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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멸시, 애도와 기억 사이에 끼인 삶과 죽음의 도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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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롱과 멸시, 애도와 기억 사이에 끼인 삶과 죽음의 도착

[노무현을 기억하며] 죽은 권력을 희롱한 비겁한 산 권력들

한 편에서는 자연스럽게 죽어갈 목숨도 억지로 살릴 정도로 생물학적인 생명에는 목숨을 걸고 다른 한 편에서는 멀쩡하게 살아 있는 생명도 조롱과 멸시의 대상으로 삼아 죽은 목숨을 만들어 버리는 것이 삶과 죽음이 도착된 우리 사회이다.

선이 도착이 되면 악이 되고 악이 도착이 되면 선이 된다. 사랑이 도착이 되면 지배가 되고, 지배가 도착이 되면 사랑이 된다. 삶이 도착되어 죽음이 되고 죽음이 도착되어 삶이 된다. 노무현 전 태통령의 죽음은 우리 사회가 삶과 죽음에서 얼마나 도착되었는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그는 물러난 대통령이었다. 그런데 그는 살아있는 권력에 의해서 끊임없이 조롱과 멸시, 모멸의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그의 '죄'와 그 '경중'에 상관없이 그는 날마다 조중동을 필두로 한 보수언론에 온 가족과 함께 발가벗겨졌다. 조선일보의 가장 경망스러운 만평조차도 검찰이 범죄를 입증하는 것이 아니라 동네방네 약장수처럼 떠들고 다닌다고 타박할 정도였다.

그가 계속 살아있었다면 그는 아마 감방에 갔을 것이고 그는 더 이상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범죄자로서도 그는 '전직' 대통령이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조중동은 그를 큰 범죄인으로도 만들고 싶어하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그에 대한 가장 큰 조롱이 아니었을까? 너는 대통령일 때도 '개구리'에 지나지 않았고, 범죄자일 때도 '쫀쫀한 소매치기'에 지나지 않는다고 멸시하는. 전두환과 노태우는 범죄자이지만 '국가 변란'과 같은 대통령'급'이나 꾸는 무시무시한 범죄자이기에 여전히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것에 반해서 말이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우습게도, 역설적이게도, 도착적이게도 그것이 유일하게 그가 대통령으로 남을 수 있는 길이었다. 검찰은 그에 대한 조사의 종결을 선언하였으며, 그를 꼬챙이에 꽂힌 개구리처럼 취급하던 조중동을 필두로 한 모든 언론들이 '서거'라는 단어를 쓰며 애도의 사설을 쓰고 있다. 말할 가치도 없는 한나라당은 빼더라도, 어떻게 하면 자신들이 과거에 가지고 있던 노무현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그 거리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려고 하던 민주당은 스스로가 '상주'라고 표현하였다. 살아있을 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관계없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애를 쓰던 사람들이 갑자기 '상주'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가장 윤리적인 척하는 이 작태들이야말로 삶과 죽음을 전도시키는 가장 도착적인 행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박연차 사건과 관련해 검찰과 손발을 맞춰 공공연히 노 전 대통령을 폄훼하던 조중동을 필두로한 언론들이 일제히 '애도'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사진은 '조선닷컴' 홈페이지. ⓒ프레시안

물론 이중에서 가장 '도착적'인 인간은 역시 이명박이다. 겉으로는 애도를 한다고 하고 국가원수로서의 예우를 다하라고 하였지만 일반시민들이 서울시내에서 추모행사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종로, 시청, 광화문, 대학로 일대를 경찰차로 완전 봉쇄하였으니 말이다. 서울도심집회 금지니 뭐니 하며 온갖 조치를 다 취해놨는데 그게 무너지고 다시 촛불이 타오를까봐 사람의 추모조차 금지시키고 있다. 사람이 도착되면 짐승이 된다는 것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이 와중에 가장 '윤리적'인 사람은 오히려 조갑제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끝까지 '서거'가 아닌 '자살'을 써야한다며 노무현의 죽음으로 남상국 사장의 자살도 종결될 수 있다고 썼다. 그가 유일하게 도착에 빠지지 않고 자기 윤리를 고수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린 이렇게 삶과 죽음이 도착된 시대를 살고 있다. 살아있는 것들은 언제 나락으로 떨어져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될지 몰라 공포에 벌벌 떨어야하고 죽어서야 겨우 예우를 받을 수 있는 세상 말이다. 물론 죽어서도 예우의 '예'자도 못받는 사람들도 있다. 잘나가는 특목고에서 매번 1등을 하다 5등을 한 다음에 부모로부터 야단맞는 것이 두렵고 스스로에 대한 공포를 이기지 못해 아파트에서 뛰어내리는 아이들 말이다. 그 아이들이 떨어진 자리는 소문나면 아파트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수돗물에 의해 재빠르게 치워지고 흙으로 덮어진다. 이 아이는 살아서도 죽은 존재였지만 죽어서는 아예 존재 자체가 완전히 지워져버린다. 한 학생의 말처럼 이 세상은 '살아있는 것들이 지배하는' 세상인 셈이다.

