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원칙주의와 교조주의
앞에서(제3부 제7장 제1절) 나는 간디의 원칙주의에 대한 타고르의 비판을 소개한 바 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는 "목숨을 걸고 약속을 지킨" 사례들을 대체로 미담 또는 영웅담으로 여기는 풍조가 있다. "충신불사이군, 열녀불사이부"라는 충렬(忠烈)의 이미지가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으로 한국인의 도덕관념을 지배할 때가 많은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의 침략 등, 이른바 국난의 역사가 빈번했던 탓이라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적어도 지금은 국난의 시기가 아닌 것 같다. 이명박 정권의 정책에 대해 나는 여러 가지 이유로 반대하는 점들이 찬성하는 점들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도 2009년의 대한민국을 국난이라고 본다면 국난 아닌 때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국난이 아닌 지금도 충렬에 대한 신경은 날카롭기가 그지없다.
한국인들이 특별히 충렬을 동경하는 까닭은 그만큼 신의를 저버리는 행태에 신물이 났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혼란을 숱하게 겪는 와중에 변절과 배신을 무상하게 겪다보니 그런 모든 오점이 없는 깨끗한 사람을 강하게 그리워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제는 거꾸로도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그림을 제멋대로 그려놓고서, 거기에 어긋나는 행태들을 변절이라는 오명을 씌워 매도하는 것이 문제의 원인은 아닐까? 여기에는 일제의 경험에서 비롯된 민족주의적 단순비유들이 상투어로 현대 한국어에서 자주 사용된 탓이 크다고 생각한다. 민족주의에 관해서는 다음 제5부에서 논의할 테니까 잠시 접어두더라도, 우리 사회의 의식구조에는 원칙을 위해 목숨을 바치면 곧 숭고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짙게 깔려있다. 그 원칙이라는 것이 뭔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어느 정도의 유연성이 허용될 수 있는지, 기타 등등, 한 사람의 인생이 가치를 가지기 위해 고려되어야 할 수많은 실존적인 질문들을 모조리 무시해버리고, 막무가내로 한 가지 목표만을 향해 돌진하는 결사대가 아니면 모두 더러운 것으로 침을 뱉는 야만이 횡행하는 것이다.
▲ ⓒ연합뉴스 |
황석영이 이명박과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쏟아진 비난이 아주 좋은 사례이기 때문에. 앞에서 이미 간략하게 언급했지만 여기서 좀더 파고들어보자. 이 사례는 모든 종류의 무분별이 총체적으로 자행된 실례로서, 대중이 우중으로 바뀔 때 어떤 짓을 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경우다. 이런 경우 지식인을 자처하는 자들까지도 아주 쉽게 무분별의 파도에 휩쓸릴 뿐만 아니라, 대개는 "원칙"이라는 이름을 걸고 무분별에 앞장을 서게 된다. 무분별이란 본질적으로 형체를 갖추지 못한 카오스에 속하기 때문에, 원래 분류가 불가능하므로 목록으로 정리할 수도 없다. 따라서 내 감각에 뚜렷한 인상을 남긴 순서로 몇 가지 양상만을 열거해본다.
첫째, 황석영이 뭘 잘못했다는 것인지 비난의 과녁이 도무지 무분별하다. 이명박을 "중도실용"으로 부르고, 중앙아시아 순방길에 동행하고, "알타이 연합론"인지 무슨 구상을 가지고, "유라시아 문화특임대사"를 맡을 것 같다는 것인데, 이 중 어떤 요소가 "전두환의 품속에 안겼다"는 둥, "노벨상 받을 욕심에 맛이 갔다"는 등의 비난을 자체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어떤 정치학자가 이명박을 "중도"라거나 "실용"으로 보면서 어떤 엉뚱한 결론을 이끌어낸다면 나는 비판도 하고 조롱도 할 것이다. 그러나 황석영은 분석적 정확성과는 거리가 먼 허구를 전공하는 소설가이자, 일각에서 "한국 최고의 구라" (지나가는 김에 한 마디 끼워넣자면, 이에 대해서는 왜 일본말 찌꺼기라고 개탄하는 설교자들이 안 나타나는지 꽤 궁금하다)로 평가를 받던 인물이 아닌가? 더구나 이명박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었고, 무슨 이유에서든 새삼 가까워지려는 판이라면 그 정도 사교용 덕담은 상식의 범위 안에 속하지 않을까? 황석영이 이명박을 "중도 실용"으로 불러주면 사람들이 우르르 그를 "중도 실용"이라고 여길까봐 겁이 나는 것인가?
