만 하고 껍데기뿐인 "공공성"의 간판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우는 아비규환만 남는다. 최근 십수년 사이에 부쩍 자주 사용되는 "공교육"이라는 문구 역시 전형적으로 한국에서 자주 발견할 수 있는 분화되지 못한 환각의 결과다.

왜냐하면 학교는 공이고 학원은 사라는 이분법은 자체로 전혀 정합적인 의미를 가질 수도 없고 어떤 실제적인 목적에 도움이 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학교에는 국립, 공립, 사립이 있다. 사립학교라도 중등교원들은 국고에서 급료를 받지만 사립대학의 교수들은 그렇지 않다. 아울러 사립대학이든 사립학교든 사설학원이든 정부예산에서 지원금이나 보조금을 받을 길은 다양하게 열려있다. 그러므로 학교와 학원을 공교육 사교육으로 구분하는 말버릇은 문제를 파고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대충 덮기를 바라는 전형적인 무별주의 얼버무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물론 정치나 교육이나 언어의미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 대중에게 언사가 분석적이지 못하다고 탓할 수는 없겠다. 하지만 교육학자나 사회운동가라는 사람들까지도 요새는 대중이 쓰는 어휘를 따라 쓴다. 그러니 대중이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면 아무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민주주의인 것이 맞다.

무엇이 문제인지를 찾지 못하게 방해하는 어법이 문제해결에 도움이 될 리는 당연히 없다. "공교육 붕괴" 따위 둔사는 의미가 있거나 말거나 남들처럼 덩달아 질러대면 일단 뭔가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표현하고 싶은 욕구를 명확하게 만들지 않아도 되는 편리함은 있다. 하지만 그 사이에 뭘 어떻게 해야 할지에 관한 구체적인 관심은 저절로 무뎌져서, 출구는 없이 불만만 남게 되는 것이다. 뭘 어떻게 실제로 행동을 하려면, "맛있는 것"을 찾지 말고 기성품인 "짜장면"과 "짬뽕" 중에 고르든가, 아니면 자기가 원하는 음식을 구체적으로 주문해야 한다. 다시 말해, "학원에 안 보내도 되는 상황"을 원하는지 "학원에서 밤을 새도 좋으니 학원비만 싸게 해주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그야말로 내 아이가 "출세보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도록 교육받기를 원하는지를 학부모들이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험악하다고 보고, 급하면 반칙을 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는 기술을 내 자식에게 전해주고 싶다면, 현재의 한국 교육은 상당히 괜찮은 편이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부모가 시키는 대로 여기저기 다니는 훈련을 받고, 중고등학교부터는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맡겨진 일을 하는 척 꼼지락거리면서, 불만일랑 맘속에 깊게 갈무리하든지 아니면 남들 안보는 곳에서 적당히 푸는 요령을 익힌다. 대학부터는 들어간 운명에 따라 신분사회의 틀에 맞춰서 살기만 하면 적어도 튄다고 왕따 당할 리는 없고, 정히 불만이 강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면 자기 책임 아래 소리를 못 지를 것도 없다. 악착같은 부류는 그런 대로, 선한 부류는 또 그런 대로 일인당 GNP 만오천 달러인 나라답게 특별히 좌절에 빠지지 않는 한 굶어죽지는 않을 정도는 되는 것이 한국 사회다. 감수성을 죽여서 없는 일로 바꾸고,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을 버티고 견디는 훈련만큼은 우리가 지금 제법 잘 시키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 아이가 노력을 좀 덜해도 남의 집 아이보다 성적이 뛰어나기를 바라는 의미로 "공교육 붕괴"를 성토한다면 베란다에 정한수 떠놓고 하든, 무당 불러다 신내림굿을 하든, 불상이나 십자가를 장치해둔 기복신앙 점집에 찾아가든, 기도나 할 밖에 다른 길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기도할 때에는 다른 집들도 다 그렇게 기도할 텐데, 여호완지 옥황상젠지 달마도산지 시바의 여신인지 몰라도 뇌물 바친 사람들 중 뉘 집 자식을 편애해야 할지 참 골치 아프겠다는 사실을 한번 궁리해보면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지 모른다. 그러니까 매개되지 않은 제1층위에서는 내 자식이 공부 잘해서 서울대나 연고대의 법대나 의대를 들어가 출세하기를 바라더라도, 약간만 매개를 거친 제2층위에서는 내 자식이 공부뿐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에서도 특출 나지 못하더라도 너무 실망은 하지 않도록 기도하는 편이 좀더 현명할 것으로 내 눈에는 보인다.
▲ ⓒ연합뉴스

