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김기협 씨는 그것을 자기 희생이라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그러면 노무현 대통령은 우리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것은 어떤 뜻을 가진 희생일까? 그의 짧은 유서 속에서 그것을 짚어보기는 어렵다. (☞관련 기사 : "노무현은 '자살'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겠지만 우회적으로 질문을 풀어가 보자. 그는 특히 조·중·동과 검찰, 그리고 이명박 정부로 대변되는-사실상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극우집단의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었다. 왜 이들은 그토록 노무현 대통령, 그리고 노무현으로 대변되는-실제와 부합하는가와 관계없이-이들의 표현에 따르면 '좌파 빨갱이'들을 증오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에서 그의 통절한 죽음이 가진 의미를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를 향한 증오와 적개심
김갑수 씨가 <오마이뉴스>에 쓴 기사를 잠시 인용해보자. '이명박' 대통령은 말로는 전직 대통령을 예우하겠다고 해 놓고 국가기록물 건으로 그를 고발했다. '홍준표' 전 한나라당 원내대표는 "노무현은 전두환보다 더 나쁘다"고 말했다. <중앙일보>의 한 칼럼니스트는 "박연차의 돈은 똥인데, 똥을 먹은 노무현"이라는 제하의 글을 쓰기도 했다. <조선일보>의 논설고문은 "노씨, 까불다가 당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소환 직후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더 이상 없다"고 했던 '검찰'은 다시 권양숙 여사와 딸 정연 씨 등을 부르며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검찰은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회장에게 선물로 받은 명품시계를 논두렁에 버렸다는 이야기를 언론에 흘렸다. <조선일보>는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 씨의 미국 주택을 호화주택이라고 단정하면서 다시 노무현 공격을 시도했다. <연합뉴스>는 노 전 대통령이 대형 비리가 드러날 것 같으니까 죽음을 택했을 수도 있다는 식의 기사를 내놓고 있다. 한편 연세대학교의 교수를 지냈다는 김동길 씨는 그에게 뇌물을 먹었으니 자살하라고 이야기했다한다.
권력에 대한 욕망
이들이 가진 이 도저한 증오와 적개심의 원천은 무엇일까? 가장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기득권 세력들의 열패감과 분노이다. 지역적 기반도 없는 고졸짜리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에 대한 정치 기득권 세력, 'SKY 대학'으로 상징되는 학벌 기득권 세력,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언론 기득권 세력의 열패감과 분노. 기득권을 가지지 못한 노무현 대통령은 이들에게 참으로 쉬운 노리갯감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그에 대해 더욱 쉽게 증오와 적개심을 표시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이 특히 표독스럽고 잔인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두 번째는 이들이 가진 권력에의 욕망이다.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표현이 상징하는 것은 보수 세력이 가지고 있는 권력에의 광적인 욕망 그것 이하도 이상도 아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앗겼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가 김대중 대통령까지 포함하여 노무현 대통령으로 상징되는 비주류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으로 나타난다. 이들은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상대방을 불온한 존재, 위험한 존재, 혐오스러운 존재-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좌파 빨갱이들-등으로 선전한다. 폭력적 배제의 정치를 구축하는 것이다. 폭력적 배제의 정치를 낳는 권력에의 욕망-이것이 이들이 가진 증오와 적개심의 원천이다.
세 번째는 인간에 대한 예절을 모르기 때문이다. 품격을 갖추지 못한 비판은 독설로 이어지면서 아주 쉽게 증오와 적개심을 드러내게 된다. 인간적 품위를 제대로 갖추지 못했다는 것 뿐 아니라 대한민국 보수집단이 가진 특징 중 하나는 이성적 사고의 능력이 매우 취약하다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들에게는 관용과 절제와 같은 덕목도 부족하기 짝이 없다. 이 때문에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라고 이들이 내세우는 것들이 실상은 매우 저급한 수준의 불평 아니면 독기 어린 증오와 적개심이었던 것이다.