앞 제3장 말미에서 언급했듯이, 황석영이 유라시아 문화특임대사로 기용되어 무슨 성과를 거둘지 아니면 막말로 "기생질"에 그칠지는 결과를 두고 본 다음에 욕을 해도 절대 늦지 않다. 아직 기용되기도 전에 누가 더 심하게 욕할 줄 아는지를 서로 경쟁하듯 비난한다는 것은,단지 발걸음을 하나 뗐을 뿐인데 상황전개의 오묘한 조화(造化)에 치여 만만해 보이는 처지로 몰리게 된 친구에게 우르르 몰려가 욕하고 따돌리는 미개한 아동들의 사악한 취미에 지나지 않는다. 어떻게 "광주민주화운동"을 "광주사태"라고 폄하해 불렀다는 이유만으로 "전두환 품에 들었다"는 비난이 가능한가?
둘째, 황석영에게 뭘 기대하는지, 나아가 일반적으로 이웃과 동료에게 기대하고 요구할 수 있는 한계에 대한 분별이 전혀 없다. 작가가 권력 또는 "노벨상"을 탐했다고 실망하는 모양인데, 작가란 내가 아는 한 거의 모두 내면의 충일보다는 사회적 인정을 더 바라는 사람이다.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이 자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애당초 글을 써서 남에게 보여줄 필요도 없고, 말을 할 필요도 없이 면벽참선을 하든지, 동네 모든 집의 앞마당을 항상 웃으면서 쓸든지, 자기 살을 도려내 굶주린 승냥이에게 보시하면 된다. 아니면 미하엘 엔데의 『모모』처럼 자기는 입을 다물고 그냥 남들의 말을 듣기만 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명성과 영예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문필이라는 활동은 명성과 영예를 향한 욕구와 논리적으로 연관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문인이 오로지 명성과 영예만을 추구한다는 뜻이 아니고, 어느 정도씩은 누구나 추구한다는 뜻이니 오해말기 바란다. 그러므로 황석영이 노벨상 받을 욕심에 이명박에게 접근했다는 해석 따위는, 아무리 잘 봐줘도 약간 섞여있을 수 있는 의미를 부풀린 고의적인 과장이고 질투의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김대중이 노벨상 받을 욕심에 남북정상회담을 했다는 해석보다 질투와 과장의 정도가 더 저질이다. 예컨대 내가 지금 이 글을 노벨상 받을 욕심으로 쓰고 있다고 하면 저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십중팔구 나더러 "언감생심 주제를 모른다"고 조롱할 것이다. 내가 지금 순전히 논의를 위해서 이런 가상을 해보는 것만으로도 나를 "과대망상증 환자"로 몰아붙이며 물어뜯고 싶어질 것이다. 그런데 황석영에 대해서 "언감생심"을 말하려면 왠지 켕긴다. 황석영의 이름이 노벨상 주위에서 희끗희끗 떠오른다는 사실 때문에, 혹시 자기가 그를 질투하는 것이 아닌지 약간 불투명한 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찌 감히 노벨상을 바라느냐"는 비난은 배경으로 돌리고, 대신 그의 "이익 계산"만을 전면에 부각하면, 자기 맘속의 질투 때문이 아니라 황석영의 이기심이 모든 문제의 근원이라는 듯 수사적 효과를 짜낼 수 있다. 그 틈에 물론 "네까짓 게 감히"라는 질투심 역시 발설만 안 했을 뿐 슬그머니 뚱겨서 분위기를 자아낼 수가 있는 것이다.
