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봉하마을에 다녀왔습니다. 봉하 가는 길, 노대통령의 응급처치를 하기 위해 들렀다는 세영병원도 있더군요. 열 시간 가량을 달리고 달려 15초 헌화와 묵념을 위해 밤새 줄서고 새벽까지 3시간 여를 기다린 그런 자발적인 밤이었습니다. 서울에서 미리 준비해간 국화 꽃 다발로 헌화를 하고 짧은 묵념을 하고 돌아서니 부엉이바위로 짐작되는 곳이 부옇게 밝아오더군요.
이제 부엉이 바위에는 노무현대통령이 삽니다. 그렇게 생각하자 부엉이 바위가 더 이상 무섭고 괴기롭지 않게 느껴지며 도리어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서울 깍쟁이로 소문난 나를 봉하마을로 이끈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분을 보내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장례절차라는 그 복잡하고 산만하고 생소한 과정을 거치다 보면 가신 분에 대한 집착과 미련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겠지요. 온갖 감정과 미련이 뒤섞인 봉하마을을 뒤로하고 버스는 다시 새벽을 달려 출근시간쯤 양재역에 도착했고 일행은 서둘러 각자 직장과 집으로 흩어졌습니다.
혹자는 그분의 '소지공양', '산화'로 인해 민주세력이 다시 모이고 '대한민국이 다시 깨어 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분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황당하고 기막힙니다. 그 누구의 희생이건 희생을 바탕으로 대한민국이 발전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대한민국은 개혁 진영이 원하는 속도를 내지 못해서 그렇지 이래도 저래도 계속 발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대로 천천히 발전하면서 가면 되는데 꼭 누구의 죽음을 바탕으로 발전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입니다. 불행한 죽음을 맞은 그 누구가 용산 참사 희생자여서도 안되고 등록금 1000만 원시대 학비에 쪼들린 대학생이어도 안되고 노 전 대통령이어도 안됩니다.
못났으면 못난대로 못난 사람들끼리 부대끼며 살다보면 한국 사회는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어떤 나라인데 지금 이 상태로 멈추겠습니까? 이명박 정부 5년 금방 갑니다. 벌써 1년 반이나 지났고 10년 가는 권력이 없다는데 무에 그리 급하게 생각하셨습니까? 오늘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지혜를 발휘하는 똑똑한 국민이 있는데 무에 그리 걱정이 많으셨습니까?
▲ "그분의 죽음이 헛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도 너무 황당하고 기막힙니다." ⓒ프레시안 |
솔직히 이번 사태를 겪으며 딱 한 가지 크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그 분의 한계가 바로 나의 한계라는 것, 그리고 현재 대한민국이 처한 시대의 한계라는 것' 입니다. 그런 사실을 조금 먼저 알았더라면 노 전 대통령을 탓하기 전에, 미숙하다며 참여정부를 탓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도 한 실력을 보태 좀더 유연하게 소통하고 협력하면서 공동선을 만들어 갔을 것을… 내가 하면 더 잘할 것처럼 너무 단순하게 행동하고 생각했습니다.
참여정부 교육 정책을 비판한 내 판단이 틀리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급한 마음에 무리수를 둔 것도 후회됩니다. 그래서 그분께 너무 죄송합니다. 이제서야 깨닫다니요. 지금도 그분 죽음에 대해 같은 단체 내에서도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많긴 합니다. 그러나 그분 혼자서 고초를 당할 때 소가 닭 보듯 무엇하나 노력해보지 못한 것도 개인적으로 깊은 후회로 남습니다.
일반 국민들은 시민단체 인사들은 대부분 참여정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민단체 사람들은 '참여정부가 좌측 깜빡이 켜고 우회전했다'며 참여정부와 많은 갈등을 겪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께서는 '대학도 산업'이라며 느닷없이 교육시민 단체속을 박박 긁어 놓았습니다. 또 고교평준화를 보완하다며 각 지역의 특목고를 허가해 주어 사교육비를 늘렸습니다.