불안과 초조
말할 나위 없이 이들이 가진 증오와 적개심은 노무현 대통령 개인에 대한 것만은 아니다. 사실여부와 관계없이, 때로는 아니라고 하는데도, 이들에게 노무현은 보수 세력과 이명박 정부를 반대/비판하는 단체와 개인을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증오와 적개심은 보수 세력을 반대/비판하는 단체와 개인 모두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왜 그럴까? 짐작해 볼 수 있는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목표, 즉 약탈국가의 과제를 달성해야 한다는 초조감, 또 제대로 달성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자신들의 길을 막는/또는 막는 것으로 보이는 단체와 개인은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 된다.
약탈국가란 무엇인가? 사적 이익을 위해 공적 기구를 조직적으로 오·남용하는 행위, 다른 말로 하면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공공적 보호/규제 장치를 훼손시키는 행위를 일삼는 정부를 지칭한다. 약탈국가는 겉으로는 시장의 자유를 위해 규제를 철폐/최소화해야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해체된 규제, 약화된 규제의 틈새를 이용해 특정집단에 특혜를 부여하는, 즉 공공의 영역과 시장을 동시에 약탈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 결과는 이렇게 드러난다. '경기 침체의 영향으로 빈부격차가 사상 최대로 벌어졌다. 서민들은 실업, 파산 등으로 소득이 갈수록 줄고 있지만 고소득층은 주식이나 부동산 등의 가격이 오르며 자산이 늘었기 때문이다. 21일 기획재정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도시가구(1인 및 농가 제외)의 지니계수는 0.325로 지난 2007년(0.324)보다 0.001포인트 상승했다. 이는 통계청이 관련 집계를 시작한 1990년 이후 최고치다. 국제 교류가 늘어날수록 지니계수가 오르는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 최고치인 셈이다.' (<파이낸셜타임스>, 2009년 5월 21일)
일부 부유층과 (대)기업 도우미 정부로서 이명박 정부의 목표수행 시간은 5년이다. 주어진 5년 시간 내에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자신들의 정치적 몫도 물론 포함하여-최대한 주려면 장애물이 없어야 한다. 그래서 정치가 실종된다. 그들이 정치를 혐오하는 이유는 정치가 조성해내는 균열과 그로 인한 목표 실천의 지체와 장애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이들은 비판집단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빚어지는 온갖 모순과 문제와 갈등에 대해서는 관료기구와 사법기구를 동원, 최대한 억압한다.
지금 대한민국의 경찰, 검찰, 법원 등은 이명박 정부가 이런 약탈국가적 역할을 수행하는데 지장이 없도록 법과 무력을 동원하는 용역 구사대 수준의 기관이다. 조·중·동 같은 신문은 이명박 정부의 홍보실 정도의 역할을 수행한다. 사실 이명박 정부를 정부라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대통령이 기업의 사장 수준으로 생각하고 그런 방식으로 이끌어 가면서 청와대는 기획조정실, 정부각 부처는 기업 영업부 내지 현장 사무소 정도로 보인다. 국회는 이 기업의 이사회쯤 된다. 대한민국의 다른 기업들은 이 대기업의 하청업체라고 할 수 있다. 국민들은 대체로 이 기업의 말단 직원정도로 간주된다. 감히 반발하는 말단에 경영진이 분노하는 것이다.
공포심
보수 세력이 품고 있는 증오와 적개심의 대상이 노무현을 넘어 그들을 반대/비판하는 집단과 개인 일반을 향한 것이라면 이것은 또 좀 더 깊은 역사적 맥락에서도 짚어보아야 한다.
20세기 이후 지금까지 100여 년이 넘도록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보수 기득권 세력은 대체로 처벌되지 않은 역사의 범죄자들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해 깊은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이 때문에 교과서를 바꾸고 친일과 독재와 부패의 역사를 고쳐 쓰고자 한다. 당연히 자신들과 다른 역사를 기록하려는 노력에 대해 알레르기적인 증오와 적개심을 내보이게 된다. 공포심의 다른 얼굴인 것이다.