셋째, 현 단계에서 황석영의 처신에 대한 논평은 어떻게 보더라도 가벼운 비아냥 정도로 넘어갈 일이지 진지한 비판적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없다. 애당초 어떤 한 사람이 "진보작가"를 대표한다는 자리매김 자체가 선험주의적 어리석음의 반영으로서, 나머지 모든 "진보작가"들에 대한 모욕이다. 나아가 설사 그가 "진보작가"를 대표한다고 치더라도, 그의 행보에 관한 진지한 논의와 비판은 그가 이명박에게 얼마나 가까이 가서 어떤 결과가 빚어지는지를 살펴보면서 그때그때 구체적인 근거를 가지고 따진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말초적 감정의 노예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 한 유명작가가 대통령에게 덕담을 건네고 문화특임대사 자리를 맡는 것만으로 "작가 정체성"과 "역사의식"을 다 버렸다고 매도한다는 것은, 단지 "놀랍다"는 느낌을 아무 여과 없이 바로 "괘씸하다"로 제멋대로 연결한 미성숙의 징표로 보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투신 때문에 황석영 이야기가 쑥 들어가 버렸다는 사실만 봐도 그에 대해서 쏟아졌던 온갖 매도가 얼마나 말초적인 변덕의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쏟아졌던 무절제한 비판과 매도의 습성이 황석영에 대해서도 재현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애도 분위기에 편승해서 내 이야기를 끼워넣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러므로 다시 황석영 논란에만 집중하기로 한다.
황석영 씨와 같은 처신을 비난할 때 상투적으로 쓰이는 단어가 "변절" 또는 "훼절"이라는 것인데, 애당초 그 놈의 절개가 도대체 뭘까? 우선 나는 과부가 절개를 지켜야 한다고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그럴 필요가 없다는 정도가 아니고, 지금이나 과거에나 절개 따위는 내팽개치고 자기가 원하는 대로 행동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사랑하는 남편이나 아내나 애인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폄하할 생각은 전혀 없다. 그것이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면, 다시 말해 행위자의 자아가 개입된 실존적 선택으로서 행해진 헌신이나 희생이라면 인간적으로 가능한 모든 경의를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런 사랑을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까지도 그런 행태가 강요되어야 하는가? 그렇게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다.
절개라는 것이 당사자의 자발성과 상관없이 외부적으로 강요된다면 어떤가? 물론 자발성과 강요 사이에는 엄청나게 까다로운 경계의 문제가 있다. 그렇지만 경계의 문제란 어떤 보편적 규범을 짤막한 문장으로 형상화할 수 없다는 의미, 다시 말해 "자발적인 절개"의 집합과 "외부적으로 강요된 절개"의 집합 사이에 서로 겹치는 대목이 있다는 의미일 뿐이지, 두 집합의 원소 중에 겹치지 않는 부분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외부적으로 강요된 절개" 중에서 "자발적인 절개"의 집합과 겹치지 않는 부분은 미덕이 아니라 지독한 종류의 사악이라고 나는 본다.
왜냐하면, 백보를 양보해서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다"는 일이 자체로 가치가 있다고 치고 생각해보더라도,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두 지아비를 섬기지 않는 일"에 해당하는지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과부에게 열녀의 기준을 강요하는 사회에서는, 정분이 아니라 단순히 강간당한 사실만으로 과부가 할 수 없이 강간범을 지아비로 섬겨야 하는 처지로 몰리기가 쉽다. 열녀의 정체성이 외부적으로 강요되는 곳에서는, 외간 남자와 말만 한번 주고받아도 옷깃만 한번 스쳐도 "훼절"의 멍에를 씌우기가 여반장이다. 다시 말해, 절개라는 것이 설사 자체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쳐도, 그것이 강요될 수 있게 되는 순간 절개에 관한 모든 담론은 가치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구에게 멍에를 씌울 수 있는지를 둘러싼 권력의 담론으로 타락하게 된다.