만약 내 아이가 남보다 뛰어나지 않아도 좋으니 나름대로 가치 있는 일거리를 찾아서 자신의 행복을 얻고 남에게도 가능한 한 도움이 되는 사람으로 교육받기를 원한다면, "공교육붕괴"를 성토하더라도 절제와 분별이 가능할 것이다. 예컨대 학교가 아이들의 다양한 동기와 관심과 의욕과 호기심을 찾아서 길러주기는커녕, 오히려 싹도 트지 못하도록 짓밟아버리는 경향을 고치라고 정부와 이웃에게 요구할 수 있다. 교원자격증, 교재판매, 교육부의 관료적 권력, 그리고 사학재단이라는 이권이 다차원적으로 결합하여 기형으로 왜곡된 교과과정을 상식적으로 단순화하라고 요구할 수 있다. 배우고 싶다면 대학에 가서 전공을 하면 되고, 전공을 안 할 거라면 몰라도 세상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는 것들을 강제로 배울 필요 없이, 성악, 기악, 판소리, 민요, 사물놀이, 회화, 조각, 각종 스포츠, 온갖 종류의 공예, 원예, 요리, 등등, 등등, 실제로 사람들이 일생 동안 훨씬 더 많이 접하고 음미하고 활용하는 활동영역들을 학교에서 더 많이 배우고 연습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할 수 있다.

물론 저렇게 하자고 요구하는 것만으로 세상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만약 학부모들이 자기 자녀가 자아정체성이 뚜렷한 성숙한 인격으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공교육이 불만스럽다고 방과 후에 학원에 보낸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렇게만 생각해보더라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공교육붕괴"를 개탄하는 목소리는 내용이 상반되는 여러 갈래로 구성되어 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대한민국의 교육정책이 정부수립 후 계속해서 갈팡질팡을 거듭하는 까닭은 교육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에 관해 사회적 합의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부모들은 학교와 정부를 탓하고, 학교는 정부와 부모를 탓하고, 정부는 학교를 탓하는 책임전가의 악순환에 끼어 어린 학생들만이 인질로 잡혀있지만, 그 학생들이 자라면 다시 부모가 되고 선생이 되고 관료가 되어 나름대로 적응하는 형국이 반복되고 있다.

교육에 관해서는 할 말이 적지 않지만, 이 연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는 곤란하다. 내가 이 장에서 교육문제를 거론하는 까닭은 이 자체에 관해 어떤 해답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해답이라는 것이 공론장 안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소통에 의해서만 얻어질 수 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공론장 바깥에서 선험적으로 해답이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당사자들이 어떤 교육을 원하는지, 그리고 각 개인들 사이의 차이를 어떻게 조정해낼 수 있는지에 따라서 시도해 볼 만한 정책대안이 형성되든지 아니면 무산된다는 뜻이다. 정책대안이란 일단 한번 시도해 볼 만하다고 구성원들에게 지지받은 의견일 뿐이고, 그렇게 한다고 기대되는 성과가 나오리라는 보장은 당연히 없다.

정책대안으로서 고려해 볼 만한 것들은 무수하지만, 지금 논의하는 주제를 부각하기 위해 하나의 예를 들어본다. 학벌을 중시하는 사회풍토가 문제라는 지적들은 대단히 많다. 그런데 현재 있는 소위 "명문대학"들을 그대로 두고서 사람들더러 학벌을 중시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는 전혀 소용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1971년 파리에서 그랬듯이, 서울에 있는 모든 대학들을 연합대학으로 통합하는 방안을 진지하게 고려할 가치가 있다. 지금 종합대학이라는 형태로 산재하는 단위 하나에 학과 하나 또는 단과대학 하나를 모아 놓는 것이다. 이를 테면, 지금 고려대학교 캠퍼스에 서울 시내의 정치학과 역사학을 모두 모아 집결시키고, 지금 경희대학교와 한국외국어대학교를 합해서 외국어학과와 지역문화연구센터를 집결시키며, 서울대학교 캠퍼스는 자연과학과 공학을 집결시키는 등으로 하는 것이다. 물론 학과의 구분이라는 것이 중첩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같은 학과가 필요한 만큼 시의에 따라서 여러 군데 있게 될 것이다.