시계를 돌려보자. 20세기 전반기 한국의 역사는 일본의 식민지 경험과 해방, 그리고 전쟁으로 구성된다. 식민지 경험의 요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극심한 수탈과 억압의 고통, 그리고 해방에의 희망과 염원이다. 그런데 정작 해방은 되었으나 친일분자들이 지배 세력으로 다시 등장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수탈과 억압은 끊어지지 않았고 희망은 곧 절망과 분노로 이어졌다. 곧바로 전쟁이 터졌다. 3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죽어나가는 끔찍한 전쟁의 참화를 겪었다. 슬픔과 원한이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얽매온 수탈과 억압, 분노와 좌절, 슬픔과 원한을 대한민국의 지배계급은 거의 풀려고 하지 않았다. 그 사이 약탈의 역사는 바로 가까이에서 지금도 진행되고 있고 약탈 뿐 아니라 죽음도 끊이지 않는다. 불과 30여 년 전에 광주에서 숱한 사람들이 죽어나갔고 바로 얼마 전에는 용산에서도 사람이 죽었다. 노동자들의 죽음은 그저 흔한 일이 되고 말았다. 지배 세력은 반공법이니 국가보안법이니 간첩이니 혁명 세력이니 외부불순분자니 하는 굴레들을 만들어내면서 신원은 막고 슬픔과 원한을 더욱 키워나갔다. 죽음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신원되어야 하지만 저승으로 가지 못한 망자들은 중음신이 되어 구천을 떠돌고 있었고, 산 자들은 맺힌 원한으로 깊고 깊은 속앓이를 할 뿐이었다.
지배계급은 이런 아픔을 풀려고 하는 사람들을 오히려 감옥으로 보냈으며 지금도 이는 그대로 이어진다. '정부는 20일 세종로청사에서 국무총리 주재로 관계 장관회의를 열고, 불법 폭력 시위에 대한 엄정 대처방침과 함께 대응책을 논의했다. 한승수 총리 주재로 열린 이날 회의에는 교육과학기술부, 법무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노동부, 국토해양부 장관과 경찰청장, 청와대 치안비서관 등이 참석했다. 이번 회의는 이명박 대통령이 지난 19일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죽창 시위가 해외에 보도되면서 우리나라의 국가 브랜드가 크게 훼손됐다. 여전히 과격 폭력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며 처벌을 지시한데 따른 것이다.' (<헤럴드경제>, 2009년 5월 20일)
역사의 범죄자가 가지는 공포심 속에서 이들의 증오와 적개심은 더욱 단단하게 굳어진다.
야만의 사회와 역사
권력에 대한 저급한 욕구, 약탈의 목표달성에 대한 불안감과 초조함, 역사에 대한 공포심. 노무현 대통령과 노무현으로 상징되는 집단에 대해 대한민국의 보수 세력이 품고 있는 증오와 적개심의 실체가 이렇다면 그것은 무슨 뜻일까?
첫째는 대한민국 사회와 역사의 강요된 천박성이다. 역사는 그것이 어떤 것이든 천박하지 않다. 그렇게 만드는 집단이 있을 뿐이다. 아닌 게 아니라 100여 년이 넘는 긴 근대사의 공간과 시간 속에서 대한민국의 구성원들은 인간적 품위에 대해 거의 학습 받지 못했고 또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했다. 해방이 되고 소위 민주공화국이 수립되었지만 민주주의와 시민적 덕목에 대해 그 누구도 제대로 가르쳐주지 않았고 그 누구도 그것을 제대로 익히려 하지 않았다. 역사를 학습해야 하는 이유도, 경제정의가 민주주의의 근본이라는 것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기득권자들이 가진 권력에 대한 저급한 욕구와 그것을 끝끝내 유지하려는 야만성이 한국의 정치와 사회를 좌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둘째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밀고 나아가는 근본 동력이 무엇인가를 다시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유, 민주, 평화, 통일, 정의, 평등, 진리, 박애, 공화국과 같은 덕목은 한국에서 대체로 허상이다. 한국의 원동력은 '잘 살아보세'이다. 돈만 벌면 다른 문제는 다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씨를 믿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이유이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을 뽑은 이유이다. 잘 되지도 않지만 어쨌든 큰 돈, 작은 돈 벌어가면서 악착같이 사는 사이, 우리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잘 사는 것이 어떻게 사는 것인지에 대해 정확하게 가르쳐주는 사람도 별반 없다. 그것이 무슨 뜻인지 꼼꼼하게 따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지 않다. 그 결과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고 있는 것은 피폐하고 살벌한 사회이다.