황석영 씨와 이명박 대통령이 나름대로 서로의 이용가치를 착취한다고 할 때, 작가가 대통령을 착취할 가능성보다는 대통령이 작가를 착취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러나 공통이익도 뭔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있기는 할 것이고, 어쨌든 황석영이 인력 풀에 들어가는 것은 가령 이문열이 들어가는 것보다는 한 눈금이라도 오른쪽으로 덜 가는 것이 틀림없다. 이문열은 십중팔구 주위 사람들이 듣기 좋아할 말을 하는 데 그치겠지만, 황석영은 때때로 주변사람들에게 거북한 자기 목소리를 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지금 그가 시류를 거슬러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는 데서도 확인된다. 더구나 불사이군이란 애당초 없다. 충성의 화신으로 기려지는 관우도 조조의 신세를 갚느라 안량과 문추를 벴고, 게다가 화용도에서는 조조의 목숨을 살려준다. 처칠이나 손학규가 당을 바꿨다고 "철새"라 비아냥거리는 소리는 경박한 사람들의 입방정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하물며 후한 시대도 아닌 21세기에 누구에게 불사이군의 논리를 강요한다는 것은 시대적으로 어불성설이고 도덕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앞 장에서 상세하게 논의했듯이, 도덕에는 선악의 구분이라는 평면적인 지평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인지 악인지가 분명하게 판명되지 않을 때, 또는 그동안 받아온 교육에 따르면 명백히 순결의 의무에 위배되는 일이지만 다른 의무들 때문에 선뜻 결정하기가 어려울 때, 실존적으로 겪어야 하는 고뇌의 분량, 또는 일단 선택을 내린 다음에 초심을 유지하기 위해 투여하는 각고의 정도 역시 도덕과 핵심적으로 연관되는 것이 분명하다. 반면에 원칙주의라는 이름 아래, 공허하기 때문에 자의적인 해석이 무제한으로 허용되는 구호를 가지고 누구 한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적용해서 괴롭히는 수준의 교조주의는 도덕의 지평을 철저하게 평면적인 상태로만 고수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언어의 내용에는 개의치 않고, 언쟁의 기세만 일단 한번 탔다 싶으면 끌어들일 수 있는 모든 도덕용어를 총동원해서 무분별한 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도덕의 문제를 선험적인 정답을 찾는 문제로 파악하면 자기 생각에 선험적이라고 여겨지는 선택이 곧 정답이라고 우기는 성향을 조장할 위험이 크다. 이는 곧 평면적인 흑백논리와 편 가르기를 도덕의 전부라고 착각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단견으로 끌고 간다. 그리하여 원칙은 모든 맥락을 막론하고 고수해야 할 교조로 경화되고, 경화된 교조는 이내 우상으로 바뀌어 신당(神堂)에 모셔진다. 그리고는 힘의 우열에 따라서 기세를 잡은 쪽은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만날 때마다 무분별한 공격의 빌미를 무한정 신당에서 꺼내다가 기분 내키는 대로 휘두르게 된다.
황석영이 "광주사태"라고 불렀다고 흥분하는 행태와 "인민"이나 "동무"를 입에 올렸다고 빨갱이로 몰아붙이는 행태가 일란성 쌍둥이로만 내게는 비친다. 교조주의란 대개 이처럼 상대의 말을 꼬투리 잡아 끝없이 잡아 늘여서 괴롭히는 경향을 띤다. 이런 심보에 고삐가 풀려버리면, 무엇을 위한 원칙인지는 철저하게 무시되고, "원칙"이라는 단어는 형해만이 남아 오로지 과녁으로 지목된 사람을 공격하는 명목으로만 악용된다.