도착은 변해야하는 지점에서 변하는 않는 것, 변화한 것을 변화한 것으로 인정하지 않고 마치 여전히 그것이 거기에 있는 것처럼 만드는 것이다. 노무현은 죽은 권력이다. 나는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가 죄를 지었더라도 전직 대통령이니, 혹은 죽은 권력이니 처벌을 받지 말아야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나는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에는 오히려 더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중동과 이명박은 노무현을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갖고 노는 것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다.(따라서 애초부터 그와 거리가 있었던, 그래서 그를 조롱과 멸시가 아니라 범법과 위법의 정도에 의해 딱 그만큼의 처벌을 받으면 된다고 생각한 좌파들의 '일부'나 그의 죽음에 애도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갖고 놀았는가? 조중동과 이명박은 그들의 실책과 잘못을 가리기 위해, 마치 노무현이 여전히 살아있는 권력인 것처럼(그들은 노무현이 죽었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니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된 것이다.), 죽었으되 그를 완전히 죽여야지만 우리 사회가 가능한 것(그 사회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처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계속 갖고 노는 것이 더 중요하다)처럼 그를 검찰이라는 하급권력을 통하여 '갖고 놀았다'. 따라서 노무현은 봉화로 내려갔지만 그들은 그를 끊임없이 서울(신문이라는 지면으로, 혹은 검찰청으로)로 소환했어야만 했다. 그것이 죽은 권력을 가지고 정의를 세우며 살아있는 권력을 보호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지나치게 갖고 놀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도착에 노무현 전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살아남기 위해 죽음이라는 도착적 선택을 택하였다. 도착에 도착이 부딪쳤다. 죽은 권력은 잠시나마 자유로워졌고, 살아있는 권력은 잠시나마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모른다. 죽은 권력을 조롱하고 멸시하던 그 살아있는 권력이 이제 그 죽은 권력을 애도한단다. 프로이드에 따르면 인간은 애도 이후에 비로소 다시 독립할 수 있다. 도착에서의 극복은 애도 이후에 변화를 인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다. 살아있는 권력도 애도를 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제 살아있는 권력은 죽은 권력에 의지하지 못하고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한다. 그런데 이 비겁한 권력이 과연 그렇게 스스로 살 길을 찾을 것인가? 아니면 비겁하게 또 다시 죽은 권력을 하나 더 찾아내서 그를 조롱하고 멸시할 것인가? 아마 후자가 될 것이다. 이 정권이 '의리도 예의도 없는' 정권이라는 것을 우리 모두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글은 월간 <우리교육>에 제가 연재하는 글의 일부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번 달에 제가 쓸 주제가 삶과 죽음의 도착이였습니다. 그의 집권 이후 그가 내놓은 거의 모든 정책에 대해 길거리든 토론회든 어디에서건 반대한다고 외쳤지만 우리 세대(의 일부)에게 애증의 대상일 수밖에 없는, 그러나 가장 매혹적인 정치인이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의 명복을 빌며 이 글을 조사로 드립니다.

독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습니다. 투신자살에 의한 돌연한 죽음이었습니다.

인간다운 세상을 꿈꾸고 민주주의와 진보와 정의를 추구하며 생전에 늘 논란의 중심에 섰던 그가 자신을 놓음으로써 한국 사회에 말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계승해야 할 그의 자산은 무엇이었으며 우리가 극복해야 할 그의 한계는 무엇이었을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서로 허심탄회하게 얘기해 봅시다.

기고를 다음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보내주신 글은 편집 과정을 거쳐서 <프레시안>에 게재됩니다. (tyio@pressian.com / onscar@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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