셋째는 아직도 대한민국은 수탈과 억압, 분노와 좌절, 슬픔과 원한의 역사를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강하게 지속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 때문에 한국사회는 공통의 신념과 목표를 갖추기가 극히 어렵고 그 때문에 나라의 미래를 펼쳐가고자 하는 노력을 제대로 결집하기도 어렵다. 일제 식민지 시대를 칭송하는 노래가 더 크게 울린다. '잘 살아보세'를 믿고 실로 눈물겹게 노력했으나 적절한 대접도 받지 못한 채 대한민국의 많은 사람들은 또 다시 약탈과 배신과 죽음에 시달리고 있다. 한편 기업 대한민국의 경영진과 간부들은 일부 부유층과 (대)기업을 위한 약탈과 억압에 매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지배계급의 마름이 되어 국가와 사회의 도덕과 정신을 타락시키는 극우꼴통들이 활개치고 있다.
▲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할 뜻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 즉 인격적 완성체를 지향하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영웅적 가능성을 향한 걸음걸음을 의미한다." ⓒ프레시안 |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은 이처럼 야만의 지배체제에서 아직 고통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사회와 역사가 만들어낸 커다란 비극이다. 그 비극에서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것은 바로 그 사회와 역사이다. 생각건대 한국 사회에 지금까지도 관철되고 있는 수탈과 억압, 분노와 좌절, 슬픔과 원한의 역사는 뒤집어 말하면 영광스러운 구원의 기록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록은 지배계급의 억압으로 인해 아직도 가능성으로만 남아있을 뿐이다.
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노무현 대통령의 투신에서 우리가 발견해야할 뜻일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가? 가장 깊은 의미에서 그것은 인간의 인간다움, 즉 인격적 완성체를 지향하는, 불가능하지만 그러나 버릴 수 없는 인간의 영웅적 가능성을 향한 걸음걸음을 의미한다. 그것이 새로운 역사와 사회의 가능성을 세상 속에서 실천하고자 하는 시민의 덕목이다. 그러면 우리는 그러한 뜻을 공유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양 무릎과 팔꿈치, 이마 등 신체의 다섯 부위를 땅에 대고 절하는 오체투지가 생각보다 너무 힘들었고, 몸도 아팠지만, 아스팔트에서 나는 냄새를 참기도 쉽지 않았다고 하셨다. 그런데 가장 힘들었던 것은 사람들의 말이었다고 했다. 도로 복잡하게 한다면서 욕을 해대는 사람도 있고, 저렇게 쓸데없는 것은 왜 하냐면서 비아냥거리는 사람, 이러한 말을 들으면서 슬프셨고, 얼굴에 핏대를 올리면서 비판하는 모습이 추해보였다고 하셨다." (<오마이뉴스>, 2009년 5월 21일)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독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투신자살에 의한 돌연한 죽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고 민주주의와 진보와 정의를 추구하며 생전에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가 자신을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계승해야 할 그의 자산은 무엇이었으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그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기고를 다음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보내주신 글은 편집 과정을 거쳐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tyio@pressian.com / onscar@pressia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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