이런 폐단은 목전의 사안을 그 자체로 분리해서 바라보지 못하고, 한 사안의 파장을 지나치게 멀리까지 연장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이 내 진단이다. 그런 것을 선견지명인 줄 착각하는 허영심이 작용한 결과라는 말이다. 황석영이라는 진보쪽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작가가 이명박이라는 보수정권에 협력하게 된다면 물론 적지 않은 파장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문에 역사진행의 큰 줄기가 바뀐다든지, 인민 다수가 상심해서 절망에 빠질 리는 전혀 없다고 장담해도 괜찮다. 가령 문화관광부장관을 유인촌에서 황석영으로 바꾼다면 나는 이명박 대통령의 "혜안"을 기꺼이 환영할 것 같다. 가령 통일부장관을 현인택에서 황석영으로 바꾼다면 나는 황석영이 사고나 치지 않을지 걱정하겠지만, 그래도 이명박 대통령의 "파격인사"는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특임대사라는 자리를 황석영이 무슨 의도를 가지고 수락하게 되든지, 진보진영이 무슨 엄청난 타격을 받을 일은 사실 전혀 없다. 그가 그 자리에 앉아서 하는 일이 정권의 나팔수 역에 그친다면 본인의 품격을 스스로 깎아먹는 짓이다. 만약 나름대로 의의 있는 일을 수행한다면, 이명박의 초빙을 받았다는 이유로 그 의의가 줄어들지는 않는다.
사회적으로 중요한 어떤 선택의 기로에서 결정이 필요할 때에는 일반적으로 장기적인 여파보다는 목전의 사안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불필요한 기우와 공포를 불식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나는 믿는다. 물론 히틀러의 집권처럼 하나의 단추를 잘못 끼운 결과 후일 엄청난 재앙을 낳을 위험은 항상 있다. 하지만 1933년에 독일 사람들이 히틀러를 수상으로 올려준 이유는 히틀러를 몰랐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자기들 맘속에 도사리고 있던 증오와 열등감과 불신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기적인 여파라고 할지라도 구체적인 모습으로 사회구성원 다수가 뚜렷이 인지하는 것이라면 내가 위에 언급한 "목전의 사안"에 포함된다. 반면에 불과 한 달이나 일주일 후의 결과에 관한 예상일지라도 명확한 모습으로 떠오르질 못하고 예상치에 관해 사회적인 설왕설래가 끊이지 않는다면, 그런 사항들은 "목전의 사안"에 포함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지금 원칙보다 시의를 강조함으로써 내가 시의(時宜)에 해당한다고 보는 항목은 시간의 길이보다는 얼마나 구체적인 예상이 가능하며 그 예상에 대해 사회적으로 얼마나 합의가 이루어지느냐는 차원이다.
우리 사회에서 원칙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까마득한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봐 미리 못 박아 방비를 해둬야 한다는 취지일 때가 대단히 많다. 그러나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불투명하다면, 바로 그 때문에 지금 무슨 방비를 해봤자 별로 방비가 되지 못한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불안이란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날까봐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확실한 미래란 다름 아닌 바로 그 불확실성 때문에 지금 아무리 안달을 해도 소용이 없게 된다. 미래에 대해서 지금 해둘 수 있는 방비는 미래에 관해 예측할 수 있는 확실성에 정확히 비례한다. 따라서 확실한 예측이 가능한 만큼만 방비하고, 확실하지 못한 부분은 확실해질 때까지 두고 보는 길 말고는 아예 다른 어떤 길도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생각하기에 따라 달라지는 일이 아니고 인간의 조건일 뿐이다.
원칙에 대한 과도한 집착, 그리고 원칙을 교조로 삼아 숭배하며 붙들어야 하는 의존성은 불확실성을 감내하지 못하는 불안감 때문이다. 그리고 불확실한 것을 마치 어떤 신비한 예지력으로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는 듯이 미혹하는 선험주의는 저런 불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불확실성을 극복할 길이 있다는 듯이 선전하는 마취제일 뿐이다. 이렇게 마취를 통해 사람들의 무의식 밑으로 쑤셔져 들어간 불안은 만만한 상대를 찾을 때마다 무분별하고 무자비한 공격성으로 삐져나오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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