임기말에 사교육비 원인을 특목고에 두고 이를 바로 잡으려했지만 역부족이었습니다. 그 분은 대학입시를 둘러싸고 서울대에 맞서 3불폐지 논란을 적극적으로 막아 정운찬총장과 갈등을 빚었지만 가르친 적 없는 논술형 본고사를 허용하여 논술 사교육을 키워갔습니다. 일부 대학들은 특목고 학생을 싹쓸이하겠다며 청와대를 흔들어댔고 전교조는 네이스 투쟁을 겪으며 점차 소통이 소원해졌으며 청와대와 교육시민단체의 틈은 점점 벌어져갔습니다. 교육개방에 참여정부는 어정쩡했고 한미 FTA로 사이가 더 벌어졌습니다. 결국 많은 이들이 그분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거두고 어쩔 수 없이 선을 그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내가 노무현 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0년대말 당시 노무현 의원이 소속해 있던 국회 교육상임위 복도였습니다. 아마 학교운영위원회에 학부모회를 법제화하는 현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교육운동단체들이 그분을 둘러싸고 그날 교육현안에 대한 입장을 묻자 그분은 대답했습니다. '나는 교육을 잘은 모르는데 이해찬씨를 도우려고 교육상임위에 들어왔다.' 모두들 당황했지만 그분의 솔직한 그 말은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여러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대통령에 당선되신 후 나는 외국기업에 근무하는 남편을 따라 베트남의 호치민에서 체류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해인가 노 대통령께서 호치민에 오신다며 대통령과의 대화겸 교민파티에 참석할 인사를 초청하는데 드라마 '내조의 여왕'에 나옴직한 상사주재원부인들이 모두들 대통령 만찬에 불참한다며 의시대듯 조롱을 섞어 말하더군요. 그 당시 나는 외국회사 직원의 가족이므로 초청대상에서 열외였지만 그분을 마지막 순간까지 괴롭히던 '조롱'과 기득권자 일부의 '천박한 민심'이라는 것도 실제 체감했습니다.
그리고 몇년이 지난후 나는 2007년 가을 그 당시 국가적 현안이었던 저출산 고령사회위원회위원으로 위촉되어 노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뵙고 임명장을 받았습니다. 그분은 '다른 위원회는 몰라도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는 새 정부가 꼭 유지시켜야 하는 국가현안이자 과제'라며 참모들은 '대통령 말씀 때문에 늘 예정 시간보다 길어진다'며 걱정했지만 전문적인 식견을 쉽게 풀어 적재적소에 맞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후 한 차례 더 뵌 적이 있습니다. 그때도 현안에 대한 깊이있는 발언과 조국의 민주화와 발전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관심, 소박함,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 시대정신을 담은 고민과 정책등을 진솔하고 적극적으로 밝히셨습니다. 인간적인 매력은 물론 상식적이고 합리적이라는 느낌도 강하게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밖에서 생각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습니다. 나무랄 데 없이 소박하고 매력적인 대통령이었습니다.
국민들이 덕수궁 조문현장으로, 봉하마을로 줄을 이어 갑니다. 대부분 국민들에게 노무현대통령은 사랑과 경애의 대상입니다. 언젠가 청와대에서 집으로 북에서 보낸 칠보산 송이를 보내 주셨을때 나의 부재로 대신 이를 맡아준 아파트 경비아저씨가 어쩌면 그렇게 공손하게 대통령을 대하듯 선물상자를 대하는지 놀랄 지경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잔디썰매를 타는 그 분 모습은 그 분이 어떤 분인지 단적으로 설명해줍니다. 늘 환하게 웃는 그 분 모습은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 마음에 살아있습니다. 어느 분이 말씀하신대로 이름없는 곳에서 그분 영정에 올린 향불이 바로 그분의 유지를 받드는 촛불이고, 향불이 바로 그분의 유지를 받드는 봉화불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이번을 계기로 한국 사회를 발전시키기 위한 한 발을 힘껏 내디딜 것입니다.
벌써부터 동네 미장원에서 아줌마들이 노 전 대통령 서거를 둘러싸고 정치논쟁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선거는 투표율도 올라갈 것 같습니다. '정치가 썩었다고 고개 돌려서 외면하지 마십시요'라는 그분 말씀이 이제야 실현되려나 봅니다. 국민은 이제야 비로서 존경할만한 대통령을 갖게 되었습니다.
조문에 참여한 100만 명의 국민들 마음에 노 대통령은 존경받는 대통령으로 남을 것입니다. 베트남 국민들이 '호아저씨' 호치민 주석을 존경하듯이 존경할 대통령이 있는 국민은 행복한 국민입니다. 때늦은 후회지만 나 역시 다시는 동지끼리 같은 점보다 사소한 다른 점을 이유로 선을 긋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탈 때마다 그 분을 기억할 것 입니다.
이제 부엉이바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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