많은 독자들이 이런 얘기를 몽상으로 여길 것이다. 이런 기획을 성사시키려면 아주 상세한 청사진이 마련되어야 하고, 나아가 사회적으로 수긍이 이뤄져야 한다. 무엇보다도 현재의 대학체제를 유지하려는 이익에 대해 이치로 설득하고, 보상으로 위안하며, 마지막으로는 그래도 남아 있을 저항을 사회적 합의의 힘으로 누르고 넘어가야 한다. 나는 누가 저런 안을 심각하게 발전시켜서 작동가능한 구상을 발표한다면 적극 지지하겠지만, 현 단계에서 나 스스로 그런 역할을 맡을 생각은 없다. 지금 제시한 내용은 하나의 가상으로서, 교육정책에서 공공성이라는 것이 소통 및 합의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이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안이 공익에 이바지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오직 시행해 봐야 확실히 알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저런 발본적인 개혁을 통해서 기대하는 변화를 교수, 학생, 시민단체, 학부모, 여러 정당들, 그리고 당국이 충분히 음미해서 이해하고, 나아가 소기의 성과가 이루어 수 있도록 각자 자신의 행동방식을 그런 방향에 맞도록 조금만이라도 조정한다면, 아마도 기대했던 성과가 실현되기가 쉬울 것이다. 즉, 그때가 되면 이 시책은 공익을 증진했다고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이런 시책을 전횡에 의해 밀어붙이고, 당사자들은 복심으로는 협조할 마음이 전혀 없이 단지 튀어나 찍히지 않기 위해 침묵 속에서 눈치만 보고, 자극적인 화제 거리를 찾는 언론기관이나 정치평론가들은 시행과정에서 작은 착오가 나올 때마다 "봐라 안 될 것이 뻔하다"는 식으로 냉소만을 퍼뜨린다면, 공연히 소동만 벌여서 시간과 비용과 감정만 낭비한 결과가 빚어지기 쉽다.

촌각을 다투는 일을 제외하면 모든 사안에서 나는 일반적으로 소통과정에서 공정했다는 느낌을 구성원들에게 자아내는 정책이 공익에 기여한다고 본다. 그중에서도 특히 교육정책은 소통과정을 통한 가치와 목표의 공감이 정책의 공공성을 구성하는 알맹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단적으로 한국 근현대사 교과서의 서술방식을 둘러싸고 벌어졌고 앞으로도 계속될 논쟁은 교육의 문제가 정치의 문제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니까 정치적 쟁점에서 우리사회가 제1층위의 대립에만 매몰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교육이 지금 상태로 억압체제를 유지해서 강인한 생존능력을 기르는 것이나마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것이다.

교사의 직업적 이권, 자식을 통해 대리만족을 구하는 부모의 신분상승욕구, 그리고 관료들의 권력사유화라는 삼각관계에서 서로 책임을 전가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우리가 삶의 가치를 어디에 둘 것인지에 관한 범사회적인 각성 운동이 일어나야 한다. 그런 운동은 당연히 어떤 세력을 지원하고 어떤 세력을 배척하는 정치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육이 개선되기를 원하는 학부모라면, 교육개혁을 위한 어떤 제안이든지 선험적으로 모든 정파를 초월한 차원에서 지상으로 하사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정치와 상관없는 교육개혁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좀더 많은 학부모들이 남을 눌러서 출세하는 것 말고 다른 가치들에 눈을 뜨고, 자기 자녀들이 그런 가치들 가운데 자신에게 가장 주파수가 맞는 것을 찾아 추구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며,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정치적인 관심을 적극적으로 기울이게 되기 전에는, 다시 말해 "정치적"이라거나 "이념적"이라는 낙인 자체를 금기로 여겨 두려워하지 않게 되기 전에는, 저 책임전가의 삼각 악순환을 발본적으로 끊을 길은 없을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